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널 위한 거야
정태는 어머니, 장혜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차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손정태 사장을 운전기사는 수시로 백미러를 통해 힐끔거렸고, 그렇게 큰 사모님께서 혼자 지내고 계시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화가 굳어서 가슴 언저리에 돌이 되어 있는 기분.
최근 며칠간 손정태 사장은 매일같이 그런 무거운 돌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지냈다.
부경과의 싸움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안 문제가 정태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부모님의 별거 문제는 오히려 하루하루 정태를 미쳐 버리게 만드는 원수경과의 부부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거지. 부부인데.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거지.
동생 정훈이의 선택과는 달리, 정태는 원수경을 사랑으로 만났고 그 사랑으로 결혼을 선택했던 거였다.
하지만 사랑이란 애틋한 감정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고,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서 오는 상실감, 그리고 모든 걸 다 가진 자신에게 비참함을 안겨 주고 있는 아내에 대한 증오심이 정태를 그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괴로움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가 일반적인,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큰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는 정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승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몰랐다.
아이를 무척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평소 자신에게 보여 줬던 모습들, 시부모 앞에서 해 왔던 행동들… 그 모든 것들을 미루어 짐작해 아내라면 틀림없이 애살 가득한 엄마가 되어 줄 거란 생각만 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를 너무 구속하고, 옭아매는 엄마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지레 해 왔던 정태.
그런데 승현이가 태어난 후 아내가 줄곧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정태가 기대하고 있던 가정의 모습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해 보며, 과연 그 결정이 어떠한 파장을 가져올지, 승현이에게 어떠한 정서적 해로움을 가져올지에 대한 생각들로 정태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후우….”
손정태 사장이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낼 때마다, 운전기사는 잠시 시간을 둔 뒤 몰래 백미러로 사장님의 기분 상태를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손정태 사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을 했다고, 애 엄마가 되었다고 항상 육아만 하고 살림만 살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강요를 할 마음도 없었다.
얼마든지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고, 승현이가 조금 더 큰 다음, 아내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땐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어떻게 집에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둘이나 있고, 육아만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사람까지 붙였는데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육아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그 스트레스가 승현이에게 전염되지 말라고, 전쟁은 나 혼자 회사 나가서 하고 올 테니 오로지 승현이와 행복한 시간만 나누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는 모두 다 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아내의 차에 달린 블랙박스와 내비 기록을 확인한 뒤 손정태 사장은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과 비참함을 느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을 하다시피한 호텔 방문.
차 보닛 앞을 지나가는 아내의 꾸민 모습은 손정태 사장으로 하여금 살인 충동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정태를 더 미치게 만들었던 건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호텔 방문에 대한 이유를 묻는데, 똑바로 대답을 못 하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따로 사람을 붙일까 하는 생각까지 해 봤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자신이 더 초라해질 것만 같아 그것마저 스스로 포기를 시켜야 했던 정태였다.
* * *
넓은 거실.
그리고 거실 정중앙에 반듯하게 위치해 있는 소파.
그 소파에 앉아 장혜란은 고급 다기를 다루고 있었다.
첫물은 다시대에 흘려보내고, 두 번째 우린 물을 찻잔 두 개에 적당히 따른 후 주전자 속으로 다시 뜨거운 물을 채워 넣었다.
“혼자 지내는 게 이렇게 편하고 좋을 줄 알았음 진작에 졸혼을 하는 건데 말이야.”
찻잔 하나를 아들 앞으로 밀어 놓고서 장혜란은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유치하게 무슨 졸혼이에요, 졸혼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거예요?”
“이제 시작한 혼자만의 시간인데, 뭘 언제까지야?”
“어머니.”
“안 들어간다. 안 들어갈 거야. 지금이 좋아.”
“어머니까지 도대체 왜 그러세요, 진짜. 그럼 뭐 진짜로 이혼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이혼? 누구 좋으라고? 그것도 안 해. 그냥 이렇게 계속 지낼 거다. 난 진짜 괜찮으니까 쓸데없이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 지금 며칠째 집에 안 들어가고 있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수경이하고 통화를 했으니 아는 거지.”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별것도 아닌 일,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걸 뻔히 다 알아 버렸는데.”
장혜란은 곰 같기만 한 며느리의 처세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뭐가 어머니 때문이에요?”
