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44화 (244/303)

244화 그런 게 조직 정치야

“내가 고 본부장 자네한테는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전무님께서 왜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다시 그룹 본사로 올라가기 전, 조동희 전무는 고성표 본부장과 따로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모직 생활 잘하고 있던 사람을 괜히 들쑤셔서 좌천 비슷하게 생뚜앙 지사 생활을 하게 만들지를 않나, 책임을 질 것처럼 꼬드겨서 식품으로 옮기게 만들어 놓고 나 혼자 그룹 본사로 가려니까 괜히 자네한테 민망해지네.”

고성표 본부장의 생각은 조동희 전무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이런 자리를 만든 성의에 놀라울 뿐이었다.

각자도생.

조직 생활을 함에 있어, 그 조직에 나란 사람이 함몰되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자신만의 계획과 계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성표 본부장은 조동희 전무의 라인을 탔다가 당시 생뚜앙 지사로 발령을 받게 됐을 때 이미 너무 깊게 조직에 함몰되어 버렸던 자신을 발견하고 큰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서로 같이 늙어 가는 처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무님. 저는 지금 너무 좋습니다.”

“그런가?”

“네. 이미 저는 전무님 덕분에 성공한 샐러리맨이 되어 봤습니다. 임원 승진 한번 해 봤음 충분한 거죠.”

“그게 어떻게 내 덕인가? 다 고 본부장이 열심히 해서 이뤄 낸 거지.”

“아닙니다.”

아니라는 부정의 대답과는 반대로 고성표 본부장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내가 한 노력의 결과물이지, 결코 조동희 전무의 배려와 인정이 만들어 준 자리가 아니다.

꼭 누군가의 배려와 인정이 들어가 만들어진 자리라면, 그건 조동희 전무가 아닌 손정훈 상무의 배려와 인정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난 3년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고성표 본부장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왜 그런 쓸데없는 유혹에 흔들려 손정훈 당시 과장을 관찰하는 일을 자처했는지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그 업무는 고성표 당시 인사부장이 애초에 거절을 할 수 없는 업무 지시였던 것도 같고.

오너가를 제외한 재경 그룹 최고 실제의 라인을 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고, 그래서 헛바람도 참 많이 들어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태풍 같았던 2, 3년이 지난 후 식품 본사에서 자리를 잡고 보니, 결국 지금 고성표 본부장이 잡고 있는 이 자리는 누군가의 도움과 지원이 아닌 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당하게 거머쥔 자리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조동희 전무?

물론 대단한 사람이다.

샐러리맨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하지만 처음 그가 그룹 본사에서 모직으로 내려왔을 때 그에게 가졌던 경외감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은 같이 늙어 가는 처지.

재경이라는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결국 조동희 전무나 고성표 본부장 본인 역시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동네 아저씨일 뿐이다.

그리고 더 큰 세상 속에선 조동희 전무나 자신은 그저 작은 점에 불과할 뿐이다.

무슨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나이 먹고 누군가에게 충성을 할 것이며, 자신의 간과 쓸개를 모두 빼어 놓고 상대를 치켜세워 주겠나.

고성표 본부장은 생각했다.

의미 없다.

재경 안에서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하는 건 지원 본부장이라는 임원의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 계속 아등바등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는 것.

그거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걸 알기까지 너무 오래 돌아왔다는 게 함정일 뿐이고.

임원 승진을 위해, 임원 딱지를 받아 보기 위해 그간 이 조직 안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낮춰 왔던가.

이젠 스스로를 낮추는 걸 그만하고 싶었다.

상무, 전무, 사장….

올라갈 계단이야 앞으로도 많이 남았지.

하지만 꼭 그 계단의 끝까지 올라 봐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 끝에 반드시 올라야만 성공한 인생은 아니지 않을까.

그 계단의 끝이 영원한 나의 자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위로 올라가면 또 그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 마음을 졸이고 애를 써야 하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데.

아무리 신나게 위로 치고 올라가도 결국은 월급쟁이 인생.

고성표 본부장은 언제부터인가 끝없이 반복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안에서 전진 없는 뜀박질만 할 게 아니라, 그 뜀박질로 자신의 체력을 키워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목표가 생기고 나니 부장 시절 그렇게 갈망했던 임원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부장 때와 비교해 다름없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재경에 처음 입사를 하고 인사부로 배정을 받았을 때, 당시 인사부장은 얼마나 산 같은 존재였나.

