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이 맞습니다, 최소한 제 기준에서는
“그만큼 돌아다녔음 충분해. 그간 고생 많았어. 이제 그만 본사로 들어와.”
손홍준 회장과의 점심 식사 자리였다.
조동희 전무는 갑작스러운 본사 호출에 손 회장의 마음을 읽어 보기 위해 미간을 찡그렸다.
“본사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확실히 그동안 한 번도 경험이 없었던 통신이 붙으니까 여기저기에서 헛발질이 많이 나오네. 역시 자네 말고는 사장급을 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직접 다 해. 나 말고도 무서운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 지금 시끄러운 통신 쪽 교통정리가 되겠어.”
“하지만 저는 식품으로 옮긴 지 아직 반년도 안 됩니다.”
“자네가 어디 지금 거기 일하러 가 있는 건가. 정훈이 자리 다져 주겠다고 같이 가 있는 거 아냐.”
조동희 전무는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다져야 해? 이만하면 충분하지. 정훈이가 계속 식품 생활만 할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정훈이 추천이야.”
잠시 눈이 동그랗게 커졌던 조 전무는 회장님 앞에서 고개까지 갸웃거려 가며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확인을 받듯 물었다.
“손 상무 추천이라고요?”
“내가 물어봤어. 지금 통신 쪽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사장 자리에 앉혀 놓은 친구의 역량 부족인 거 같다고.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정태, 정훈이를 따로 불러서 생각을 물어봤어.”
“…….”
“정태는 사장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을 하네. 내가 진형철이를 통신 사장 자리에 앉힌 이유는 알겠지만, 통신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 그 안에서 생겨나는 마찰을 우리 재경의 스타일대로 조율하는 데엔 분명 한계가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통신 쪽 경험이 많은 외부 인사를 데리고 오는 게 좋겠다고 해.”
조동희 전무는 손 회장의 입에서 나온 손정태 사장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손 상무 생각은요?”
“나오는 잡음을 무슨 수로 그치게 만들겠냐고 하던데?”
그 말에 조 전무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손정훈다운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애정이 없고 그 조직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욕심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잡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서, 억지로 잡음을 잡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잡음이 줄어들게끔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해.”
손정훈의 통찰력에 조 전무가 속으로만 흐뭇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손홍준 회장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대신 그 잡음을 받아 줄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필요하다는 거야.”
“잡음을 받아 줄 사람이요?”
“애가 운다고 어떻게 계속 사탕만 줄 거야? 사탕이 필요할 때도 있고, 때론 엄격하게 훈육을 할 수도 있어야지. 자기가 봤을 때 그걸 우리 재경 안에서 가장 잘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일 거라고 해. 실력 있는 사람을 외부에서 데리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지금은 통신에 우리 재경의 색깔을 새로 입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말이야.”
“…….”
“정태, 정훈이 둘 다한테 설득을 당했어. 다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생각을 만들어 낸 게 정훈이고.”
* * *
회장님과의 식사 자리를 끝내고 다시 식품 본사로 복귀를 한 조동희 전무.
“본부장님 자리에 계시나?”
“네, 계십니다.”
조 전무는 비서팀 직원의 대답에 자신의 방이 아닌 손정훈 상무의 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똑. 똑.
안에선 손정훈 상무가 강인성 차장을 곁에 앉혀 놓고 이야기 중이었다.
“아이고, 미팅 중이셨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고비드 본사 방문 일정을 좀 짜고 있었어요.”
자기 때문에 중간에 끊어가는 것만 같아서, 조 전무는 괜히 강 차장에게 미안해지려고 했다.
패드를 정리해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강 차장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후, “미안해.” 하고 말한 조 전무에게 강 차장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강 차장이 자리를 나가고 난 후, 여전히 손 상무의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며 조 전무가 말했다.
“차 한잔 얻어먹겠다고 찾았는데, 조금 이따가 올 걸 그랬네요.”
“이쯤 되면 양심상 좋은 차 한 통 정도는 저한테 사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좋은 차의 기준을 알면 직접 내려 마시지, 눈치 보면서 이 방을 왜 찾겠어요?”
“이야… 당당하기까지 하시니까 제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앉으세요. 차 한잔합시다.”
자신의 그룹 본사 복귀를 다른 사람도 아닌 손정훈 상무가 회장님께 직접 추천한 이유가 헷갈리고 있었다.
조 전무가 손정훈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사람을 회장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놓게 만들기 위함일까?
후계 구도에서 한발 유리한 위치를 잡아 내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건 지난 몇 년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손정훈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헷갈리고 있었고.
