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급이라는 게 있습니다
“본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미리 잡혀 있는 점심 약속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취소를 시키시는 건….”
고비드 본사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마침내 강인성 차장까지 일방적인 손정훈 상무의 행동에 아슬아슬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충분히 대화로 풀어 나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겠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손정훈 상무는 아까 그 미팅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흥분을 했고, 또 미리 잡혀 있는 점심 약속까지 일방적으로 취소를 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점심을 함께해야 그다음 약속 일정을 서로 맞춰 볼 것 아닌가.
이번 미팅에 필요한 증거 내용들을 손정훈 상무의 지시로 직접 서류로 다 정리를 한 강인성 차장이었다.
조금 전 그 미팅 자리에서는 재경식품이 고비드 본사를 직접 방문한 목적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중국 시장 진출에 관련된 내용.
그건 그저 서로 간의 생각의 차이일 뿐, 그게 이번 방문의 메인 목적이 아니었다.
고비드라는 기본 베이스를 이용해 삐에르 에슈메 레시피로 콜라보를 제안한 지 벌써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부분에 있어 고비드 측은 아직 그렇다 할 정확한 입장을 보여 주지 않고 있었고, 그에 재경식품은 고비드 측의 비즈니스 스타일에 지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양사 간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결정권자가 아닌 실무자들끼리 먼저 조율을 하고 해당 조율 내용을 양쪽 결정권자들의 확인을 받아야만 하는 다소 비생산적인 방식을 재경의 스타일로 바꿔 보기 위한 자리.
하지만 손정훈 상무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시작부터 상대를 강하게 몰아세웠고, 결국 미팅 30분 만에 미리 잡혀 있던 점심 약속까지 일방적으로 취소를 시키고 MD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무례죠.”
마치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 손정훈 상무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웃었다.
조금 전 미팅 자리에서 보였던 날카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모습으로 손정훈 상무를 쳐다보며 강인성 차장이 말했다.
“강공을 펼치시는 이유는 알겠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스탠스를 보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사이 벌써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문을 먼저 빠져나오며 손정훈 상무가 말했다.
“강공이요? 저는 지금 번트를 댄 건데요?”
“번트요?”
“허를 찌른 거니까 스퀴즈 번트쯤으로 해 두죠.”
강인성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손정훈 상무는 먼저 몇 발이나 더 앞서 걸어갔다.
얼른 그 걸음 속도에 맞혀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다시 강인성 차장이 물었다.
“번트를 댄 거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번트를 왜 댑니까?”
번트를 왜 대냐니.
댄 놈이 알지, 보는 놈이 어떻게 알아?
혹시 불펜 쪽에서 미리 번트를 대라는 사인이 있었나?
아니다.
그럴 순 없다.
재경식품에서 어느 누가 손정훈 상무를 상대로 지시라는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도대체 왜?
혹시…?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인성 차장이 물었다.
“그럼 내일 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정해진 일정이 있었나요?”
있으면 물어봤겠나.
없다.
있어야 정상인데, 없는 게 되어 버렸다.
당연히 오늘 식사 자리에서 다음 날 일정을 고비드 측과 함께 조율을 할 예정이었다.
고비드 측에서도 그런 제안을 했었고, 이건 방문자를 맞이하는 쪽에서 마땅히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니까.
강인성 차장은 자신의 머리를 한없이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천하태평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손정훈 상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뭐 연락이 오겠죠.”
“안 오면요?”
“안 올 수도 있는 거고.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이렇게 합시다. 연락이 오면 고민을 해 보고, 안 오면 내일부터는 마음 편하게 밀라노 관광이나 하는 걸로….”
“본부장님….”
“급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중한 눈빛으로 돌변한 손정훈 상무.
그 눈빛 앞에 강인성 차장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급은 상대에게 맞추려고 하는 쪽이 항상 아래일 수밖에 없는 거죠.”
계속해서 모를 소리들만이 손정훈 상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간 우리 재경식품을 상대로 보인 입장만 봐도 고비드는 쁘띠 기뿔리나 삐에르 에슈메 측과는 달리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상대인 것이고요.”
“…….”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하면서 한번 끌려가 주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턴 그게 당연한 게 되는 거죠. 그게 당연한 게 되는 순간 결국은 되돌릴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손을 쓰는 게 사업이라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물건을 팔아서 돈만 만들어 내면 끝나는 장사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할 말은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강인성 차장에게 손정훈 상무가 따뜻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결국 관계라는 건 초장에 내가 원하는 상태로 유도해 내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계속 상대가 원하는 위치에만 있어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빌드 업이 없는 사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짝하고 마는 거죠. 그리고 못 느꼈어요, 조금 전 미팅에서?”