그럼에도 자신이 인사부장 생활을 할 땐 누군가에겐 산처럼 느껴질 자리에 앉아 놓고, 그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고성표 본부장 본인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의 부장 생활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다 생뚜앙에서 해외 지사 생활을 하게 됐다.

한국 본사 인사부장의 역할, 그 역할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외 지사의 변화….

참 많은 걸 생각해 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뜩, 조금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인사부장 생활에 대한 반성보다는 여기까지 올라온 나 스스로를 인정해 주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고성표 본부장의 직장관이 바뀌기 시작했던 거다.

더 이상 고성표 본부장은 아무리 상대가 조동희 전무일지언정, 그 앞에서 더 이상 위축될 이유도, 잘 보이겠다고 마음을 졸일 이유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키되, 내가 지금까지 재경에서 해 온 존중도 이젠 상대를 통해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당함이 고성표 본부장에게 생겼던 거다.

“자네랑 이렇게 둘이서 자리를 가진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뭔가… 자네 느낌이 많이 바뀐 거 같네.”

“제가요?”

“내 기분 탓인가?”

“글쎄요,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아주 편안해 보이네. 이제 확실히 자리가 잡힌 느낌이야.”

“그렇습니까?”

고성표 부장의 빈 잔을 채워 주며 조동희 전무가 말했다.

“똑똑한 욕심이랄까? 그런 게 생긴 모습인데?”

얼른 술병을 건네받아 조동희 전무의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채워 놓고 고성표 부장이 말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벌써 저희 집 나영이가 열여덟입니다.”

“아이쿠! 고 본부장 딸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러게요. 제 딸이고 또 집에서 매일 보면서도 한 번씩 쟤가 벌써 저렇게 컸다고? 하는 마음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럴 때가 있어. 하하하….”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조 전무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귀엽고 애교를 부릴 땐 예쁜 짓 하는 걸 보는 맛은 있었지만, 이놈을 언제 다 키울까… 하는 막연함이 있었지요. 반대로 지금은 더 이상 저한테 살갑지도 않고 애교는 상상도 못 하는 녀석이 되어 버렸지만, 다 키웠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 안도감에서 오는 해방감이 있습니다.”

“그렇지.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전무님 눈에 제가 편안해 보이는 거 같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거 같고요.”

“듣기 좋은 소리네. 그리고 확실히 손 본부장이… 괴물은 괴물이고.”

이 대화 흐름에서 맥락 없이 손정훈 상무 이야기가 나온다고?

고성표 본부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동희 전무를 쳐다봤다.

이내 조동희 전무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 같이 모직에 있을 때 말이야. 그때 손 본부장이 자네를 생뚜앙 지사로 보내서 잠시 모직 본사에서 떨어져 있게 만들어 보란 소릴 한 게 떠올라서.”

“……?”

“나한테 고 본부장 자네에 대해 그런 말을 해. 자네를 콕 집어 말을 하면서 이게 현재 재경모직의 현실이라고.”

“그게 무슨….”

“아무리 실력이 좋은 인재들을 백날 뽑으면 뭘 하냐고. 조직 자체가 발전을 할 생각이 없는데.”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을 못 잡은 고 본부장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자세를 식탁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만 하고 있으니, 그 안에 있는 실력 있는 직원들까지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야. 조직이 계속 정체가 되어 있으니까 결국 실력이 있는 직원들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해서 회사 발전에는 하등 도움도 안 되는 라인 타기, 자기 파벌 만들기… 그런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고, 급기야 그런 게 일을 하겠다는 다른 직원들의 의욕까지 꺾어 놓는 거 아니겠냐고.”

고 본부장의 고개가 쉬지 않고 끄덕여졌다.

그랬다.

인사부.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게 힘든 부서였다.

대신 눈에 띄는 평판을 만들어 내는 건 어느 부서보다 유리한 부서이기도 했다.

“어느 한 조직에서 인사의 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더 큰 의미로는 그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라면서, 그간 자네가 모직 인사부에서 부장 생활을 하는 동안의 모든 자료를 다 뽑아서 가져왔어.”

“손 상무님이요?”

