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감히 요청드립니다
아침 9시가 조금 넘어 객실 인터폰이 울렸다.
고비드 측에서 벌써 사람이 도착을 한 모양이다.
역시나 강인성 차장의 연락이었고, 고비드 측 직원이 본사 픽업을 위해 호텔 로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저는 준비 다 끝났어요. 신발만 신으면 돼. 천천히 준비하세요.
―저도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바로 본부장님 방으로 가겠습니다.
5분이나 흘렀을까.
나갈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소파에 앉아 폰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인성 차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시게요?”
셔츠에 재킷을 받쳐 입었던 어제와는 달리 가벼운 카라 면티를 선택한 나의 복장에 강인성 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보니까 그쪽도 편하게 입고 나오는 거 같아서요. 강 차장님도 타이는 푸시죠? 아니다. 그냥 가서 저처럼 카라 있는 셔츠 있으면 그걸로 갈아입고 오세요. 날도 더운데, 오늘까지 재킷을 챙기는 건 좀 오버 같기도 하네요.”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어제 고비드 본사를 방문했을때, 딱딱한 타이 차림을 하고 그 공간에 있는 건 나와 강인성 차장뿐이라는 사실에 괜히 멋쩍은 느낌이 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하잖아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방 가서 티만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흰색 카라 면티로 갈아입고 다시 내 방을 찾아온 강인성 차장과 함께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어제 나와 강인성 차장을 위해 운전을 했던 인물이 아닌, 처음 보는 남자가 안내 데스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차장이 은근슬쩍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 그에게 혹시 고비드 측 직원이냐고 물었고, 그는 곧바로 환하게 환대 미소를 지으며 나와 강 차장을 호텔 뒤편 주차장 쪽으로 안내를 하겠단 손짓을 했다.
전날과는 그 차이가 확연하게 다른 의전이었다.
고비드 본사에 도착을 하니 기다리고 있던 다른 안내 직원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강 차장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4층 ‘F’ 버튼을 눌러 놓고 어느 호텔에 머무느냐, 호텔 컨디션은 지내기에 괜찮았냐, 한국의 여름에 비해 이탈리아의 여름은 어떠한 거 같냐, 오늘 컨디션은 어떻냐 등 친근한 일상 대화를 시도했다.
어젠 이런 따뜻한 환대가 전혀 없었다.
물론 이런 환대를 바랐던 건 결코 아니다.
내용물이 중요하지, 그 포장지가 뭐에 중요할까.
오히려 다소 퍽퍽한 그들의 응대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네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어 흥미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시작해 미팅실 입구까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오는 그쪽 안내 직원의 노력에 적당한 대답을 형식상 건네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엔 이미 고비드 사의 회장인 마테 콘띠가 먼저 도착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손.”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터 콘띠.”
회의실 안으로는 마테 콘띠 말고도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마테 콘띠를 통해 그가 자신의 막냇동생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시에리 콘띠.
고비드사에서 세일즈 디렉터라는 직함으로 활동 중이며, 그 포지션 역시 내가 짐작건대, MD와 비슷한 전무급일 것으로 보였다.
우린 안내 직원이 오더를 기다리며 주위를 맴도는 동안 회의 테이블 근처에서 번갈아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했고, 마테 콘띠의 제안으로 두껍고 긴 회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나와 강 차장이 출입문을 등진 쪽으로 나란히 앉았고, 콘띠 형제가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강 차장은 기본적인 미팅 자료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대의 모습에 눈치껏 준비해 온 패드를 꺼내지 않고 패드가 든 서류 가방을 가만히 책상 밑으로 내려놓은 채 상대의 분위기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제 저희 쪽에서 의도치 않은 실수를 만들어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놀랐고, 그래서 난처하다는 듯 여러 감정이 섞인 표정을 지어 가며 마테 콘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탈리안답게 만들어 낼 수 있는 표정의 종류가 다양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해 주면 참 고맙겠던데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님 마음이 급한 건지 이탈리안 특유의 발음으로 빠르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 보니 그가 의도하고 있는 표현의 정중함마저 가려 가며 들어야 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어제의 일에 대해선 틀림없는 커뮤니케이션상의 오해였을 거라는 입장, 그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하게 만든 부분에 대해 대신 사과를 하겠다는 말들이었다.
그에 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나의 입장을 영어로 풀어 나갔다.
