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한마디로 미친놈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하루는 내가 호출을 넣지도 않았는데, 고성표 본부장이 먼저 내 방을 찾은 날이 있었다.
매일 내 방을 찾아와 차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냐고 물어보던 조동희 전무가 그룹 본사로 올라간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귀찮다는 식으로 툴툴거리긴 했지만, 사실 내 방을 찾아오는 조동희 전무의 발걸음이 싫지만은 않았는데 그 친구의 모습이 고작 며칠 안 보인다고 꽤 헛헛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내 방을 찾아온 고성표 본부장을 통해, 조동희 전무가 그룹 본사로 올라가기 전 고 본부장만 따로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당부하고 간 내용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조 전무가 본부장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네.”
“그래서 본부장님 생각은요?”
몸을 사리지 말고 나의 사람이 되어 보라고 했다지?
조 전무다운 발상이고, 정치다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직접 내게 찾아와서 꺼내는 고 본부장의 모습에서 그의 생각은 조 전무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제 생각보다 본부장님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고 본부장은 모직에서 인사부장으로 있을 때와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다.
이미 방돔 지사 때부터 그가 조금씩 진짜 일다운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식품으로 옮겨 온 이후부터는 자기중심이 확실하게 잡힌 실력자로 거듭나 있었다.
자기 생각보다는 내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은 내 생각을 먼저 들어 보겠다는 말 아닌가.
많이 컸다.
그런데 보기는 좋고.
암.
그래도 명색이 내가 직접 임원 승진을 시켜 준 친구라면 이 정도 강단은 만들어 낼 수 있어야지.
내 앞에서 설설 기어가는 모습만 보일 친구 같았음, 내가 임원 승진을 시키기나 했겠나.
내가 고 본부장의 이런 강단을 눈치챈 건 재경모직 인사부 생활 초창기 때였다.
나의 모직 생활 일거수일투족을 조 전무에게 보고를 하는 인물이 당시 인사부장이었던 고 본부장이라는 걸 눈치채고 그를 압박했었지.
내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조 전무에게 보고하는 건 오케이.
그럼 조 전무의 일거수일투족도 내게 보고를 해 줘야 맞지 않겠냐고 그를 살짝 떠봤다.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전거에 탄 그에게서 양쪽 브레이크를 모두 빼앗은 거지.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이 덜 다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안전해 보이는 쪽으로 몸을 던져 최악의 부상을 피해 보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다리를 바닥에 끌어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를 줄여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겠지.
하지만 고 본부장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앞을 쳐다보는 데 더 집중을 했었다.
나는 고 본부장의 당시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라는 입장.
일반 사원도 아닌 회장의 차남이다.
그런 인물이 과장으로 모직의 인사부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감시라고 표현했던 걸 고 본부장은 감시가 아닌 관찰이라고 표현했고, 조 전무의 지시가 있었기에 그 관찰 내용을 조 전무에게 전달하는 건 자기 입장에선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날 관찰했던 건 인사부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당연한 업무 중 하나였지만, 일개 부장이 그룹 본사에서 내려온 조 전무를 관찰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내가 시키는 걸 거절하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기회를 줘 보고 싶게 만들었다.
“제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실 거예요?”
“물론입니다.”
“만약 제가 그럴 필요가 없을 거 같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저는 제자리에 맞는 역할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좀 더 집중을 해서 해 보고 싶습니다.”
“본부장님 자리에 맞는 역할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 전무님께 그룹 본사로 복귀하시라 제안을 하신 이유. 짧은 제 생각에 본부장님은 손정태 사장님과의 후계 경쟁보다는 현재 하고 계시는 사업에 더 집중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그렇게 둘러서 보여 주신 거라고 보입니다.”
어쭈?
간만에 날 기분 좋게 웃도록 만들어 주는데?
“제가 한 이해가 맞는다는 가정하에, 역시 본부장님다운 결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본부장님과 지금처럼 딱 달라붙어서 함께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모직 본사 인사부 때부터 시작해 방돔 지사 시절까지… 본부장님이 재경 사업에 진심인 이유가 최소한 제 눈엔 조 전무님이 기대하시는 내용과 많이 다른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본부장님께 꼭 필요한 응원과 지지를 해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저한테 꼭 필요한 응원과 지지요?”
