소설리스트

233화 (233/303)

널 좀 잘 챙겨라

“그러지 말고, 그럼 저녁은 그냥 밖에서 먹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좋을 거 같은데?”

“…요. 혼잣말, 혼잣말한 거예요.”

어렵네, 이거.

꼬박꼬박 자식 놈한테 존대를 하자니….

벌써 4시가 훌쩍 넘었다.

저녁에 따로 약속이 있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더니, 그럼 저녁을 같이 먹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거다.

나는 당연히 그럴 생각으로 온 거지.

파리에서 넘어온 손님들도 있는데, 그 손님들하고의 약속까지 내일로 미루게 만들었음 당연히 저녁을 같이 먹자는 소리라고 이해를 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내가 사는 집에 같이 가 보자고 하는 거다.

장혜란이하고 따로 지내다 보니, 집 생활이 많이 헛헛해졌나 싶었다.

지금의 홍준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지독한 세상 풍파를 홀로 다 겪어 내면서 홍준이도 많이 변했다.

어리고 젊었을 시절, 내가 기억하는 내 아들 홍준이는 지 형에 비해 욕심과 야망이 더 큰 녀석이었다.

모든 건 양면이라는 게 존재하다 보니, 그 욕심과 야망을 앞으로는 경계하게 만들면서도 뒤로는 좋게 봤었다.

그만큼 외향적이고, 그래서 밖으로 나돌며 사람들 만나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내가 가진 기질 중에 지 형보다 영업적인 기질은 홍준이가 더 많이 물려받았다.

지금은 재경 안에서의 내 위치나, 또 내가 홍준이를 받쳐 줘야 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을 하다 보니 많이 자제를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밖으로 사람들 만나고 돌아다니는 걸 참 좋아했거든.

그런데 홀로 재경을 지켜 오며, 또 재경보다 더 커져 버린 부경의 울타리 안에서 이런저런 외압 아닌 외압을 계속 견디는 과정에서 홍준이가 많이 변했다.

밖에서 따로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많이 없다.

가깝게 지내는 사업 파트너도 없는 거 같고, 홍준이에게 사적인 벗이 있다는 소리도 정훈이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딱히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일찍 들어가 뭘 하겠나.

우리 시절과는 달리 자식들 모두를 분가시켜 내보낸 이 마당에.

헛헛하지.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내가 사는 집에 가는 건 괜찮다, 근데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 물밖에 없다.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겠냐, 저녁은 그냥 간단하게 밖에서 먹고 집에 내 취향에 맞는 괜찮은 술 몇 병이 있으니까 2차로 내가 사는 집에 같이 가서 편하게 한잔 더 하자.

내심 설렜다.

이걸 설렜다고 표현을 해도 되는 걸까?

내가 손중길이일 때에도 홍명이, 홍준이… 가끔 따로 불러서 술을 먹였던 적이 더러 있다.

그때는 나를 많이 어려워했지.

술을 아무리 먹여도 속에 있는 말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녀석들에게 나는 참 어렵고 무서운 아버지였던 거 같다.

하지만 이젠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기에, 어쩌면 홍준이의 속에 있는 말을 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런 묘한 설렘이 생기고 있었다.

“뭘 또 번거롭게 밖에서 먹어? 여러 사람 움직여야 되게. 그럴 거면 그냥 애비 지내는 집에서 먹자고 하지.”

“한 번쯤은 번거로운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리 얼굴 다 팔려서 조용한 식당 잡는 게 어렵다 해도 우리가 은밀한 이야기를 할 것도 아니고, 부자지간에 반주 걸쳐서 저녁밥 한 끼 같이 먹는 건데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기분?”

“사람이 어떻게 매번 집밥만 먹어요? 단둘이 같이 식당 같은 데 가서 편하게 술을 받아 본 적이… 있나요?”

최소한 지난 2년 동안은 없다.

그리고 그간 나와 정태를 대하는 홍준이의 모습으로 비춰 봤을 때, 자식들이 어렸을 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집 밖에서 자식들에게 술을 먹여 보거나 한 적은 따로 없었을 거다.

“태화장 어떻습니까?”

“태화장? 육개장집?”

“네. 얼굴 팔린 뒤로는 예전만큼 자주는 못 가고 있는데, 그래도 가끔씩 회사 사람들하고 소주 할 일 있을 땐 종종 찾는 집입니다.”

“네가 그 집을 알아?”

“에이, 서울 사는 사람이 태화장을 어떻게 모릅니까?”

“거기가… 네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던 곳이다.”

아직도 좋아한다.