“수경이 걔가 그렇다. 어쩜 그렇게 미련하고 시키는 것만 하는지, 한 번씩 보면 답답해 죽겠어. 결국은 그런 모습 때문에 내가 더 마음을 쓰고, 예쁘게 보는 거겠지만 나만 팔면 끝날 걸 그게 뭐라고 끝까지 혼자 다 안고 있는 건지….”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내가 시켰다고, 내가. 수경이 걔가 딴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했던 게 아니라, 다 내가 시키니까 별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그렇게 된 거란 말이야.”
오히려 이번 일로 며느리 원수경에 대한 장혜란의 믿음, 신뢰는 끝없이 높아져 있었다.
“너는 어떻게 몇 년을 한 이불 덮고 같이 살면서 네 와이프를 그렇게까지 몰라?”
“……?”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수경이한테 남자는 또 무슨 남자고. 바람은 뭐 아무나 피우니? 그렇게 순해 빠지기만 한 애가 바람? 하! 참 너도 너다. 어지간해.”
“또 뭐가요?”
“조양 그룹 첫째 며느리 알지?”
“계성 그룹 막내 딸 말씀이세요?”
“그래, 설유림이. 걔가 만든 모임이 하나 있어.”
“진짜 지겹다. 어머니까지 진짜 왜 그러세요?”
짜증 섞인 모습을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장혜란은 답답한 한숨을 흘려 놓고 목소리 톤을 살짝 올렸다.
“네가 그렇게 칠색 팔색을 하니까, 수경이 걔가 어디 겁이 나서 너한테 솔직하게 말을 하겠냐고!”
“말을 좀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내가 줄 대서 수경이 그 모임에 들어가게 만든 거야.”
“…어머니가요?”
“내가 줄 안 만들어 주면 수경이 걔가 무슨 수로 그런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겠어? 한 번씩 내가 불러서 같이 움직일 때나 사모들 모임에 멀뚱히 끼어서 분위기 맞추는 게 전부인 앤데.”
“…….”
“네가 질색을 해서 더는 그 모임에 못 가겠다고 하는 걸, 내가 그냥 너한테 따로 말하지 말고 계속 나가라고 했어. 어디에서 만날 거야? 다 호텔이지. 내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나갔다는 한마디면 다 끝날 것을 그걸 말을 못 해서 서방 오해를 하게 만들어 집을 나가게 하지를 않나, 지 마누라가 누구 때문에 그런 자리에 계속 얼굴을 내비치는지도 모르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오해나 하지를 않나. 네들 하는 게 이런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상했다.
분명 여전히 기분이 나쁘고,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었는데 가슴 한편에서 뭔가 뜨거운 느낌이 그간 굳어 있던 돌덩어리를 조금씩 녹여 내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인상을 굳힌 채 정태가 물었다.
“도대체 그런 건 왜 시키는 건데요?”
“네가 하는 짓이 이러니, 수경이 시켜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제가 뭘요?”
“모직, 식품이 들고 있는 항공 지분. 이번에 네 아버지가 사람들 시켜서 그거 정훈이 앞으로 돌릴 준비중이라는 거 알고는 있어?”
들어서 알고 있다.
속은 좀 쓰리지만, 정훈이가 받아야 할 당연한 포상이라고 생각을 했다.
스너프가 부경의 마트를 인수하는데, 항공이 부경의 통신 지분 58퍼센트를 흡수해 부경의 간판을 내리고 재경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누가 뭐래도 정훈이가 맞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후계 구도가 만들어진 지금 상황에 꼭 항공의 지분으로 포상을 해야만 하셨을까란 섭섭함이 있었지만, 시기적으로는 적절한 포상 타이밍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왜요, 어머니. 아버지 입장에선 하실만 하니까 하시는 거예요. 정훈이도 받을 만하니까 받는 거고. 그 큰일을 해냈는데, 아무런 포상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 큰일이 참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엄마 앞에서 외삼촌들 상대로 싸워 이긴 게 참 자랑스러운 모양이야.”
“저는 한 번씩 어머니가 이런 입장을 보이실 때마다 정말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럼 그렇게 지저분하게 나오는 사람을 상대로 가만히 당해 줘야 했다는 겁니까? 제가 어지간했음 아버지한테 그러시지 말라고 하면서 어머니 편을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 두 분 사이에 오고 간 감정싸움 앞에선 무조건 아버지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네가 무슨 감정싸움인 줄이나 알고?”
“외삼촌 징역 건 때문에 다투신 거잖아요. 그래도 가족인데, 적당한 선에서 끝을 안 맺은 거 때문에.”
“내가 왜? 내가 왜 내 남편, 내 자식, 내 집 등에 칼을 꽂은 인간 보호하겠다고 네 아버지하고 싸워?”
“…그럼요?”