“상대에 대한 과한 기대는 때론 아무 문제가 없는 상대를 문제가 있게 만들기도 하나 봅니다.”
내 말에 콘띠 형제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작 진짜 문제는 귀사와 함께하게 될 앞으로의 사업에 대해, 본사의 기대가 너무 컸던 데 있었던 거 같습니다.”
내가 던진 말에 실눈을 뜨기 시작한 동생 시에리 콘띠가 정중하게 내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제 미팅을 통해 어떤 부분에서 본사 쪽으로 실망을 하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동생 시에리 콘띠는 무척 교양이 있는 남자였다.
생긴 건 형 마테 콘띠보다 훨씬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말이 담긴 목소리의 온도나, 말을 할 때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의 얼굴 표정은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형인 마테 콘띠에 비해 시에리 콘티가 구사하는 영어가 내 귀엔 훨씬 더 편하게 들렸다는 것 역시 그에 대한 호감의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물론 고비드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세일즈 디렉터이기에 영업 화술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
“마치 저희 재경을 상대로 연애를 하자고 하는 거 같더군요.”
“연애요?”
“그것도 일방적인 연애. 네가 먼저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럼 네가 더 많이 좋아해야지. 네가 더 많이 기다려 주고, 네가 더 많이 신경 쓰고, 네가 더 많이 연락하고. 그건 네가 먼저 날 좋아한다고 한 거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전날 이곳 MD와의 미팅 때와는 달리, 나 역시 대화 중간중간 얼굴에 장난기를 많이 섞었다.
“딱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저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닌 제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기 때문에 만나 준다는 식의 입장. 그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실제 연애든, 아님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비즈니스든.”
“오해가 깊으신 거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유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지금 그 말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내가 유치하다고 둘러서 말하는 건가?
하긴, 이런 젊은 모습을 하고 연애에 빗대어 그간의 상황을 풀어 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래서 사업을 할 때 남자의 얼굴엔 나이가 묻어나야 한다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회의 테이블 쪽으로 숙여 양쪽 팔꿈치를 그 위로 올렸다.
깍지 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콘띠 형제에게 물었다.
“고비드. 저희 재경과 파트너십을 유지할 마음이 있긴 하신 겁니까?”
상대의 태도도 조금 전까지 상대에 대한 탐색전 수준의 편안함에서 조금은 방어적인 전투 기질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가 직접 이런 자리를 요청해서 만들었겠습니까?”
“그렇다면 감히 요청드립니다. 앞으로는 실무자들이 아닌 결정권자들이 직접 의견을 나누고 조율을 할 수 있도록, 저희 재경식품에 한해서만큼은 라이선스 업체 관리 시스템에 변화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콘띠 형제는 다시 한번 서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상대에게 당당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선스 계약 조율은 모범태 전무가 맡아 진행을 했지만, 전 조율 과정은 내가 뒤에서 확인을 한 후 최종 컨펌을 주는 식이었으니까.
반면에 고비드 측은 계약 조율 과정에 한국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아시아 영업 유통팀’ 정도가 될 거 같은 특수 부서의 장이 맡아서 진행을 했고, 실제 계약 당일에도 그가 한국으로 넘어와 재경식품의 가용 시설을 확인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고비드가 비록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 반열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충성도가 높은 소비자층을 탄탄하게 확보하고 있는 유럽 중심의 서구권과는 달리 아직 아시아 쪽으로는 큰 영업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
거기다 고비드는 중국의 어느 한 중견 유통 기업과 중국 라이선스 계약을 진행하던 중 크게 엎어진 경험이 있었다.
고비드를 자기네 발음을 덮어 ‘가오부더’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진출을 시켜야 된다는 상대 기업.
하지만 고비드 측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고 결국 중국 진출은 무산이 되었다.
그럼에도 고비드는 중국 진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다 만난 곳이 바로 우리 재경식품.
“당연히 저희 재경은 귀사의 조직 시스템을 존중합니다. 세계적인 브랜드를 탄생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 브랜드를 삼대에 걸쳐 계속 유지하고 꾸준히 성장을 시키고 있다는 건 무척 어렵고 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업적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 있기까지 무수한 시스템들이 있어 왔을 것이고, 현재 고비드에서 사용을 하고 있는 시스템은 고비드 역사 속에선 가장 발전되고 또 현재까지로는 가장 검증이 잘된 시스템일 겁니다.”
