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
원수경은 시어머니, 장혜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남편 지금 막 출발했다.
현재 집안에서 원수경을 살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가 남편을 불렀다는 건 자신이 그린 그림이었기에 당연히 알고 있었고, 지금쯤 이야기가 다 끝나 갈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 중인 원수경이었다.
그럼에도 속에 있는 마음을 숨긴 채, 통화로까지 연기를 펼쳐 냈다.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직접 물어봐. 집으로 간다고 하니까.
당연한 결과.
하지만 원수경은 놀란 듯 이야기를 했다.
“집에 온대요?”
―가야지, 그럼. 그럼 뭐 언제까지 호텔 생활을 하게 내버려 둘 거야? 수경아.
“네, 어머니.”
―부부간에도 요령이 있어야 해.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원수경은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 피식하고 웃었다.
요령이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본가에서 쫓겨났다는 게 원수경은 우스웠다.
정작 얼굴은 비웃음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시어머니를 상대하는 통화 목소리만큼은 더없이 차분하고 순종적이었다.
“네.”
―욱심이 있어서 그렇지, 네 남편만큼 심플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네.”
―지금 같은 때일수록 네가 네 남편 옆에 착 달라붙어서 부족한 부분 채워 주고, 기를 살려 줘야지. 어쩜 요령이 그렇게 없니? 내가 이런 거까지 일일이 다 참견하고 잔소리를 해야 해?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노력할게요.”
―밖에서 챙길 땐 하늘처럼 떠받들어 주고, 안에서 챙길 땐 아기처럼 살살 구슬릴 줄 알아야지 너처럼 요령 없이 곧이곧대로 하면 되겠어?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 쓸게요.”
원수경은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이참에 기회로 바꿀 준비 중이었다.
시아버지가 미리 언질도 없이 집에 다녀갔던 날.
눈앞이 노랗게 변해 가는 그 와중에도 원수경은 자신이 처한 위기를 효과적으로 탈출할 방법이 본능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상황의 쟁점을 이상한 방향으로 부풀리고 있는 남편 덕분이었다.
자신의 차 블랙박스와 내비 기록을 확인하는 남편의 모습에, 원수경은 호텔 방문이 재계 며느리들 클럽 모임 때문이었단 사실을 말하지 않는 쪽으로 입장을 굳혔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남편을 상대로 미안하단 말을 유도해 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 미안함을 느끼는 남편으로 하여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연애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숱한 말다툼과 크고 작은 자존심 싸움 등으로 터득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자존심이 강한 만큼, 그 속은 무척이나 무르고 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최소한 원수경,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무르고 약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장남이라는 부담감, 거기에 재경의 후계자라는 중압감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항상 그런 부담감과 중압감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며 버티고 있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사람에 대한 욕심이 많고, 인정에 대한 갈증이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재계 며느리들의 클럽 모임에 초대를 받기 시작했을 때, 원수경은 자신이 가진 욕망을 후회 없이 펼치고 만끽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 초대의 발단이 시어머니, 장혜란이었다는 사실은 원수경으로 하여금 남편이 아무리 그런 모임을 질색하더라도 그 질색을 무시하고 계속 참석을 해도 되는 명분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막상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하는 순간, 원수경은 무서울 게 없어졌다.
얼음보다 차가워진,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 눈빛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 있었다.
그게 이유였다.
잦은 호텔 출입에 남자가 생겼냐는 의심을 하는 남편.
그리고 별거 중인 시부모님의 상황.
원수경은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온 집안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금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는 기가 막힌 묘수가 떠올랐다.
우선 시어머니, 장혜란에게만 전화를 넣어 현재 남편이 집을 나간 상태라며, 그간 재계 며느리들 클럽 모임에 질색을 하는 남편 때문에 몰래몰래 나가고 있었던 걸 들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별거 중인 시어머니가 걱정을 하실까 봐, 전날 본가 함씨에게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넣어 집안 상황을 보고해 달란 이야기를 한 걸 시아버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모든 걸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해 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장은 두 분의 감정이 서로 격해져 별거 중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본가로 들어가셔야 하지 않겠냐고, 잠시 별거 중이실 동안이라도 자신이 대신 본가의 일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함씨에게 부탁을 해 그렇게 한 것뿐인데, 그게 시아버지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큰 오해를 살 만한 일인지 몰랐다면서.