“그래. 자기가 봤을 땐 자네가 인사부에서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 같다는 거야. 그런데도 인사부가 너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거지. 자네가 없어도 인사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잡혀 있는데, 이걸 과연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자네를 탓할 것인지, 아님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거야.”

“…….”

“탓은 나중에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전에 인정부터 해 보자는 거지. 지금은 회사로부터 크게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인사부장이지만, 어쩌면 정체되어 있는 조직이 인사부장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진 실력을 발휘할 기회, 증명할 기회 자체를 빼앗고 있는 걸 수도 있다면서 말이야. 그땐 내가 일부러 자네한테 이런 이야기를 안 했지만, 그게 진짜 이유였어. 내가 자네를 생뚜앙 지사로 보내야 했던 진짜 이유.”

당시 손정훈 본부장이 자신에게 보여 줬던 용병술에 아직까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거리며 술잔을 비운 조동희 전무.

“그렇게 자네가 생뚜앙 지사로 넘어가서 지사를 방돔 지사로 바꾸고 모직 본사 측에서 주문하는 다소 무리한 요청까지 인사 관련 시스템이 거의 없었던 방돔 지사가 아무 차질 없이 다 쳐 내는 걸 보면서 뜨끔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어디 나만 뜨끔했겠냐고. 뜨끔하고 민망하기로 치면 나보다 남 사장님이 더했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모직은 한순간에 바뀌었어. 그것도 손 상무 단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랬죠.”

“하도 신통해서 내가 물어봤단 말이야. 고 부장을 생뚜앙 지사로 보내라고 했을 때, 이미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거지.”

“어떻게요?”

“나도 그렇게 물어봤어.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이건 단순히 이렇게 인사 발령을 하면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거다… 하는 식의 자신감이 아니잖아. 확신이었잖아, 확신. 경영에 해답지라는 게 있지 않고서야 고작 모직 생활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된 사람이 그것도 그땐 아직 서른도 안 됐을 때였어. 그런 걸 다 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뭐라고 하십니까?”

“서른도 안 되고 아직 모직 생활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자기 눈에도 다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사장, 전무 눈에는 안 보일 수가 있느냐고 되묻던데?”

분명 대화 내용은 웃음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조 전무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 괴물이야, 괴물.”

“그렇죠, 괴물… 누가 봐도 괴물이죠.”

“내가 벌써 재경 생활이 올해로 34년 차야.”

“어후….”

“오래도 했지?”

“네.”

“그 34년 동안 내가 괴물 같은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 봤겠어? 꼭 우리 회사 직원들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수도 없이 만나 봤어. 수도 없이 만나 봤고, 그런 괴물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도 수도 없이 경험했지. 그런데 손 본부장은 달라.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괴물이야.”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괴물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 전무의 말처럼 손정훈 상무는 이번에도 단 3박 5일간의 밀라노 출장에서 식품은 물론이고 그룹 전체를 움찔하게 만드는 결과물을 만들어 가져왔다.

마케팅 비용 제한 7밀리언.

매년 한국 돈 100억 수준의 마케팅 비용을 고비드 측으로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해서 돌아왔다.

비록 그 범위가 한국이라는 시장이 아닌 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펼쳐야 하는 마케팅 비용의 총합이지만, 이는 분명 그간 일방적인 소통만을 고집해 오던 고비드 측을 상대로 손정훈 본부장이 마술을 부린 거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결과물이었다.

“대단하긴 정말 대단합니다.”

“손 본부장. 앞으로 고 본부장 자네가 옆에서 잘 좀 챙겨 드려.”

결국은 이게 오늘 이 식사 자리를 마련한 조 전무의 목적인 거겠지.

하지만 이런 당부가 없었더라도 고성표 본부장은 손정훈 상무에게 진심인 사람이었다.

출근이 설렐 수도 있다는 걸 부장 생활이 다 끝난 뒤에 알게 해 준 사람.

퇴근한 후 집에서까지 하는 회사 생각이 꼭 억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사람.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꿈꿀 수 있게 계속해서 자극을 만들어 주는 사람.

고성표 본부장에게 손정훈 상무는 그런 존재였다.

회장님의 차남이 아닌, 그저 그 자체로 조직 안에서 태산이 되어 버린 존재.

