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군대구만
“‘고비드’ 아이스크림 라이선스까지 재경에서 가지고 있다니, 놀랍군요.”
삐에르 에슈메의 리안 씨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리안 씨는 전형적인 파리 촌부.
자신이 물려받은 가업과 약간의 별난 취미 생활 말고는 특별한 관심사가 없는 심심한 사람이다.
옷을 잘 차려입는 사람도 아니고, 말투나 행동에 교양과 세련됨이 묻어 나오는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난 이런 유형의 고지식한 유럽인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만 하면 훨씬 더 심플하거든.
자신만의 철학은 확고하지만,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그 철학이 복잡하지가 않다.
그래서 고지식한 이런 사람들이 어떨 땐 훨씬 더 유연하고 열려있는 생각을 잘할 때가 많다.
한국을 방문을 해 직접 마주한 재경이란 기업 자체에 크게 한번 놀라고, 재경식품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에 큰 감동을 받은 리안 씨는 이번엔 내가 보여 주고 있는 스위트럼의 비전에 혀까지 내두르고 있었다.
“현재 목표는 ‘스위트럼’이 계획대로 차질없이 론칭을 하게 되면 올해 안으로 ‘샘스 핫도그’, ‘고비드’까지 동시다발적 론칭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샘스 핫도그는 그쪽에서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라 무난하게 될 거 같은데, 고비드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많이 깐깐할 겁니다. 이탈리안이 대개 그래요. 자기들이 할 땐 여유를 찾지만, 상대에 대한 기준은 상당히 엄격한 사람들이거든요.”
“아뇨, 고비드 측이 깐깐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라이선스 계약은 샘스 핫도그와 비교해 훨씬 수월했어요. 조건도 저희 쪽으로 상당히 유리하게 진행이 됐고.”
“그런데 왜 샘스 핫도그는 무난하게 보면서 고비드에 대해선 퀘스천 마크를 붙이세요?”
“아이스크림이라는 종목 자체가 핫도그 종목과 비교를 했을 때 콜라보 가능성이 무척 높거든요.”
“콜라보요?”
장사는 알지만, 사업은 모르는 사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리안이라는 인물이 원래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지금의 삐에르 에슈메가 있는 걸 수도 있다.
좋은 의미로, 무식하게 자신의 길만을 팠기 때문에 옆에선 왜 저렇게 하나 싶은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인은 본인이 어떻게 해야 성공한다는 걸 아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성공 기준이 세워져 있는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아이스크림이라는 건 변화가 무궁무진한 아이템이에요. 저는 마카롱도 그렇다고 보거든요. 삐에르 에슈메도 베이스를 고집하고 있긴 하지만, 중간중간 새로운 맛을 시도하고 출시도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고비드는 여러 유명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있었지만, 꼭 한국에 우리 재경식품이 직접 가져와 보고 싶은 브랜드였어요. 전통은 유지를 하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브랜드거든요.”
“고비드가… 살짝 그런 느낌의 브랜드이긴 하죠.”
“현지화라는 게 있어요. 당연히 삐에르 에슈메의 마카롱과 티라미수는 현지화라는 게 필요가 없지만, 이 현지화라는 걸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브랜드 이미지, 인지도는 물론이고 매출까지 바꿔 버릴 수가 있죠.”
비록 식사 자리였지만, 우린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사업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삐에르 에슈메의 마카롱 맛을 씌운 고비드 아이스크림.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마케팅이 필요가 없는 거죠. 삐에르 에슈메의 티라미수 맛을 씌운 고비드 아이스크림? 이건 의심을 할 이유가 없는 메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라는 종목이 한국만큼 보편화된 나라가 없어요. 그 한국 고유의 정서, 문화, 감성이 점점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가는 중이기도 하죠.”
“그런데 잠깐만요. 스위스럼이 아니라 삐에르 에슈메의 이름이 들어가네요?”
“만약 한다면, 그리고 리안 씨가 동의만 해 주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가야죠. 그게 스위트럼의 입장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브랜드 광고가 되는 셈일 테니까요. 그런 식으로 콜라보를 진행을 해 볼 수 있게만 된다면 해당 아이템 매출에 따른 삐에르 에슈메의 이름 로열티는 자연스럽게 발생을 하는 거고, 그 로열티는 마땅히 삐에르 에슈메 쪽으로 들어가겠죠.”
“호오….”
“삐에르 에슈메가 현재의 마카롱, 티라미수 퀄리티를 언제까지고 계속 지금처럼 최상의 퀄리티로 유지를 해낼 수 있게 만드는 게 결국은 우리 재경식품의 1차 목표입니다. 그게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선 삐에르 에슈메가 오로지 맛 유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면서도 고정 수입이 증가될 수 있도록 꾸준히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리안 씨에게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갑자기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인데요?”