상대를 가르치기 위해 찾은 자리가 아니다.
다만 상대가 가진 약점에 우리가 가진 강점을 입힐 수만 있다면, 그걸 상대가 수용하도록 설득을 시킬 수만 있다면 충분히 수고를 감수할 만한 시간이 될 것이다.
“다만 같은 사업을 바라보는 관점과 기대치가 어쩌면 크게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계약 당시 분명 저희 쪽에선 있었고, 그게 결국은 론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테 콘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같이 회의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 양손을 깍지 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어제 미스터 손이 저희 쪽으로 뭔가 오해를 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일어섰다는 보고를 듣기 전까지 재경식품이 준비 중인 론칭에 큰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단 보고는 특별히 받은 게 없는데요.”
“서로 양보하고 조율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 그걸 특별히 문제점이라고는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점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뭐든 좋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그때쯤부터는 시에리 콘띠까지도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나란 존재로부터 액면상 보이는 나이는 깔끔하게 지워 낸 듯 보였다.
“우선은 저희 쪽에서 론칭 준비를 하는 과정에 고비드 쪽으로 넣은 여러 요청 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요청에 관한 대답이 필요 이상으로 늦게 와 수차례 클레임을 넣었고, 그럼에도 그 클레임에 대한 회신마저 안 들어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런데 어제 미스터 콘띠 주니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희 쪽에서 넣고 있는 요청, 클레임에 대해 어쩌면 최종 결정권자라고도 할 수 있는 MD조차 그 내용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게 전혀 없더군요.”
전날 나를 상대하게 만들었던 그쪽 MD를 ‘콘띠 주니어’라고 표현한 부분에 마테 콘띠는 물론이고 시에리 콘띠까지도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경식품을 대표해서 지구 반을 돌아 여기까지 온 당신들의 아시아 최고 파트너를 어떻게 처음부터 당신이 상대하지 않고, 당신 아들을 시켜 자리를 만들었냐는 나의 따끔한 질책에 당황을 한 게 틀림없었다.
비즈니스에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다.
우린 계약을 조율하고 최종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전 과정에서 고비드 측의 OM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첫날 미팅 자리만큼은 편승일 사장이 직접 참석해 우리 재경식품의 예의를 보여 주었다.
고비드 측의 OM은 결국 한국 조직 시스템으로 따지면 운영부장 정도, 최고부장 정도의 실무 책임자.
그런 실무 책임자를 환대해 주기 위해 편 사장이 직접 자리를 만들고 그 식사 자리에까지 나까지 동석했는데, 재경식품은 물론이고 재경 그룹은 대표해서 온 나를 고작 MD 한 명이, 그것도 자신의 사무실에서 맞이한다?
이건 문화 차이가 아니다.
내가 어디 이탈리아 친구들과 사업을 한두 번 해 봤겠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 콧대 높은 패션업계, 명품 회사에서도 이런 무례한 응접을 감히 자기네 스타일의 의전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경험상 아주 높은 확률로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이쪽 기질을 가진 친구들과 사업을 함께하다 보면 의사소통에 있어 교점 없는 수평선만 계속 긋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필요 이상으로 느긋하고, 필요 이상으로 나르시시즘이 강한 친구들이다.
하지만 어제의 미팅을 통해 우리 재경식품 쪽으로 보여 준 고비드 사의 태도는 분명 의도된 뭔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껏 자기들이 상대해 왔던 라이선스 기업들과는 달리, 이번에 아시아 전역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우리 재경이 자기들보다 덩치가 큰 조직이다 보니 초반 기선 제압을 해내기 위한 전략이었을까?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14시간.”
내가 회의 테이블 위로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어, 회의 의자에 등을 붙이는 순간, 콘띠 형제의 몸도 함께 세워졌다.
“하지만 정작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기까지 저희 재경은 반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
“저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 14시간을 날아와 여기에 있는 걸까요? 전화 한 통이면 될 것을, 그게 안 되다 보니 14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날아왔는데, 정작 어제 절 상대했던 사람은 보름이 넘도록 저희 재경식품이 고비드 측으로 요청한 내용들에 대해 아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상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무거워져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 시장 진출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 진행을 시키려는 일방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혹시 지금 이 자리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진행이 될 예정인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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