“재경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더 커지는 거. 그래서 재경의 직원들이 더 많은 일을 스스로 기획하고 시도해 볼 수 있게 되는 거. 그래서 재경의 직원들이 더 많은 월급과 성과급을 가져갈 수 있게 되는 거. 제가 아직은 시야가 좁아서 본부장님이 가지고 계신 목표를 간략하게 요약을 하지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결국은 그런 느낌의 재경으로 키워 내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본부장님은 어떤 부분에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보다 더 집중을 해 보고 싶으신 건데요?”
“지금 이곳 재경식품 안에서 제가 누구보다 무조건 더 잘할 수밖에 없는 일이요.”
“……?”
“본부장님께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실 수 있도록 지원해 드리기 위해선 전 제가 잘하는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그게 운영 본부장님이 절 지원 본부장 자리에 앉히신 진짜 이유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중국 텐진에 있는 두부 공장 정상화에 집중해 볼까 합니다.”
재경식품의 두부 브랜드가 중국 시장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수년째 거둬들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악화되고 있는 양국 관계로 인해 그곳에 나가 있는 우리 주재원들의 생활에 비자 문제부터 시작해 많은 제약이 걸리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운영 부분에서 많은 수가 중국 현지 직원들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
“인사의 역할, 인사의 작은 관심이 어느 한 조직을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걸 방돔 지사를 통해 제가 크게 경험했습니다. 재경모직에 입사해 20년 넘게 인사 일을 해 오면서도 정작 본사의 힘이 닿지 않는 해외 지사는 타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해외 지사 생활을 해 보니까 알겠더군요. 항상 본사의 지원과 관심에 목이 말라 있다는 걸. 제가 안 돌아가는 머리로 본부장님이 모직에서 방돔 지사를 통해 만들어 낸 결과물처럼 대단한 걸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고 싶습니다. 쁘띠 기뿔리부터 시작해 고비드 아이스크림까지, 현재 본부장님께서 진행하고 계시는 사업들은 이미 식품뿐 아니라 그룹 전체에서 전사적인 지원과 관심이 쏠려 있지 않습니까. 저는 본사의 지원 사각지대에 있는 우리 재경식품의 다른 조직을 살피고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멋있네요. 와, 이건 좀 대단한데?”
“대단하긴요, 아닙니다.”
“아니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처음이요? 뭐가요?”
“제가 먼저 지적하고 입을 대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발견하고 변화를 줘 보겠다고 제게 말을 꺼낸 게요.”
고마웠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님을 보여 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재 텐진 공장에 넘어가 있는 우리 주재원 직원들이 총 몇 명입니까?”
“17명입니다.”
“그새 또 4명이나 줄었습니까?”
“비자 연장에 실패했습니다. 신규 비자 발급은 더 까다로워졌고, 텐진 공장 주재원 근무를 신청하는 직원 수 역시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현재 비자 기한이 임박한 직원이 몇 명 더 있는데, 비자 연장이 안 된다는 이유로 계속 현재 나가 있는 주재원들을 복귀만 시키고 충원을 못 해 주게 되면 결국 운영 부분이 현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매니지먼트의 중국화는 아무래도 조심을 해야죠.”
“물론입니다. 재경식품의 두부가 중국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엄격한 품질 관리, 투명한 유통 채널, 그리고 중국 소방 당국도 두 손을 들고나온 위생 안전입니다. 만약 운영이 중국 현지화가 될 경우 재경 두부가 가진 최대 강점 중 품질 관리, 위생 안전에 구멍이 생길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봐야죠.”
“비자 문제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야죠. 그런 걸 하라고 있는 게 조직의 인사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비자 문제 해결이 아니라, 텐진 공장 주재원 근무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는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현재로서 비자 연장은 불가능이지만, 까다로워지긴 했어도 신규 비자는 계속 나오니까요. 텐진 공장 주재원 근무 환경부터 개선을 시키는 게 순서라고 보입니다.”
* * *
손정훈 상무의 재경식품은 유독 짧은 여름을 경험하고 있었다.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여름.