“참 새록새록하네. 나도 거기서 네 할아버지가 주시는 술을 꽤 많이 받았었는데, 참… 그래, 그렇게 하자.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그 집 육개장 생각도 나네.”

정재현 과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홍준이하고 함께 움직일 건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차를 두 대, 세 대 굴러가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바로 퇴근을 시켰다.

나는 지금부터 회장님 차를 타고 같이 움직일 거니까, 굳이 기다릴 필요 없겠다고.

내일은 삐에르 에슈메 쪽 사람들과 저녁 약속이 있으니 아무래도 늦게까지 대기를 해야 할 거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을 하고 들어가서 쉬라고.

정 과장과의 통화를 끝낸 나에게 홍준이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식으로 물었다.

“그래, 맞다. 장선길이 차 몰던 사람을 데리고 갔다고?”

“네.”

“내가 물어본다는 걸 그동안 경황이 없었네. 왜 그렇게 피곤한 짓을 사서 해?”

* * *

정재현 과장에 관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 태화장에서 다시 이어졌다.

태화장 사장이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내가 혼자, 혹은 가끔씩이라도 회사 사람들이나 하늘이를 데리고 오면서 서로 안면이 생긴 상태였다.

단골 정도는 됐다고 봐야지.

그런데 내가 재경가 사람이라는 건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이 집 사장은 뉴스도 안 보나?

그룹 회장이 노포에 식사를 하러 간다고 하니까, 그룹 본사에서 얼마나 신경을 썼겠나.

미리 방을 섭외해 놓고, 요란을 떨었겠지.

홍준이하고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가게 사장이 깜짝 놀라는 거였다.

그런 가게 사장의 반응에 홍준이 역시 덩달아 놀란 눈치였고.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자주 오는 집이었나 보네.”

“조용히,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고 혼자 한 끼 해결하기 딱 좋은 집이에요. 사람들하고 소주 한잔하기에도 괜찮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기가 막히잖아요.”

원래 이 집이 이런 집이 아니다.

음식 빼는 속도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주문과 동시에 바로 음식이 나오는 집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미리 반찬을 깔아 놓는 집은 아니지.

그룹 본사 사람이 안내한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더니, 이미 기본 찬들이 다 깔려 있는 거였다.

뭐랄까.

진짜 멋대가리 없는 놈들이다.

이런 걸 회장 의전이랍시고 하는 꼴이라니.

이런 집에선 이런 집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라는 게 있고, 또 그런 걸 즐기겠다고 찾는 건데 뭘 몰라도 너무 모르네.

그래도 어쩌겠나.

도수가 살짝 높은 제주 소주 한 병을 시켰고, 곧바로 나온 음식들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홍준이가 정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거였다.

“사정이 딱해도, 너무 큰 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곁에 두면, 그 흠이 네 흠이 될 수가 있다. 아무리 가벼운 자리라도, 사람을 쓸 땐 항상 신경 써서 따져 봐야 한다. 특히 너와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쓸 땐.”

“할아버지가 합당포에서 포목점 일 시작하시기 전에 지리산에서 나무하는 일을 하셨잖아요.”

정말 멀리도 흘러, 흘러 내려갔었지.

함경 신흥에서 하동까지 내려갔으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자식들은 물론이고 당시 내 사람이라고 여겼던 친구들한테는 술안주 삼아 즐겨 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이 시대에 와서는 국내 대기업들을 정리해 놓은 어느 대형 유튜브 채널로 인해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자세하게 소개가 되어 있었다.

“벌목장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반공 청년 단체에서 당시 우익이 쓰던 말로 빨갱이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벌목장 감찰이 뜨죠.”

그런 시절이었다.

특히나 당시 작은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이남을 해서 급하게 몸을 맡겼던 지리산의 벌목장처럼 외지의 경우는 그런 반공 청년 단체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무지한 게 무서운 이유가 바로 그런 거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눈앞에서 죽창으로 사람 가슴팍을 뚫어 버려도 거기에 반공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행정 절차 없이 바로 그 시신을 불로 태워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게 곧 전쟁이라는 거였다.

너, 어디에서 왔어?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한테는, 아재 고향이 어디요?

당연히 너무 옛날이라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단체 사람들이 벌목장 인부들 줄을 나래비 세워 놓고 묻던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경찰, 판사가 따로 없는 거지.

자기들이 경찰이고, 처분까지 그 자리에서 바로 할 수 있는 판사였던 셈이다.

“그때 벌목장 사장님이 감찰 나온 그 단체 사람들한테 막걸리를 안 받아 줬으면, 따로 뒷돈을 안 챙겨 줬으면 아마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큰일을 당하셨거나, 운이 좋았더라도 어딘가로 끌려갔겠죠. 그랬음 재경은 둘째 치고, 회장님이나 저도 세상에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막걸리 한 주전자, 벌목장 사장님이 자기 사비로 준비한 돈 몇 푼이 지금의 재경을 있게 만든 겁니다.”