“그 꿈이 악몽은 아니시죠?”
내가 던진 농담에 리안 씨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희 재경이 아시아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만큼, 고비드 측에서도 계약 이후 맞추고 있는 조율에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 많은 거 같아요.”
“그런 내용은 계약 과정에서 서로 다 합의를 하는 거 아닌가요?”
“콜라보에 대한 부분은 항상 특별 항목이라 라이선스 계약과는 별개라고 보셔야 해요. 이게 깊게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집니다. 시즌 메뉴라는 것도 있고, 특별 메뉴, 한정 메뉴… 항목이 상당히 많아요. 거기다 각기 다른 나라 법을 가지고 계약을 해석해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죠.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시간이 걸린다뿐이지, 그 시간이라는 것도 언제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쪽의 편에 서는 거니까요. 서로 잘되자고 하는 건데 고비드 측에서도 계산기를 조금만 두드려 보면 바로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업의 본질은 관계다.
사업이라는 건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본질이라는 건 절대 복잡할 수 없는 법.
공룡이 되어 있는 힘 있는 파트너와 손을 잡는 게 아닌, 공룡이 될 수 있는, 혹은 공룡으로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파트너를 찾아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형성시켜 내는 것.
그게 진짜 남는 장사다.
물론 잠재력으로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공룡으로 키운다는 건 결코 쉽지가 않다.
그리고 때론 내가 하고 있는 노력과 진심을 배신하는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배신이라는 것도 내 위치가 어중간할 때나 만나는 상황이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부터는 하라고 해도 상대들이 못 하는 게 배신이기도 하다.
나는 재경을 그렇게 키워 왔다.
나보다 힘 있는 공룡 주위를 맴돌며, 그들의 인정을 유도해 내고 관계를 만든 뒤 진짜 실속은 내가 키울 공룡 쪽에서 챙겨 왔다.
그 관계의 균형을 현명하게 잘 맞춰 내기 위해선 내 입으로 뭔가를 하나 집어넣을 땐, 그 전에 반드시 내 파트너의 입에 똑같은 걸 먼저 넣어 줘야 했다.
결코 미련하고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그런 관계가 결국은 가만히 있는 내 입에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걸 꾸준히, 그리고 점점 더 많이 집어넣어 주게 되니까.
혼자 다 먹을 이유가 없다.
그럴 수도 없는 거고.
천천히 먹으면 된다, 천천히.
그러기 위해선 내 잔칫날에 찾아와 줄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들 잔칫날에도 날 불러 줄 것이 아닌가.
삐에르 에슈메.
스위트럼의 출발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다.
그와 동시에 스위트럼의 성공 여부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줄 파트너이고.
다음 날, 인천 공항 국제선 출국장.
난 재경식품 의전팀에서 준비하고 있던 리안 씨 일행의 배웅을 취소시켰다.
내가 정 과장과 함께 리안 씨와 그의 아들을 직접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항공을 잡고 있는 재경 생활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일까, 정재현은 VIP 파트너 배웅에 큰 애를 먹고 있었다.
분명 강 차장을 통해 교육을 받았을 텐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리안 씨 부자의 여권을 챙겨서 티켓팅 창구 쪽으로 가려고 하는 걸 결국 내가 잡아 세운 다음 전화를 걸었다.
“손정훈입니다.”
―네, 상무님!
“지금 여기 청사 안인데, 잠시 혼선이 생긴 거 같네요. 누굴 좀 보내 줘야 할 거 같은데….”
―어디십니까?
“J 카운터 앞에 있습니다.”
―연락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의전 직원 보내겠습니다.
정재현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리안 씨와 그의 아들이 더 불편해하고 있는 거 같아 정 과장이 챙기고 있던 그 두 사람의 여권을 대신 건네받아 농담을 건넸다.
“다음에 한국에 오실 땐 아마 기내에서 스위트럼의 마카롱을 서비스받게 되실 겁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대단하단 말밖에는 안 나옵니다. 단가가 낮지가 않을 건데, 재경항공 이용객 모두에게 기내 서비스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지요?”
“더 많은 프로모션을 준비 중입니다. 다시 한번 약속드리지만, 삐에르 에슈메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사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스위트럼이 만들어 낸 맛의 근본인 삐에르 에슈메와 우린 하나라는 생각으로, 오리지널의 명성을 먼저 생각하는 사업을 하게끔, 그렇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청사 내 재경항공 창구 담당 책임자가 다가왔다.