재킷 단추를 풀어 소파 자리에 털썩하고 앉으며 조 전무가 말했다.
“방금 회장님 모시고 점심 다녀오는 길입니다.”
커피포트로 물을 끓이고 있던 손정훈은 그저 고개만 까딱까딱거리며 “그러셨어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회장님께 절 그룹 본사로 복귀시키라고 추천을 하셨다고요?”
“추천까지는 아니었는데? 통신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은 거 같아서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겠냐고 말한 게 전부였어요.”
“회장님께서 저더러 그룹 본사로 복귀를 하라고 하시네요.”
“전무님 생각은요?”
“제 생각이 중요하겠습니까? 회장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해야지요.”
내린 차를 가져와 자리에 앉은 뒤, 한 잔을 조 전무의 앞으로 밀어 넣으며 손정훈 상무가 말했다.
“전무님 생각이 왜 안 중요합니까? 무엇보다 중요하지.”
손정훈은 한쪽 다리 무릎 위로 반대쪽 다리를 꼬아 놓고 찻잔을 들었다.
“모직에 있을 때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있잖아요.”
“무슨 말이요?”
“올해로 재경 생활 34년 차시죠?”
“벌써 그렇게 됐네요.”
“삼사 임원을 거쳐, 그룹 본사 전무까지. 이미 재경 그룹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 무슨 욕심이 더 있겠냐고 저한테 물어보셨잖아요.”
아마 그때가 지금의 손 상무와 업무적으로 일대일 면담을 한 게 처음이었지?
조 전무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무님 친구들, 동기들은 이미 진즉에 은퇴해서 집에서 손주들 재롱떠는 거 보는 재미로 산다면서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무님 정도 되면 충분히 그렇게 사셔도 되잖아요.”
“…….”
“경제적 자유는 이미 진작에 이루셨을 거고, 사회적 지위, 권력… 이미 충분히 다 누려 볼 만큼 누려 보지 않으셨어요?”
“하고 계시는 질문이 회장님 통해 절 그룹 본사로 복귀를 시키겠다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내용인 거 같은데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이유요?”
“전무님이 우리 재경 그룹에 진심인 이유, 아들뻘 정도밖에 안 되는 절 따라 이곳 식품으로 기꺼이 옮겨 주신 이유. 그런 건 금전적인 욕심이나, 출세욕, 권력욕 같은 거랑은 이유의 궤가 다르다고 봅니다.”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기 위해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인 손정훈 상무.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눈만 위로 살짝 올려 떠서 조동희 전무를 바라봤다.
“회장님이 모직의 남 사장님과 우리 식품의 편 사장님을 따로 불러서, 항공에 담겨 있는 모직과 식품의 지분을 제 명의로 돌리라고 하셨다죠?”
“…….”
“제가 아는 회장님은 지난 세월의 풍파 때문에 극도로 신중해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독단적으로 혼자 하실 분이 아니에요. 결국은 후계에 관한 내용이라고 봐야 하는데, 우리 재경 안에서 과연 회장님과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을 나눌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딱 거기까지만 생각을 해 봐도 두 명으로밖에 안 좁혀지죠? 바로 모직의 남 사장님, 그리고 전무님.”
조 전무는 최대한 감정을 숨긴 채 찻잔을 입술에 붙였다.
“그런데 굳이 남 사장님과 편 사장님을 동시에 불렀단 말이죠? 남 사장님도 그 자리에서 알게 된 내용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제 생각을 물으시길래, 저는 상무님 쪽으로 더 큰 가능성을 봤다고 대답을 드리긴 했습니다.”
“실수하신 겁니다.”
“실수요?”
“네, 너무 큰, 우리 재경의 입장에선 뼈아픈 실수를 하신 겁니다. 제가 전무님을 상대로 실망스럽단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무슨 실수를 한 거란 말인가.
조 전무는 손 상무의 생각을 좇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님 본인은 모릅니다. 회장님이 지금 얼마나 후계 부분을 서두르고 있는 건지. 그건 회장님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당사자가 되면 마찬가지일 거예요. 자신이 하게 될 선택으로 재경의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는 내용이잖아요. 아직 급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선택과 결정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항시 함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참모가 왜 참모입니까? 회장님이 불필요하게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느낄 때 옆에서 안심을 시키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야 참모 아닙니까?”
조 전무는 할 말이 없었다.
“손정태 사장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제 눈에만 보이는 겁니까?”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조 전무는 손정훈 상무가 보이고 있는 이해하지 못할 입장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누가 손정태 사장의 뛰어남을 몰라서 그런 의견을 회장님께 올렸나.