지금까지 시어머니 앞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가 있었다.
역시나 시어머니는 원수경이 한 부족한 처세에 한숨만 쉬는 게 전부일 뿐, 자신을 위해 했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꼬집어 내지는 않았다.
원수경은 조금 전 시어머니와 통화를 했던 스마트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재생시켜 놓고, 그걸 가볍게 침대 위로 툭 하고 던졌다.
방 안으로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번지고 있었다.
안방 옆에 따로 붙어 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원수경.
그녀는 붙박이 수납장을 열어 작은 슈트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열어 바닥에 펼쳐 놓고 자신의 옷 몇 가지를 반듯하게 접어 넣기 시작했다.
* * *
남편이 집에 들어온 건, 시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40분 정도가 더 지났을 때였다.
원수경은 슈트 케이스 안으로 언제든 집을 나갈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아들 승현이와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한껏 무거운 얼굴로 집 안에 들어온 남편.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는 주인 부부의 눈치를 살피다,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
원수경 역시 무거운 얼굴로 큰 숨을 들이마신 후, 안고 있는 승현이에게는 따듯한 미소를 만들어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간 정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원수경은 거실 소파에서 승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드레스 룸에서 발견한 슈트 케이스를 끌며 거실로 나온 정태가 그걸 아무렇게나 거실 한 곳에 세워 놓고 원수경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들어온 거지?”
“……?”
정태는 아내가 보여 주고 있는 감정 없는 모습에 속으로 당황을 했다.
자신이 그냥 이해를 해 주고 넘어가야겠단 생각으로 집에 왔다.
승현이를 봐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조용히 묻자는 다짐을 하며 돌아온 집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태도는 정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옷 갈아입은 거 보니까 오늘은 집에서 잘 모양인가 봐?”
“왜 말 안 했어? 여자들 클럽 모임 그거 어머니가 시키셔서….”
“기다리고 있었어. 승현이 때문에.”
원수경은 승현이를 소파 한쪽에 앉혀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뒤로 모두 쓸어 놓고 차갑게 정태에게 말했다.
“이젠 내가 나갈 테니까, 지금부터 승현이는 당신이 봐.”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왜 다 들어 놓고 못 들은 척이야?”
“내가 지금 묻잖아,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 말투. 정말 미치도록 거슬린다.”
“뭐?”
“내가 만만하니? 내가 당신 회사 부하 직원이야?”
“…….”
“내가 진짜 어이가 없다. 잘 들어. 당신, 그리고 당신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몰라도 내가 당신, 그리고 당신 가족들한테 이런 취급이나 받겠다고 당신이랑 결혼한 게 아니야. 당신 집안 없이도 나 어디 가서 무시당하며 살아 본 경험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하고 싶은 거 딴 사람 눈치 봐 가며 해야 할 이유 없었고, 하기 싫은 일 딴 사람 눈치 때문에 억지로 할 이유도 없었다고. 그런데 당신이 뭔데, 당신 집안이 도대체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니?”
엄마와 아빠 사이에 만들어진 이상한 기류에 승현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렸고, 원수경은 큰소리로 승현이의 보모를 찾았다.
급하게 거실로 뛰어나온 보모에게 승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 말한 뒤, 원수경은 다시 남편을 상대로 얼음보다 더 차가워진 모습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승현이 때문에 안 나가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엄마, 아빠 중 하나라도 집에 있어야지, 어떻게 아줌마들 손에 승현이를 맡겨? 그렇다고 아버님, 어머님한테 당신 집에 안 들어오고 있는데 나도 더는 당신이랑 같이 못 살겠다, 재경 며느리 못 해 먹겠다 하면서 승현이 맡기고 갈 순 없는 거니까.”
“뭐 하냐, 지금?”
“너는 뭐 했니, 지금까지?”
“…….”
“너는 지난 며칠 네 맘대로 집에도 안 들어오고 바깥에서 뭐 했니? 왜? 나도 네가 한 의심처럼 네가 바깥에서 어린애들 덮고 잤다는 저질 오해라도 해 줘야 하는 거니?”
“…….”