“…….”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요. 정 과장이 가지고 있는 흠이 당시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이북 출신이라는 꼬리표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게 할아버지가 우리 재경의 직원들 대우를 다른 기업들보다 더 좋게 만들어 내기 위해 항상 애를 쓴 이유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슨 이유?”

“직원은 회사를 키우는 일을 해야 하고, 회사는 직원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재경의 사람들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선 국가도 함부로 뭐라 못 할 정도로 큰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을 누가 만들어 주냐, 바로 직원이다.”

“…….”

“비록 얼마 전까지는 부경의 사람이었지만, 정 과장은 우리 재경이 반드시 지켜 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정 과장 이야기 처음 딱 듣는 순간… 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이 나더군요. 손을 안 내밀 수가 없었어요.”

태화장에서 함께 제주 소주 세 병을 비웠다.

다른 일반적인 날이었다면, 분명 어중간한 시간이었을 거다.

하지만 함께 내가 사는 집에 같이 가 보기로 했고, 거기에서 좀 더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눠 볼 시간이 있었기에 태화장에서의 술이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집에 가 보고 싶다던 홍준이는 어쩐 일인지 거의 다 도착을 해 놓고 타운 하우스 입구 앞으로 차를 세우게 만들었다.

“들어가라.”

“같이 안 들어가고요?”

아쉬운 마음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살짝 취한다. 피곤해. 들어가서 자야겠다.”

“에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마땅히 내어 줄 건 없지만, 그래도 안으로 데리고 가서 뭐라도 좀 챙겨 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가겠다고 하니까 아쉬웠다.

내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억지로 데리고 가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홍준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데리고 왔다는 정 과장이라는 친구, 잘 챙겨 줘라.”

“그래야죠. 그렇게 할 겁니다.”

“너도 좀 잘 챙겨 주고.”

“…….”

“내가 그걸 잘 못 했다. 다른 사람은 챙기면서, 정작 나 자신을 못 챙겼어. 그래서 지난 세월의 나에게 참 미안하다. 미래의 너는 지금의 너한테 미안한 생각을 안 해도 되게끔, 널 좀 잘 챙겨라. 너만 할 수 있는 거다. 들어가.”

괜찮으냐 물어봐 주고 싶었다.

태화장에서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마침 내가 사는 집에 와 보고 싶다고 하니 집에서 같이 한잔을 더 하며 물어봐 주고 싶었다.

장혜란이와 헤어진 지금, 만약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그 대답이 내 눈에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면 지난 세월은 괜찮았냐 물어봐 주고 싶었다.

그렇게 물어봐 주며, 홍준이가 보낸 지난 세월에 대해 고생이 많았다, 그 고생을 인정해 주고 싶었다.

아들에게 받는 인정.

부모로서 그보다 더 힘이 되는 격려가 어디에 있을까 싶은 마음에.

하지만 홍준이는 내가 그렇게 물어봐 주기도 전에 이미 홀로 내가 보내는 마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 역시 이미 다 들은 눈치였다.

결국 난 차에서 내렸고, 외롭게 멀어져 가는 홍준이의 차 뒷모습을,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켜봐 주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손홍준 회장은 조수석에 탄 비서실장을 시켜 내일 아침에 모직의 남필우 사장과 식품의 편승일 사장을 그룹 본사로 불러들이라 지시했다.

“손정태 사장은… 따로 연락을 안 넣어도 되겠습니까?”

“스너프에는 항공 지분이 없잖아.”

그 한마디로 손 회장의 비서실장은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분이 어떠한 결심을 다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재경 그룹 본사 회장실 안으로 모직의 남필우 사장과 식품의 편승일 사장이 함께 들어왔다.

회장실 안에는 재경 그룹 본사 법무팀장이 손홍준 회장과 함께 있었다.

두 계열사 사장의 등장으로 법무팀장은 펼쳐 놓은 자료를 빠르게 수습한 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 회장의 옆자리를 비웠다.

법무팀장이 한 칸 옆으로 비켜 앉으며 비워 준 자리로는 모직의 남필우 사장이 앉았고, 식품의 편승일 사장은 그 맞은편으로 앉았다.

고개를 양옆으로 한 번씩 돌려 남 사장과 편 사장을 차례대로 쳐다본 뒤 손 회장이 입을 열었다.

“모직하고 식품에서 가지고 있는 항공 지분….”

남필우 사장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솟아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손 상무 명의로 돌려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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