찻잔을 내려놓기 위해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인 장혜란은 큰 심호흡과 함께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워 입맛을 다셨다.
“엄마는 하늘이가 싫다. 아니, 하늘이가 싫은 건 아냐. 걔가 뭘 알 것이고, 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미래금융이 정훈이 처가가 되는 건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
“그동안 네 외가, 부경과 있었던 모든 사달의 중심에 누가 있었어?”
“그건….”
“뭘 생각을 해? 정훈이야, 정훈이. 근데 정훈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변했냐고. 바로 하늘이 만나고 나서부터잖아. 장 회장님 만나러 그 집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애가 그렇게 변한 거야.”
마침 정태 역시 그 부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진 어머니의 속상함에 정태도 그동안 잘 잡고 있던 중심을 잃고 말았다.
“엄마가 이렇게 따로 밖에 나와 지내고 있는데, 아직 괜찮냐는 전화 한 통이 없다. 정훈이가 어디 그런 애였니?”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신 지 일주일이 넘었다.
처음 며칠간은 몰라서 연락을 안 넣었겠지만, 이미 본가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아직 찾아뵙는 건 둘째 치고 전화 한 통을 안 넣었다고?
정태는 갑자기 동생이 하고 있는 처신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장혜란이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엄마한테는 친정 형제들이야.”
“어머니 형제들이 그동안 우리 재경을 숨 막히게 만든 것도 사실이죠.”
“너는 그렇게 생각을 해도 돼. 엄마가 이해해. 너나, 네 아버지, 정훈이… 엄마가 그런 생각까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니?”
“…….”
“하지만 정태야. 감정은 감정이고, 사실은 사실이야.”
“뭐가 감정은 감정이고, 사실은 사실이란 말이에요?”
“재경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시절 네 외할아버지가 재경의 부실 계열사들을 인수하면서 재경 쪽으로 자금줄을 터 줬기 때문이야.”
“하아, 어머니. 그걸 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세요? 진작에 터 줄 수도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엄마가 중간에 끼어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네 아버지는 지금 네가 하는 말처럼, 진작에 터 줄 수 있었던 자금줄을 왜 네 큰 아버지가 안 좋은 선택을 하신 이후에나 터 줬는지를 나한테 원망하듯 따져 묻고, 네 외가에선 섭섭해하는 나한테 기껏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놨더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따리부터 내어놓으란 소리냐는 식으로 적반하장을 한다고 말한다."
“…….”
“그 중간에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니? 엄마는 네 친할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고 네 아버지한테 시집을 갔겠니?”
“…….”
“나라고 그런 걸 다 알고 너희들 낳고 네 아버지랑 같이 살았겠냐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걸 나한테 어쩌란 말이야? 나라도 네 외할아버지 찾아가 무릎 꿇고 싹싹 빌며 한 번만 내 남편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해야 했던 걸 어쩌라고. 그렇게 산 대가가 고작 이런 거야? 좋아. 상관없어. 혼자 사니까 편해. 나랑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네들 아버지. 앞으로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어. 나야 편하지. 근데 자식은 다른 문제야. 너하고 정훈이는 내가 네들 아버지랑 같이 살건, 떨어져 살건, 이혼을 하건 변함없는 내 아들들이니까.”
“…….”
“내 친정 형제들을 상대로, 그것도 아주 고의적이고 또 계산적으로 정훈이 앞세워 망가뜨린 미래금융. 내 아들 시켜서 내 오빠를 징역 살게 만든 미래금융. 엄마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정훈이 그 집에 장가 못 보낸다.”
정태는 그게 아버지와 크게 다투신 이유였냐 물었다.
그에 장혜란은 대답 대신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지금 네 아버지가 급하게 항공 지분을 정훈이 앞으로 돌리려는 거, 그것도 결국은 미래금융하고의 관계 때문이야. 미래금융 측에서 정훈이, 하늘이 혼사로 기대하는 게 뭐겠어? 내가 평생을 네 아버지, 네 외가 삼촌들 사이에 끼어서 재경 사람도 아니고 부경 사람도 아닌 취급까지 받아 오며 지켜 낸 재경. 그 재경 안주인 자리에 미래금융이 앉는 거 난 못 봐. 네들 싸우는 건 더 못 보고. 그러니까 순해 빠진 네 와이프 상대로 말 같지도 않은 오해 같은 거 그만하고, 재경 안에서 마땅한 네 자리 지켜 내.”
“…….”
“수경이는 어디 그런 모임 자리가 즐겁고 좋아서 쫓아다니겠어? 다 널 위한 거야. 널 위한 거고, 우리 재경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