“내가 더는 너랑 못 살겠어. 더는 재경, 이 집안 며느리로 살 자신도, 살 이유도 없어.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해? 뭘 위해서? 누굴 위해서? 승현이 때문에? 애는 엄마 혼자서만 키우니? 말로만 하지, 당신이 그동안 승현이 키우는 데 한 게 뭐가 있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말로만 세상 위대한 아빠지? 쪽팔린 줄 알아. 뭘 그렇게 네가 나한테 해 줬는데?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나고 대단한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나는 네가 시키는 것만 해야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한눈도 팔면 안 되는데? 당신, 그리고 당신 가족들. 하는 거 보면 정말 웃겨.”
“그만해라.”
“안 그래도 그만할 거야. 끝내기 전에 주제 파악 좀 하라고 한 말이고. 나도 당한 게 있는데, 이 정도는 되돌려 주고 끝을 내더라도 끝을 내야 하지 않겠어? 당신이 하고 싶은 것만 다 하고 살 거면, 그냥 이 집 도우미를 한 명 더 써. 날 이 집 도우미로 만들 생각 하지 말고. 미친. 재경? 그게 뭐? 같잖지도 않아. 내가 그 이름 때문에 내 인생 모두를 당신 집에 다 갈아 넣어야 하는 거니? 그런 취급이나 받으면서? 노 땡큐.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그렇게 사는 건 나도 싫지만, 우리 엄마, 아빠도 못 참으실 거거든. 승현이 잘 키워. 자신 없음 내가 데려가고.”
“…….”
“걱정하지 마. 당신 상대로 위자료 운운할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필요하면 말해. 그깟 위자료? 줘도 내가 줘.”
원수경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 조금 전 보모가 승현이를 안고 사라진 구석 방으로 걸어갔다.
좁은 보모 방에서 놀란 눈으로 엄마 눈치를 보는 승현이를 보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원수경도 마음이 가렵고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연기를 펼쳤다.
“앞으로 승현이 좀 잘 부탁해요.”
“사모님….”
“너무 오냐오냐하지만 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확실하게 주의도 줘 가면서. 찬 거 너무 많이 먹이지 말고.”
승현이를 들어 안은 후 원수경은 아이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 잠깐 외할머니 집에 가 있을 테니까, 그동안 승현이 이모 말 잘 듣고 그렇고 있어.”
아이를 다시 보모 품에 넘긴 원수경은 거실로 나왔다.
정태는 원수경이 보모 방을 들어가기 전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원수경은 그런 정태는 못 본 척 안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 했다.
정태의 손이 원수경의 팔목을 잡았다.
“뭐 하려고 그래?”
“이거 놓지?”
“이야기 좀 해.”
“이런 새끼였네, 손정태.”
“뭐?”
“그래. 당연한 거지. 그 당연한 걸 내가 등신이라 그간 모르고 살아왔던 거고. 내가 이야기하자고 할 땐 들은 체도 안 하고, 다른 사람 다 보는 앞에서 내 차 블랙박스 뜯고 내비 기록 확인까지 하게 만들어 사람 우습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 이야기를 하자? 이제 와 무슨 이야기를 해? 너에 대한 기대가 다 사라져 버린 이 마당에.”
“그러게 왜 진작에 어머니가 시키신 일이었다 말을….”
“사과를 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남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원수경이 악을 질렀다.
지난 몇 년간 같이 살며 아내의 이런 악이 받친 모습을 처음 본 정태는 크게 당황을 했고, 그런 남편을 상대로 원수경은 쉬지 않게 계속 악을 퍼부었다.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했다. 내가 널 못 믿고, 의심해서 미안하다… 그렇게 사과를 해!”
“…….”
“그리고 사과를 하시라고 해, 당신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함부로 사람 의심하고, 날 객이라고 말한 당신 아버지! 그리고 하기 싫다는 거 억지로 하게 만들어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당신 어머니! 당장 내 앞에 찾아와 고개 숙이고 미안하다, 잘못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는 너희 부부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 그렇게 사과를 하시라고 해!”
씩씩거리며 잠시 말을 끊은 원수경은 날카로운 눈으로 남편을 쏘아보다 차갑게 한마디를 남기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못 할 거 같음 잡지를 마. 착한 아들, 좋은 형? 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 나는 그런 당신 곁에서 당신 입맛대로 살아 줄 수 없는 사람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