“뭘… 말씀이십니까?”
“나는 몇 마디 섞어만 봐도 바로 알겠던데?”
그러니까 뭐가?
강인성 차장은 설마 아까 그 미팅에서 자신이 뭔가 놓치고 지나간 내용이 있었는지, 함께 걸음을 옮기며 복기를 해 보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손정훈 상무에게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빼앗겨 안절부절못하던 MD의 난처한 표정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고비드는 콧대가 높은 전형적인 유럽 브랜드 기업이에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상대가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 주는 거하고, 자기들이 자기 잘난 걸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큰 차이죠.”
이 부분에선 강인성 차장도 할 말이 없었다.
손정훈 상무의 말이 백번 옳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상대를 인정을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단순 기업의 규모만 보아도 재경이 고비드에 비해 몇 배나 더 큰 일류 기업임에도 지금까지 고비드 측이 재경식품 쪽으로 보인 태도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크게 결여된 모습이었다.
“그 높은 콧대로 상대를 자기네 기준에서 상대하기 수월한 위치로 끌어내려 놓고 비즈니스를 펼치는 게 익숙한 기업이란 말이에요. 강 차장 말대로 당연한 걸 수도 있죠. 그리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 내는 데 성공을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고. 그렇다고 그걸 마냥 인정만 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린 또 우리가 원하는 관계라는 게 있고, 스타일이 있는데.”
“그럼 혹시….”
“강공을 펼칠 거였음 제가 왜 굳이 강 차장을 데리고 여기까지 직접 왔겠어요? 그냥 한국으로 불렀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고비드 하나 잃는다고 우리 재경식품 안 흔들립니다. 티도 안 나요. 아직 제대로 된 투자도 들어가지 않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흔들릴 거였음, 애초에 이런 프로젝트는 시작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안 그래요?”
“…네, 맞습니다.”
“이렇게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는 수고까지 감수해 가며, 먼저 제대로 된 소통을 해 보자고 기회를 주는데도, 그걸 끝까지 못 알아듣는 상대라면, 차라리 지금 이쯤에서 해당 프로젝트는 접는 게 맞는 거고요.”
“소통의 기회를 주신 거라고요? 방금 미팅에서 그렇게 일방적인 모습을 보여 주셔 놓고? 방금 상무님께서 이곳 MD를 상대로 보여 주신 모습은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자라는 식이었습니다.”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우린 다른 브랜드를 찾으면 됩니다. 5년간 라이선스에 관한 미니멈 개런티만 지불하면서. 하지만 고비드는 앞으로 5년간 아시아 전역이라는 큰 시장이 완벽하게 묶여 있게 되는 겁니다.”
강인성 차장은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자신이 아는 손정훈 상무의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손정훈 상무가 덧붙인 한마디로 강인성 차장은 그의 생각에 다시 한번 인정이라는 걸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치졸한 작전을 거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최소한 거만한 상대에게 우리가 상황에 따라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느낌적으로 미리 보여 주는 것과 아닌 것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요. 너희가 하는 건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걸 굳이 알려 줘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상대 같지 않던가요? 이렇게 알아 가는 거죠. 우리도. 그쪽도.”
* * *
긴 로비 복도를 걸어, 마침내 출구가 보이는 메인 로비로 들어섰을 때였다.
로비 데스크 쪽에서 한 이탈리안 남자가 손정훈 상무와 강인성 차장을 발견하고는 얼른 데스크 직원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다가왔다.
그는 호텔에서 손정훈 상무와 강인성 차장을 고비드 본사까지 차를 태워 데리고 온 인물이었다.
아직 아무런 호출도 받은 게 없는 듯, 그는 상냥하게 손정훈 상무 곁으로 다가와 벌써 미팅이 끝난 거냐고 물었다.
“네, 끝났어요.”
“지금 바로 식당으로 이동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이 직원은 한국에서 온 두 남자와 미스터 콘띠가 장소만 레스토랑으로 옮겨 사업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 남자에게 손정훈 상무는 매너 있는 미소로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장지갑을 꺼냈다.
아무도 예상을 못 했다.
그 장지갑에서 손정훈 상무가 10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낼 거라고는.
그리고 그 지폐를 마치 호텔 벨보이에게 자신의 짐을 대신 옮겨 줘 고맙다는 식으로 건네는 팁처럼 그곳 직원에게 건넬지를….
이건 아무리 그 상대가 손정훈 상무라도 강인성 차장의 눈에 지나친 무례였다.
