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303)

가만히 있어

정태는 슈트 케이스 손잡이를 잡으려는 원수경의 손을 막아 세웠다.

그런 남편을 차갑게 쳐다보며 원수경이 말했다.

“왜? 나가라고 친절하게 가지고 나온 거 아니었어?”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아줌마들 듣는다.”

“뭐가 문제야? 아버님 집에 오셔서 그 난리가 났는데. 그리고 며칠이나 나 몰라라 집에 안 들어온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

결국 정태의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나왔다.

“미안해.”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며, 더는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정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해해서 미안해. 그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화 풀어.”

“그 말투. 내가 거슬린다고 했지? 나 당신 부하 직원 아냐. 당신한테 월급 받으면서 승현이 낳아 키우고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사과 다시 해.”

“너까지 나한테 왜 그러냐, 진짜.”

“그럼 난? 난 어쩌라고? 내가 이 집에서 당신한테 말고 누구한테 또 그래? 그날 아버님이 나한테 말씀하시는 거 못 들었어? 필요한 게 있음 말씀을 하신대. 그럼 난 그때 가서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거고.”

“…….”

“자식과 며느리는 다른 거라잖아. 누가 그걸 몰라? 누가 딸처럼 대해 달라고 했냐고. 뭐? 날 당신 친딸처럼 생각을 했다면 아웃이었다고? 허. 난 항상 조건부 아웃인 사람이네, 이 집에서. 안 그래? 당신도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지 않아?”

아내의 두 눈에 물기가 맺히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정태였다.

“내가 왜 아웃을 당해, 이 집안 상대로. 그냥 내가 그만둬. 내가 내 발로 나갈 거라고. 내가 미쳤니? 당신, 그리고 당신 집안이 도대체 뭐가 얼마나 잘났고 대단하다고. 내가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우리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 나도 당신 못지않게 우리 엄마, 아빠한텐 귀한 딸이야. 그렇게 귀하게 키워 주셨는데,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한마디도 못하고 참고만 있어야 하는 내가 한심하고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 죽을 거 같다고.”

“…….”

“어떻게 그런 말을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하실 수가 있어? 참 잘났다, 재경. 그걸 그렇게 사람 앞에 세워 두고 하시는 아버님이나, 내가 그런 소릴 듣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당신이나. 근데 뭐? 어떻게 나까지 당신한테 그러냐고? 내가 당신한테 따져야 하는 소리 아냐?”

조금은 풀어진 아내의 모습에 정태는 용기를 냈다.

원수경의 팔목을 다시금 가로채서 슈트 케이스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놔!”

원수경은 안방까지 다 끌려와서는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그런 원수경에게 정태가 속에 있는 말을 힘겹게 꺼냈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진심이었다.

최근 정태는 회사 일뿐 아니라, 집안일까지 뭐 하나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는 모든 상황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이건 이래서 안 되는 거라고 하고, 저건 아버지가 결정하신 일이라 또 그렇게 해야 되고….”

의도를 한 건 아니었지만, 정태는 아내와 이야기 도중 갑자기 정훈이에게 항공 지분을 주겠다는 뜻을 확고히 한 아버지의 선택에 섭섭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당신 말고 더 있어?”

그제야 원수경은 화난 얼굴을 잠시 풀며 가엽게 자신의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이라도 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길 바라는 게, 그게 그렇게 지나친 욕심이야?”

“누가 그게 욕심이래? 누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냐고.”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남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원수경이었기에, 남편이 이렇게 작아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자신에게 들킬 땐, 자신이 어떻게 안아 줘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 옆에서는 힘이 들어서 도저히 더는 못 할 거 같아서 그래.”

아내의 말에 정태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당신 자존심, 또 당신이 당신 가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니까 이래. 당신이 바뀌지 않으면 내가 숨을 못 쉴 거 같거든.”

“뭐가.”

“이럴 거면 그냥 포기하자, 여보. 아니지. 당신이 결정을 해야 하는 거니까 그냥 포기해.”

“그러니까 뭘.”

“후계고 뭐고, 그냥 다 포기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당신 가족들, 또 당신이 만든 우리 가족 챙기면서 뒤에서 정훈이 서포팅만 해. 그래도 되잖아.”