나이, 직책, 출신을 떠나 그냥 그 존재 자체가 고성표 본부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윗사람이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도록 만들어 버린 존재.

손정훈 상무라는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던 고 본부장의 가슴에 조동희 전무는 그가 거부할 수 없는 큰 불길을 만들어 냈다.

“회장님 마음이 현재 차남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계신다.”

조동희 전무의 한마디에 고성표 본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동안 조 전무의 잔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자신의 빈 잔을 채우겠다고 뻗은 고 본부장의 손을 부드럽게 거절하며 직접 자신의 잔을 채운 조 전무.

“내가 그룹 본사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손 본부장한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최측근은 자연스럽게 고 본부장 자네가 되어야 해.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자네 말고는 마땅히 없잖아.”

“…그런가요?”

“그런가요는 뭐가 그런가요야? 편 사장이나 모 전무는 식품 원 맨들이야. 손 본부장 따라 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소리야.”

“그렇죠.”

“강 차장이나 이번에 새로 온 친구가 곁에서 수행은 해도, 그 친구들이 무슨 힘이 있나. 발언권이라는 거 자체가 아직은 아예 없는 친구들인데. 결국은 자네밖에 없어.”

“…네.”

“조금만 더 욕심을 내.”

“욕심이요?”

“식품에서 자네가 손 본부장이 직접 올려서 데리고 온 인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게 어디 식품 안에서뿐일까.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손정훈 상무는 현재 그룹 전체 안에서 어쩌면 손정태 사장이 가진 영향력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다.

“지금 맡고 있는 지원 본부장이라는 타이틀 안에 스스로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하지만….”

“오버를 하라는 말이 아냐. 식품에 있는 다른 친구들하고 파워 게임을 하란 소린 더더욱 아니고. 자넨 그런 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 어차피 자네는 손 본부장이 항공이 됐든, 그룹 본사가 됐든 다음 인사이동이 있을 때 무조건 같이 묶이게 될 거니까.”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그룹 본사 총괄 전무로 올라가는 조 전무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이는 기분이었다.

“지원 본부장이라는 타이틀 안에서만 놀려고 하지 말고, 손 본부장 생각과 속도에 맞추는 연습을 계속 하라는 소리야. 케미에도 경험이 필요한 거야.”

“…….”

“손 본부장이 최근 그룹 전체 내에서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고 재경 그룹 전체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문제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

손정훈 상무 주위에 사람이 없다?

고성표 본부장은 언뜻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 본부장이 품고 있는 의아함을 눈치챈 듯 조 전무가 말했다.

“그 어느 조직이든, 현재 우리 재경처럼 후계 후보 둘 모두가 탄탄한 경우엔 자기 목숨 줄 걸고 어느 한쪽을 지지하겠다고 새롭게 나설 수 있는 임원은 없다고 봐야 해. 미리 어느 한쪽에 지지 의사를 보인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입장을 유지해 나가야겠지만, 아닌 사람들은 더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그러니 자네밖에 더 있나?”

“네에? 이야기가 어째서 갑자기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겁니까?”

“그래, 얼떨떨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전무님도 그러셨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당연히 내가 손 본부장 곁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 처음엔 그런 걸 기대하고 나에게 같이 식품으로 가자고 한 건 줄 알았지. 그런데 본인이 됐다며, 나더러 이제 그만 그룹 본사에 올라가 회장님을 잘 모셔 달라고 하네. 어쩌겠나? 과연 내가 회장님 곁에서 중립 기어를 얼마나 잘 박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중립을 박아야 하는 자리로 날 보내는 게 손 본부장인데.”

재경 그룹 최고의 정치꾼.

조동희 전무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 손 본부장이 식품에서 추진 중인 사업들. 쁘띠 기뿔리부터 시작해서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 고비드 아이스크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룹 전체가 뒤집어질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할 거야. 그 결과 내용에 따라 앞으로 그룹 내에서의 자네 위치가 정해지는 거야.”

“……!”

“그런 게 조직 정치야. 내가 이 조직에서 얼마나 일을 했다, 지금 내 타이틀이 뭐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런 게 중요한 건 오너가 라인이 들어갈 일이 없는 조직일 뿐이고, 자넨 지금 그 오너가 라인을 제일 많이 타고 있는 임원 중 하나라는 걸 명심해야 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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