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사도 그러하십니까?
“저희가 중국 시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고요?”
상대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해서 그걸 질문으로 바꿔 버리는 손정훈 상무의 노련함에 강인성 차장은 속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저게 가능한 일인 것일까?
고작 서른.
아무리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주어진 기회와 힘, 권한과 자격이 태생부터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강인성 차장은 이런 손정훈 상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과연 저런 과감함과 노련함이 저 나이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부드러운 듯, 상대의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해 짓고 있는 손정훈 상무의 미소 앞에 고비드 측 MD가 움찔거리는 모습은 최소한 강인성 차장의 기준에선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2년.
모직에서부터 지금까지, 손정훈 상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 온 지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강인성 차장은 여전히 손정훈 상무로 인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전혀 새로운 행보를 걷고, 이제 좀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으면 그 이해를 두 배, 세 배 훌쩍 뛰어넘는 깊은 식견과 저 세상 통찰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비드.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
손정훈 상무가 식품으로 옮기면서 가장 먼저 진행을 한 내용이 쁘띠 기뿔리부터 시작해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와 더불어 고비드 아이스크림의 국내 론칭이었던 만큼, 강인성 차장이 한 고비드에 대한 공부는 어지간한 업계 관계자들의 공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연히 기업의 규모만 놓고 본다면 재경 그룹 전체의 규모가 고비드 회사의 최소 다섯 배, 여섯 배 이상은 될 것이다.
더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부분을 따로 두고 이 자리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손정훈 상무와 고비드 측 MD만 놓고 본다면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야 정상일 것이다.
아무리 대기업 전략기획팀 소속이라도, 고비드의 차세대 경영인으로 이미 모든 사람에게 소개가 되어 있는 상대는 강인성 차장이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손정훈 상무의 의전이라는 명분과는 별개로, 일반 사원 출신으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기회가 분명하다.
하지만 강인성 차장은 손정훈 상무가 리드하기 시작하는 미팅 분위기로 인해, 고비드의 차세대 경영인으로 확정된 상대가 작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손정훈 상무의 가벼운 지적에 곧장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하는 상대의 태도를 보며, 이미 이 미팅도 무조건 손정훈 상무가 원하는 결과로 가는 기본 단계일 뿐이겠단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한 해석이 말로 바로 나와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제 실수였어요. 하지만 계약 조율 과정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중국 시장 개척에 관한 내용이었던 건 사실이죠.”
자신이 한 말실수를 빠르게 인정하며, 하지만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푸시는 유지하고 있는 상대.
그런 상대를 마치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손정훈 상무는 아주 편하게 어린아이 다루듯 상대를 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고비드 측에서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 환상, 그리고 걱정을 너무 많이 저희 쪽으로 보여 주셨으니까요. 지금 이 자리도 그렇습니다. 미팅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제 입에서 먼저 중국 시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끔 유도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상대는 손정훈 상무가 갑자기 틀어잡아 버린 대화의 주도권에 더는 주도권 싸움을 할 자신이 없다는 듯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대표자 사이에 흘렀던 미묘한 긴장감이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 한순간 손정훈 상무 쪽으로 급하게 기우는 걸 확인하며 강인성 차장은 이유 없이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싸우러 온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컨트롤이 불가능했던 상대.
업계 실력자라고 손꼽히는 모범태 전무마저도 론칭에 필요한 요청을 넣을 때마다 답장이 깜깜무소식인 고비드 측의 사업 방식에 혀를 내둘렀고, 급기야 손정훈 상무가 직접 나선 것이다.
그것도 강인성 차장만 동행을 시켜서.
“국제 정세가 많이 불안하고, 더불어 중국을 상대로 브랜드 수출에 관해 많은 위험 부담이 생겨 있는 상태에서 재경식품 쪽에서 보내온 아시아 전역에 관한 라이선스 계약 러브 콜은 분명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재경식품 역시 중국 시장은 반드시 정복을 하고 가야 하는 시장이란 생각을 저희 쪽으로 전달한 것으로 아는데요?”
“이런 이유로 제가 직접 귀사의 본사를 찾아온 겁니다.”
“…….”
“계약 조율 당시 실무자들끼리 오고 간 이야기, 거기에 양쪽에서 가지게 되는 기대치의 오차. 때론 그 작은 오차와 뉘앙스의 차이가 실무자들이 아닌 결정권자들의 입장에선 큰 오해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만약 촬영이 가능하다면, 지금 이 미팅을 영상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네 본사에 수행 비서만 동행을 시켜 등장한 손정훈이라는 젊은 남자 하나로 인해, 사십 대 중반의 고비드 황태자가 쩔쩔매는 모습.
강인성 차장은 신기함을 넘어 이젠 자신이 손정훈이라는 인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역할 중이라는 사실에 뿌듯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우선 불신이 생기기 전 하고 계신 오해부터 바로잡아 드려야겠습니다. 저희 재경식품은 중국 시장에 대해 반드시 정복을 하고 가야 하는 시장이란 표현을 쓴 적이 단연코 없습니다.”
“…….”
“자연스럽게 정복이 될 수밖에 없는 시장이라는 말은 제가 직접 한 기억이 있긴 하네요.”
“정복이 될 수밖에 없는 시장…이라고요?”
상대에 대한 존중과는 다른 의미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렇게 당신을 마주 보고 앉아서까지, 그간 그쪽 실무자들을 통해 했던 말을 다시 또 반복해야 하는 이 상황은 무척이나 피곤하고 귀한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이라 마음에 안 든다는 내색을 숨김없이 하고 있는 손정훈 상무였다.