재경식품은 항공과 스너프, 태영유통의 절대적인 지원과 협력으로 전국의 모든 공항 국제선 라운지에 스위트럼 매장을 오픈시켜 나갔고, 마침내 재경항공 기내식으로 스위트럼의 마카롱을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스너프 오프라인과 태영유통의 백화점, 아웃렛 쪽으로 계속해서 쁘띠 기뿔리와 스위트럼 매장을 오픈해 나가면서 브랜드 노출 빈도수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러다 마침내 스너프 온라인에서 완성한 JK 기프티콘에 쁘띠 기뿔리와 스위트럼을 추가시키고, 그걸 재경통신이 통신사 기본 혜택에 상단 누출을 시켜 버림으로써 재경통신의 가입자 수와 쁘띠 기뿔리, 스위트럼의 매출, 스너프의 플랫폼 가입자 수 증가를 동시에 잡아 내는 데 성공을 했다.
거기에 만족할 손정훈 상무가 아니었다.
손정훈 상무는 물이 오른 기세에 올라타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손정훈 상무의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과 결단력에 더 이상의 감탄은 사치라는 인식이 박힐 즈음이었다.
쁘띠 기뿔리와 스위트럼의 연타석 홈런으로 재경식품의 주가는 쉬지 않고 연일 상향 곡선을 그려 나갔고, 올라가겠다는 주가에 천장은 없다는 걸 직접 증명이라도 하듯 그해 가을, 재경식품은 곧바로 미국의 유명 핫도그 브랜드인 샘스 핫도그를 국내에 론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샘스 핫도그의 국내 상륙에 관한 이슈보다 재경식품 측이 만들어 낸 더 큰 이슈는 바로 재경식품에서 외식사업부를 따로 빼내어 JKF(재경외식)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겠다는 내용이었다.
재경식품이 보여 주고 있는 분사에 관한 의지는 곧 재경식품이 국내 요식업계 전체를 상대로 던진 도전장과 마찬가지였다.
국내 요식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에이디 F&B나 MJ, 착마(착한마을)와 같은 뼈대 있는 요식업체들 입장에선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들어오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특히 자체 브랜드를 히트시켜 기업의 기반을 다진 에이디 F&B나 착마와는 달리 해외 유명 요식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와 현재 재경식품 쪽에서 쁘띠 기뿔리나 샘스 핫도그를 통해 라이선스 영업을 하는 식으로 기업을 키운 MJ 입장에선 너무나 버거운 상대가 등장을 한 것이었다.
MJ는 요식업에 국한된 기업.
결코 재경이 가지고 있는 유통 채널이나 항공, 통신과 같은 고정 노출판을 흉내 낼 수가 없는 기업.
만약 재경식품이 현 이슈처럼 정말로 빠른 시일 내에 JKF를 분사시켜 해외 유명 요식 브랜드 라이선스 사업에 뛰어든다면 MJ 입장에서는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이건 시간의 문제인 것이지, 재경과 같은 초대형 기업이 작정을 하고 그룹 차원에서 전사적으로 재경식품이 펼쳐 나가려는 사업에 힘을 실어 버린다면 경쟁, 전쟁과 같은 성질이 아닌 브랜드 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결국 MJ 측에선 자신들이 희생자가 되는 원사이드 게임이 펼쳐지기 전 빠르게 재경식품 쪽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MJ사 대표가 직접 재경식품 손정훈 상무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MJ사의 대표는 재경식품 본사 접견실에서 그간 이야기만 들어 왔던 재경 그룹의 차남, 손정훈이라는 인물을 실제로 처음 만나게 된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직접 말을 섞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존재였다.
거대한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기분.
MJ사 대표는 대표적인 자수성가 사업가였다
볼꼴 못 볼 꼴, 세상의 더러운 바닥은 모두 경험을 해 봤고, 그런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자신의 성공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인물이었기에 거기에서 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눈앞에 대통령이 있다 한들 고개를 숙일까.
눈앞에 세계 제1의 부자가 있다 한들 부의 크고 작음으로 주눅이 들까.
하지만 지금 MJ사의 대표가 마주하고 있는 손정훈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힘이 있는 인물, 강력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라고만 생각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미친놈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