잘 알지.
누구 보다 더 잘 알지.
하지만 그 뛰어난 손정태보다 손정훈이라는 이 상식 밖의 인물이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걸 어쩌란 말인가.
이 인물이 재경을 이끄는 모습을 꼭 두 눈으로 확인을 해 보고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누가 봐도 그게 정답인 것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저는 아무리 봐도 아직 손정태 사장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영 포텐을 10분의 1도 터뜨리지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왜 손 사장이 가지고 있는 포텐을 다 터뜨려 보기도 전에 후계라는 명목으로 기회를 빼앗아 가려고 그럽니까?”
“…….”
“후계자 선정이라는 건 회장이란 자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겁니다. 그 무기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후보자들의 잠재력을 모두 다 끌어낼 수도 있고, 빛조차 못 보고 그대로 묻히게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내가 왜 암 선고를 받기 전까지 후계자 선정을 안 하고 계속 미루고만 있었는데.
이미 내 마음속으로는 홍명이 놈으로 점을 찍어 두고 있었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홍준이 놈이 나의 결정으로 인해 자신의 벽을 만들어 버릴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충분히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는 자식이 홍준이었다.
비록 재경은 홍명이에게 넘겨주더라도, 재경 못지않은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 낼 체력과 경험, 능력을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홍명이에게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 자식들을 내가 일궈 낸 재경 안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더 큰 재경을 만들고, 재경 못지않은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식들로, 경영인으로 키워 내고 싶었다.
“전무님.”
“…네.”
“지금 우리 재경. 전무님이 보시기에 앞으로 치고 나갈 때인 거 같습니까, 아님 내실 다지기를 해야 할 때인 거 같습니까?”
“치고 나갈 때이지요.”
“당연하지요. 이제 막 부경을 잡았는데, 여기에서 내실 다지기를 해 버리면 본래 우리의 목표가 고작 부경이었던 게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후계 이야기를 꺼내고, 그걸로 그룹 내부적으로 긴장감을 만들어 내실을 다질 때가 아닙니다. 누구 한 명이라도 계속해서 밖으로 나가 10원짜리 하나라도 재경 안으로 굴러 들어오게 만들어야 할 때이죠. 이런 기회를 만들어 놓고, 후계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거 지금 안 하면 재경이 망합니까?”
뭐 하나 반박할 건덕지가 없었다.
철저하게 두들겨 맞기만 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조 전무는 손 상무의 생각을 듣는 내내 스스로에게 화가 뻗칠 지경이었다.
“34년 재경 생활 하시면서, 지금처럼 모든 상황이 우리 재경 쪽으로 무조건 유리하게만 돌아가던 때가 있었습니까?”
“…하아.”
“파도라는 게 있어요. 파도라는 건 높게 들이칠 때도 있고, 잔잔하게 흘러들어 올 때도 있죠. 그동안 얼마나 잔잔하게만 흘러들어 왔습니까. 이제 겨우 높은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하는데, 그 파도에 올라탈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그 파도를 잠재울 생각을 하시는 건지, 참….”
잠시 말을 끊어 놓고 손정훈 상무는 흥분한 자신의 목소리를 바로잡았다.
“전무님. 우리 1등 한번 해 봅시다. 그걸 해내기 위해선 후계에 대한 회장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니까요? 그걸 옆에서 천천히 늦춰 주고 바꿔 줄 수 있는 사람이… 제가 봤을 땐 우리 재경에 전무님뿐이에요.”
“나중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손 상무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계. 중요하지요. 근데 그게 재경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다면, 그걸 알면서도 회장, 단 한 사람의 마음 잠시 편하자고 강행을 한다면… 우리 재경이 부경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상무님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딴 걸 무서워할 거 같습니까?”
“자신감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꼭 1등을 한번 해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받아 주세요.”
“하아, 참. 쩝.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상무님이라는 사람. 이게 게임도 아니고, 왜 스스로 상무님의 인생 난도를 높이시는 건지, 원.”
“기회가 커졌는데, 난도를 높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 손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스너프를 단 2년 만에 항공을 넘어설 정도로 저렇게까지 키워 내는 거, 그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될 거 같아요?”
“…….”
“처음부터 그쪽으로 집중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아예 처음 만져 보는 사업을 저렇게까지 키워 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 날개를 꺾겠다고요? 더 높게 날아 보라고 더 큰 날개를 달아 줘도 모자랄 판에 고작 후계 문제 때문에?”
“고작이라니요, 상무님.”
“고작이 맞습니다, 최소한 제 기준에서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