남편의 표정 변화에 집중을 하며 원수경이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그러겠다고 하면 나는 거기에 맞춰서 당신 서포팅을 할 거야. 도대체 이게 뭐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나는 뭐 그 모임이 재밌고 좋아서 계속 쫓아다니는 줄 알아? 불공평하잖아, 경쟁 자체가. 우리 집이 미래금융이냐고. 내가 뭐 하나 하늘이 걔나 걔 집안에서 정훈이 지원해 주는 거랑 비교해서 비슷하게라도 흉내를 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내가 그 기울어져 있는 경쟁을 당신 혼자 아둥바둥하며 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 거냐고.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어머님이 하도 한번 가 보라고 하신 것도 있고, 나라도 그런 모임에서 당신한테 도움이 될만한 인맥을 만들어 낼 수 있음, 최소한 미래금융이 정훈이 쪽으로 해 주고 있는 지원을 흉내 정도는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두 눈을 감은 채 답답한 한숨을 내뿜고 있는 정태를 쳐다보며 원수경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힘든 게 다 나 때문인 거 같으니까. 우리 집 배경이 하늘이 걔 배경에 비해 너무 약한 거 같고, 그래서 당신이 요즘 계속해서 정훈이한테 밀리고 있는 거 같으니까. 당신이 어떻게 정훈이한테 실력으로 밀릴 수 있냐고. 말이 안 되잖아.”

정태는 자신이 간지러워하고 있는 부분을 계속해서 긁어 주고 있는 원수경의 말에 조금씩 오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후계 구도를 아버님은 자꾸 몰아가고 계셔. 여기에서 내가 당신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어머님이랑 별거하시면서 이젠 집에 혼자 계시니까. 아줌마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느냐마는, 그래도 누구 하나 신경을 쓰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랑 아예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신경을 끄는 건 천지 차이이니까. 아버님 혼자 지내시는데, 내가 그 정도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잘못이냐고. 근데 어떻게 나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 뭐? 객이라고? 내가 한 게 감시라고? 내가 아버님 감시를 왜 하냐고, 왜. 그러면서 나한테 사람을 붙이신 거야? 허, 허허…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계속 당신하고 살아야 해?”

결국 정태는 결심을 했다.

후계자 경쟁을 가능한 한 빨리 끝을 내야겠다고.

주위에서 뭐라고 하건, 현재 정훈이에 대한 그룹 내 평가가 어떻건 정태는 자신이 후계자 경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정태 기준에서 이기고 지고의 내용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이 앞으로의 재경을 이끈다고만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전까지는 후계자 경쟁이라는 말 자체가 안 나왔던 재경 그룹 안에서 정훈이가 눈에 띄는 활약을 여러 번 만들어 내는 게 기특하고 보기가 좋았을 뿐.

거기에 정훈이의 처가로 미래금융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래금융을 통한 자금 확보, 융통이 수월해진 것에만 긍정적 의의를 두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과 후계 문제로 경쟁을 한다?

어쩌면 정태는 그 자체를 그동안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 모든 게 다 완벽할 순 없어.”

뜻 모를 말을 내뱉은 후 정태는 굳은 결심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홀로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내가 미련했네. 세상에 없으니 동화라는 건데, 그런 동화 같은 상황을 만들어 보겠다고, 중간에 낀 당신만 힘들게 만들었네.”

정태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무는 모습까지 아내, 원수경에게 보여 줬다.

“지금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따로 사시는 상황도 그렇고, 그간 당신이 불편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 결국 지금 아버지가 만들고 계신 후계 구도만 다시 예전처럼 확실해지면 다 해결이 날 일인 거 같네.”

정태의 손이 원수경이 입고 있는 블라우스 상단 단추 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하는 남편의 손을 빠르게 낚아챈 원수경.

하지만 정태는 곧바로 그 아래 단추를 풀어 나갔다.

“가만히 있어.”

“하지 마.”

“가만히 있으라고, 좀.”

“밖에 아줌마들 나와 있을 수도 있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원수경은 남편이 내민 화해의 손길을 강하게 뿌리치지는 않았다.

* * *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 밀라노.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 ‘고비드’의 본사 마케팅 디렉터(MD―전무) 사무실 안이었다.

고비드 아이스크림 창립자의 손자이자, 고비드를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키워 낸 현 회장의 장남인 그곳 MD는 이번에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한국의 재경식품 상무 손정훈을 직접 상대하고 있었다.

재경항공이라는 세계적인 항공사를 지주사로 가지고 있는 재경 그룹.

그 그룹의 차남이 직접 방문을 하는 거라, 많은 신경을 쓰고 기다렸는데 막상 수행원 한 명만 동행을 해서 본사를 방문한 손정훈의 행보에 고비드 측 MD는 적잖게 당황을 하고 있었다.