하지만 강인성 차장이 현재 느끼고 있는 민망함과 아슬아슬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 상무는 고비드 측 직원에게 직접 10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넨 뒤 돌아갈 땐 우리끼리 알아서 갈 생각이니 우릴 위한 당신의 오늘 업무는 모두 끝이 난 거 같단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그것도 웃는 얼굴로.
같은 편이지만 당사자도 아닌, 자신들의 밀라노 일정에 도움을 줬던 그곳 직원을 상대로 손정훈 상무가 보인 노골적인 무시는 강인성 차장으로 하여금 큰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인성 차장은 조금 전 손정훈 상무가 보인 무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비드 본사를 나와 인도 쪽으로 먼저 나온 손정훈 상무는 이곳 밀라노 거리의 냄새를 만끽하듯 크게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묵직해 보이는 서류 가방을 들고 이제 막 인도 쪽으로 내려온 강인성 차장을 향해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얼굴로 장난을 치듯 물었다.
“천천히 좀 걷죠. 날씨도 좋고 바람까지 시원한데 굳이 차로 이동할 이유 있겠어요?”
강인성 차장은 어쩔 수 없이 손정훈 상무의 발길대로 밀라노 거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는 건 아무 문제 될 게 없었다.
습한 이탈리아의 여름 날씨에 더운 정장 차림, 구둣발로 걷는 것쯤?
얼마든지 샐러리맨의 로망이란 생각으로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정말 아무런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
억지로 입에 담기는 말들을 꾹꾹 아래로 눌러 가며 손정훈 상무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 걷는 것만이 지금 강인성 차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전이었다.
“어디 보자… 여기도 진짜 많이 변했네.”
“네?”
“아니, 아니. 혼잣말.”
꼭 이럴 때 보면 70이 훌쩍 넘은 영감 같다.
강인성 차장은 한 번씩 들키듯 자신에게 보여지는 손정훈 상무의 나이에 맞지 않은 말투며, 행동에 이젠 면역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많이 변하긴 뭐가 많이 변해?
도대체 뭐 얼마만에 다시 와 보는 곳이라고.
“그래도 확실히 건물들은 다 그대로야.”
자신의 손바닥 안을 살피듯 밀라노 시내를 둘러보는 손정훈 상무의 얼굴 표정은 마치 이곳과의 인연이 몇십 년은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강 차장님.”
“네, 본부장님.”
“점심에 파스타 어때요? 이탈리아에 왔으니 느낌 정도는 살려 봐야지.”
“파스타요? 잠시만요, 제가 어플로 괜찮은 식당이 근처에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점심은 고비드 측과 함께할 거란 생각에 아예 준비를 못 했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천지 사방에 널린 게 파스타 레스토랑인데, 뭘 굳이 찾고 그래.”
“그래도 이왕 먹는 거 괜찮은 집에서 먹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는 데가 몇 군데 있어요. 아직까지 영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할 것도 같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손정훈 상무가 뜬금없이 어느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강인성 차장에게 말했다.
“강 차장님. 저기 저 건물 보이죠?”
“어떤 건물이요?”
“저기 저거. 위에 첨탑 올라가 있는 거.”
“네. 보입니다.”
“혹시 원래 저 건물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요?”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오래된 건물.
밀라노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밀라노 건물일 뿐이었다.
“글쎄요. 저는 밀라노가 이번이 처음이라….”
해당 건물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는 식으로 몇 발 앞으로 나아가, 거의 차도 경계선까지 다가간 손정훈 상무는 천천히 두 손을 뒤로 모아 뒷짐은 쥔 채 말했다.
“저 건물이 원래 우리 재경모직의 첫 해외 지사였던 크리온테 지사 건물이에요.”
“저 건물이요?”
강인성 차장은 깜짝 놀랐다.
“네.”
“아….”
그러고 보니 강인성 차장의 눈에도 낯이 익었다.
재경모직에 입사를 해 전략기획팀으로 배정을 받고 재경모직의 모든 조직도를 익히는 과정에서 해당 건물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저기까지, 붙어 있는 건물들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어요. 이쪽 라인을 크리온테라고 부르거든.”
“아, 그럼 크리온테가 지역 이름이 아니라 건물 이름이었습니까?”
“정확하게는 거리 이름이죠. 그걸 재경모직 지사를 넣으면서 우리끼리 부르기 쉽게 크리온테 건물이라고 붙였던 거고. 저 근처에 맛집이 엄청 많아요.”
“그걸 본부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
“하긴. 재경 생활 시작하시기 전부터 가족분들과 자주 와 보셨겠죠.”
“크흠. 일단 뭐… 저쪽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