난 그 책임자에게 리안 씨 부자의 여권을 전달했고, 그녀는 여권에 붙은 사진과 실물만 간단하게 비교 확인을 한 후 미리 출력해 온 티켓을 여권 사이에 끼워 곧바로 리안 씨 아들이 들고 있던 대형 슈트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리안 씨 부자와는 그 자리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정재현은 아무런 티켓팅 절차 없이, 그것도 일반 체크인 검색대가 아닌 관계자 전용 통로를 이용해 들어가는 리안 씨 부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내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어제 강 차장님 통해서 다 설명을 들었는데, 제가 파트너 의전은 처음이라 긴장도 많이 했고, 전체적으로 이해를 잘 못 했던 거 같습니다.”
지적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을 했고, 그게 뭐 어때?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회사엔 의전팀이 따로 있다.
이건 정 과장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할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실수가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
“실수야 얼마든지 바로 잡을 수 있는 거지만, 태도는 시간이 걸리는 거잖아요. 쓸데없는 주눅. 그거 보기 별로 안 좋은데?”
“…….”
“항상 나하고 같이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에 주눅부터 들기 시작하면, 내가 불안해서 어떻게 더 같이 다녀요? 일을 영 잘못 배웠네. 나는 또 부경통신에서 전략기획팀 과장까지 했다길래, 그 정도 대범함, 순발력 정도는 당연히 탑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아예 아니네.”
“죄송합니다.”
“실수도 나오면 안 되는 거지만, 더 중요한 건 실수가 나왔을 때 그걸 수습을 할 수 있냐, 없느냐지. 얼마나 필요해요?”
“네? 뭐… 뭐가 얼마나 필요하냔 말씀이십니까?”
“지금 정 과장 몸에 들어가 있는 불필요한 힘. 그거 다 빼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냐고. 로봇도 아니고 무슨 표정, 움직임이 그렇게 뻣뻣해요?”
주차장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고, 곧 정 과장이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함께했다.
“5일 정도면 지금 몸에 들어가 있는 힘 다 빼는 데 충분하겠어요? 다음 주에 나 이탈리아 출장 잡혀 있는 거 알죠?”
“네, 고비드 건으로 그곳 본사 방문 일정이 잡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강 차장님한테 듣기로는 어쩌면 저도 같이 가야 할 수 있다고, 준비를 하라고 들었습니다.”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강 차장만 데리고 간편하게 다녀올 생각이에요. 애들 방학도 하고 했을 건데, 나 이탈리아 출장 가 있는 동안 정 과장은 가족들 데리고 가까운 제주도라도 한번 갔다 와요. 비행 편하고 호텔은 강 차장한테 말해서 회사 이엔티 처리하고.”
“아닙니다, 상무님. 출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내 스타일의 연수라고 생각해요. 내가 제주도 가라고 했다고 또 딱 거기만 생각하지 말고. 딴 데 가족들 데리고 가고 싶은 곳 있음 알아서 일정을 잡으라고. 걱정되네, 진짜. 지금 정 과장 모습으로는 내가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해서 그래. 긴장하는 거하고, 항상 주눅이 들어 있는 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긴장을 하란 말을 항상 쫄려 있으란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그 정도 구분은 해야 하지 않나?”
“…….”
“과장님.”
“…네, 상무님.”
“긴장의 질이 좋으려면, 풀어 주는 걸 잘해야겠죠?”
“네.”
“근데 그게 쉬운 게 아니라고. 나도 알아. 그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강 차장하고 이탈리아 일정 소화하는 동안 정 과장은 최대한 빨리 지금 몸에 들어가 있는 그 보기 싫은 힘을 어떻게 좀 빼 봐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바뀌었으면 거기에 맞게 또 바뀌어야지. 같이 있으면 괜히 막 내가 다 답답해. 하면 얼마든지 잘하겠는데, 참… 아직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네. 언젠가는 잘할 거, 그냥 좀 빨리 잘하면 안 되나? 잘할 거잖아요?”
내가 걸음을 옮기며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싱긋이 웃어 줬더니,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얼굴에 번진 웃음을 숨기는 정 과장이었다.
“누구 앞에서건 고개 숙이지 말고. 고개는 밥 먹을 때만 숙이세요. 나는 나랑 제일 많이 같이 다니는 사람이 항상 좀 당당하고 힘이 있었음 좋겠네. 내가 보호를 해 주겠다고 내 옆에 두는 게 아니잖아요. 보호를 받겠다고 옆에 두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완전히 군대구만. 뭘 또 명심까지 하실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