이미 라이선스 계약이 끝난 상황에서 이런 해외 방문 출장에 그룹가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인 것이었지만, 재경 그룹 산하의 지사가 없는 이탈리아에 수행원을 고작 한 명만 데리고 단출하게 움직이는 경우 역시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의 대기업 재경을 통해 그간 해 오던 국가별 라이선스 계약 방식을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 계약으로 바꾸긴 했지만, 그 전까지 고비드는 일본과 대만, 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가로 브랜드 수출을 해 오며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 놓는 데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 오고 있었다.

물론 워낙에 막강한 브랜드들이 일본 시장을 기점으로 중국 시장까지 빠르게 들어가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을 장악을 해 버린 탓에 후발 주자가 되어 있었지만, 고비드는 후발 주자라는 이미지 대신 명품 아이스크림 이미지 전략을 앞세워 대중화된 고급 아이스크림 브랜드들이 차마 침투하지 못하고 있는 최상급 호텔 레스토랑 안의 디저트 메뉴 등으로 브랜드 포지셔닝을 잡아 내는 데 성공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비드에게도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아직 잡지를 못했기에 더 큰 미련이 남는 시장이었다.

그게 바로 고비드 측이 국가별 라이선스 계약 방식을 재경식품을 통해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 계약으로 바꿔 보는 도박을 강행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투자 대비 선방을 하고 있다고 하긴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고비드 아이스크림은 하겐다즈, 나뚜루, 배스킨라빈스 등에 밀려 아이스크림 시장 점유율 1퍼센트대의 저조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고, 그나마 아시아권에선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 중인 일본에서조차 일본 자체 수제 아이스크림 브랜드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시장 점유율 3퍼센트대를 유지 중이다.

그마저도 그간 일본에서 고비드 아이스크림의 라이선스 영업을 해 왔던 기업이 유럽 호텔 쪽으로 영업을 잘 뛰어서 그만한 성적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비드의 차세대 경영자.

현 MD는 여러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재경 그룹의 차남 손정훈과 마주 보고 앉았다.

“콜라보 조항에 대한 계약 조건을 변경할 수 있냐고 물으셨다지요?”

손정훈 재경식품 상무 옆으로는 그의 수행 비서 강인성 차장이 든든하게 지키고 앉아 있었다.

손정훈 상무가 상대의 물음에 대답했다.

“엄밀히 말해서 계약 조건을 변경하자는 게 아니라, 없던 계약 조건을 추가해서 명시를 해 놓자는 겁니다. 콜라보에 관한 계약 조항은 추후 협의 후 진행한다는 내용이 전부였잖아요.”

“우선 그 전에 어떤 콜라보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어 봤으면 좋겠는데요?”

손정훈 상무는 옆에서 강인성 차장이 준비해 온 미팅 자료를 패드에 띄우려고 하는 걸 잠시 멈추게 만들어 놓고 고비드 측 대표로 자신들을 맞이한 MD에게 물었다.

그런 손정훈 상무의 얼굴엔 강한 자신감과 여유가 한껏 묻어 있었다.

“고비드가 일본의 하지케루, 대만의 도몬도 상사, 싱가포르의 엠엔에프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저희 재경식품 쪽으로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를 맡길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럼요. 그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라이선스 계약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다 주고받은 내용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고비드 역시 돌고 돌아 최종 목적지는 중국 시장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린 시장이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찬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걸로 아는데,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아이스크림 시장 열기가 심상치가 않아요.”

“작년까지 매년 10퍼센트대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하면서 연간 성장이 가장 빠른 소비재 품목 중 하나로 떠올랐죠.”

“주류 회사 마오타이까지 자체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론칭해서 작은 컵 한 통에 60위안, 70위안, 하겐다즈보다 40퍼센트 이상 높은 가격에 판매를 하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강한 로컬 기업들이 주력 산업도 아닌데 자체 아이스크림 브랜드들을 앞다투어 론칭을 하고, 그렇게 론칭된 브랜드들이 빠른 속도로 해외 고급 아이스크림 브랜드들을 밀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죠.”

“고비드. 갖춰져 있는 고급 브랜드 이미지는 손댈 것 없이 훌륭하고, 안정적이지만 그런 브랜드 이미지만 가지고 배타적인 중국 시장에 들어가 이미 하겐다즈, 나뚜루가 단물을 다 빼먹고 후퇴를 하고 있는 데서 뭔가를 해 보기란 결코 쉽지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중국 시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를 가져가신 거 아닙니까?”

왜 이제 와 엉뚱한 소리냐는 듯, 고비드 측 MD는 웃는 얼굴과는 상반되는 날카로운 지적을 날렸고, 그에 손정훈 상무 역시 함께 싱긋이 웃어 보이며 회의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다리를 꼬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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