그리고 그런 손정훈 상무의 표정 하나하나에 상대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한국 속담에 ‘손 안 대고 코 풀려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을 안 대고 코를 풀어요?”
아주 흥미롭다는 듯, 상대가 과장되게 손정훈 상무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멋진 말이지요. 힘 안 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해결한다는 뜻이니. 그런데 한국에선 그 속담을 아주 높은 확률로 자신의 실속만 챙기려고 하는 상대에게 비아냥거리듯 사용을 하기도 합니다.”
“혹시… 저희 고비드가 재경식품을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중국 시장 진출에 관해서만큼은요.”
상대의 대답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대를 바라보며 강인성 차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상대를 가리지 않네.’
아무리 거스를 게 없는 재경 그룹의 차남이라지만, 재경의 홈그라운드도 아닌 남의 집 안방까지 쳐들어와 이렇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강인성 차장은 손정훈 상무의 입장이 공격적으로 바뀌면 바뀔수록 걱정보다는 오히려 상대가 어떠한 대응을 할지가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묻겠습니다. 일본의 하지케루, 대만의 도몬도 상사, 싱가포르의 엠엔에프. 기존에 하고 있던 그들과의 계약을 종료시키고 저희 재경식품 쪽으로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를 맡기신 이유가 결국은 중국 시장 진출 때문인 겁니까?”
“그 이유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저희는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해 고비드 측만큼 절실하고 큰 도전이란 생각 자체를 아예 안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성공적인 진출을 해낸다면, 5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라이선스 계약이 연장이 되는 겁니까, 아님 상황에 따라 변동이 생길 수도 있는 겁니까?”
테이블 위를 왔다 갔다 하는 탁구공처럼, 강인성 차장의 눈알이 손정훈 상무와 고비드 MD를 향해 쉬지 않고 옮겨 다니고 있었다.
“사업이라는 건 항상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5년 계약을 했습니다. 저희 고비드에선 지금껏 없었던 최장기 라이선스 계약을 재경식품과 한 것이죠. 그만큼 저희 쪽에서도 어려운 결정을 한 거죠. 그리고 앞으로 5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았고, 아직 실물로 나온 결과물이 없는 상태에서 벌써부터 재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성급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그 5년 동안 고비드는 저희 재경 쪽으로, 재경식품이 고비드의 브랜드를 더 많이 알리고 가맹점수를 늘려 나가는 데에 어떠한 지원을 해 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
“재경의 브랜드가 아닙니다. 재경은 그저 5년간 귀사의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게 다일 뿐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고비드 측 MD의 표정은 수차례나 빠르게 변했다.
강인성 차장은 손정훈 상무가 추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손정훈 상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우린 우리 브랜드도 아닌데, 고비드라는 브랜드에 이렇게까지 진심이고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은 이런 파트너를 만나게 되면 그 진심과 열정에 고마움을 느끼고, 함께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보기 위해 애를 써야 하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 최선이요? 그럼 저희가 이상한 거네요. 상대가 하고 있는 최선에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오해를….”
“귀사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잠시 손을 잡는 파트너쯤으로 저희 재경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조금 전 한국 속담 하나를 알려 드렸던 겁니다.”
상대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허를 찔린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공식 미팅 자리에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인 표현을 받았으니 손정훈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대의 입장에선 충분히 크게 흔들릴 만했다.
손정훈 상무의 공격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잘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 브랜드의 가치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직 해당 브랜드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신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였던 당황이 민망했던 걸까, 상대도 상기된 얼굴빛으로 손정훈 상무의 생각을 반박하려 시도했다.
“거기에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포함을 시키셔야죠.”
“너무나 당연한 내용인데, 그런 내용까지 굳이 포함을 시켜야 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비즈니스 아니었습니까?”
“…….”
“그동안 함께해 온 기존 업체들과의 계약을 종료하고 재경식품에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를 맡긴다는 결정을 하기까지 당연히 고비드 측에서도 많은 고민과 계산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 많은 고민과 계산의 결론이 바로 저희 재경식품이었지 않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진땀을 빼는 상대의 모습에 손정훈 상무는 완전히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나갔고, 그가 질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시각 앞에 강인성 차장은 다시 한번 손정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새로 묻겠습니다. 일본의 하지케루, 대만의 도몬도 상사, 싱가포르의 엠엔에프. 그들과의 계약을 종료시키고 저희 재경식품에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를 맡기신 이유가 오로지 중국 시장 진출 때문이었던 겁니까?”
상대는 그 물음에 꽤 오랫동안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고비드는 계약서상에 분명히 자율성에 맡기겠다고 명시가 되어 있는 마케팅 내용에 계속 중국 시장 진출 시도에 관한 내용을 강제하듯 추가로 끼워 넣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다시 또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던 상대는, 결국 어색한 미소를 띠며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애를 썼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 담당 OM(오퍼레이션 매니저―운영 본부장)을 푸시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 쪽 OM이 재경식품에서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푸시를 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하고 있었습니다.”
“불쾌함이 아닙니다. 답답함이지.”
“답답함…이요?”
“저희 재경은 저희를 불쾌하게 만드는 상대와는 억지로 함께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 꾸준히 성공을 시도하는 거죠.”
“……?”
“성공이라는 게 뭐 별거 있습니까? 결국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않아도, 만나거나 마주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상태를 성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이어지는 손정훈 상무의 자신감에 상대의 자세는 강제적으로 공손하게 바뀌었다.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경은 성공한 기업입니다. 최소한 제 기준에선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 재경은 저희 힘으로 거머쥔 성공이기에 그 성공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귀사는 어떻습니까? 귀사도 그러하십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