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편을 들어 줘도 난리지?
“싱가포르와 스위스.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이 뭔지 혹시 아십니까?”
도민종 대표에게 내가 물었다.
“싱가포르와 스위스… 둘 다 인구 천만 이하의 작은 나라지만 국가 경쟁력은 상당히 높은 선진국이죠. 둘 다 금융이 발달된 나라이기도 하고.”
“그 전에 제조업으로 기반을 만든 나라이기도 하고요.”
“제조업으로 기반을 만들었다? 글쎄요? 싱가포르와 스위스가 제조업이 강했던 때가 있었나요?”
얼굴과 말투, 그 사람의 앉아 있는 자세를 보면 대략적으로나마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MJ사의 도민종 대표의 경우는 자수성가형 사업가로 여러 강연을 다니며, 자영업을 준비 중인 사람들에게 다양한 재능 기부를 많이 하기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미 그에 대해선 그가 재능 기부 명목으로 해 왔던 여러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공부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 사람이 여러 채널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살아온 삶과 경험을 공유하고, 이 힘든 시기에 자영업을 준비 중인 사람들 혹은 또 다른 도전을 준비 중인 사람들에게 조언과 쓴소리, 그리고 용기를 전달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순수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노출시켜 가며 그런 일을 하는 걸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들어 낸 성공에 인정을 받고 싶은 걸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노출을 통해 MJ사를 직간접적으로 홍보하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60이 넘은 나이에 자기 아들뻘 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숨김없이 나누려 하는 열정만큼은 그가 이뤄 낸 성공이 어떠한 노력의 결과물이었겠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리고 아직도 싱가포르와 스위스는 강력해진 금융업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여전히 제조업이 강한 나라들입니다.”
내 말에 도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싱가포르가 가지고 있는 화학, 해양 플랜트, 전자 산업, 거기에 조선 기자재 산업은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그리고 네슬레. 그거 스위스 거잖아요. 커피 머신, 시계, 스위스 같은 경우는 워낙 관광, 금융업이 압도적으로 성장을 해서 거기에 제조업이 묻혀 보이는 느낌이 강해졌지만, 어쨌거나 스위스 역시 제조업으로 일어선 나라죠.”
“그렇군요.”
“그런데 제조업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 작은 인구, 작은 면적의 두 나라가 지금과 같은 성장을 할 수 있었겠냐는 거죠. 결국 그 두 나라가 지금의 싱가포르, 스위스가 될 수 있었던 건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금융업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지금의 싱가포르, 스위스가 될 수 있었던 거라고 저는 봅니다.”
“…네.”
“바꿔 말해서 금융이 발달되기 위해선 반드시 제조가 뒷받침되어 줘야 하는 거고요. 제조 없이 금융을 키운 나라는 없습니다. 심지어 영국도 마찬가지죠.”
내가 홍준이를 시켜 재경이 스너프를 줍게 만든 이유.
미래금융의 투자를 받아 스너프에 뱅크 시스템을 도입시키게 만든 이유.
바로 우리 재경에 제조는 있지만, 금융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다.
하물며 우리 재경의 미래 먹거리를 찾아내는 게 나의 역할이고 가장 큰 책임이었지만, 90년대를 살았던 내가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3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20년대 기준의 미래 먹거리를 찾을 수 있겠나.
처음엔 눈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비어 있는 지난 30년 세월에 대해 깊게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뚜렷해지는 건 있었다.
앞으로는 돈장사를 해야 된다는 것.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금융약국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스너프는 앞으로 향후 30년의 재경을 책임져 줄 강력한 사업 아이템이었고, 재경의 경쟁력을 몇 단계 상향시킬 수 있는 원석이라고 봤던 거다.
유통이 문제가 아니다.
스너프 플랫폼에서 일으켜 낼 트래픽.
그 트래픽을 금융 상품으로 연동시켜 낼 수만 있으면, 최소한 향후 30년 정도의 재경은 큰 문제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는 현재 저희 재경의 롤 모델을 다른 기업이 아닌 싱가포르와 스위스로 잡고 있습니다.”
“기업 롤 모델을 국가로 잡고 있다고요?”
“잡지 못할 이유는 없는 거죠. 국가도 기업도 결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뤄진 집단이라는 의미에선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그 집단이 강해지고,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잘살기 위해서 국가는 내수에 신경을 쓰며, 자신들이 가진 경쟁력을 비싼 값에 수출하고, 필요한 경쟁력은 좋은 값에 수입을 해 오고… 기업도 결국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죠, 큰 의미로는.”
“재경은 현재 제조와 유통, 금융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점 금융을 위한 제조와 유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가 될 겁니다.”
“거기에 재경은 이제 통신까지 들고 있으니….”
내가 모직에 있을 때 시니어즈를 가져오고,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던 건 그걸로 큰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식품에서 기존에 경쟁력 없던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을 팔아 버리고, 그 돈에 그룹 본사의 투자 지원까지 끌어와 쁘띠 기뿔리며,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 고비드 아이스크림까지 해외 수출이 가능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들로 빠르게 교체를 하고 있는 이유 역시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큰돈을 벌기 위함은 아니고.
처음 장선열이로부터 부경의 백화점, 아웃렛, 면세점을 가져왔을 때도, 마지막 남은 마트까지 가져왔을 때도 그걸 망설임 없이 스너프에 붙여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
태영이라는 국내 거대 유통 그룹을 우리 재경의 아군으로 만든 이유.
그 모든 건 스너프의 뱅크 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그 뱅크 시스템이 스너프의 성장과 함께 미래의 경쟁력 있는 하나의 금융판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제조와 유통에서 미리 기반을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인구가 600만 정도죠. 스위스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880만. 그런데 벌써 스너프 안에서 움직이는 전체 트래픽은 3천만이 넘었습니다.”
스너프가 확보하고 있는 정확한 트래픽 수까지 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내용까지 다 알고 있을 순 없는 거겠지.
“온라인 유통이 발달함에 따라 유통에 국경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항공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더 많은 해외 트래픽을 유입시키기 위해 현재 저희 재경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스너프가 당장은 소비자들 눈에 쇼핑과 유통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해외 트래픽을 잡기 위해 웹콘텐츠 기반의 사업에 많은 투자를 넣고 있고, 스크린 골프장과 같은 해외 오프라인 시장 개척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경모직이나 저희 재경식품은 현재 스너프가 가진 트래픽을 이용해 사업을 키워 가면서 결국은 그 트래픽 증가를 위한 경쟁력 있는 상품들을 꾸준히 개발 중에 있죠.”
“…….”
“MJ가 확보하고 있는 경쟁력 있는 외식 브랜드들. 그 브랜드들이 스너프가 개발한 JK 기프티콘에 포함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공생이 아닌, 더 발전이 가능한 공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
JK 드 누락 소공동점.
MJ사 도민종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정태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오늘 같은 자리엔 정엽이 얼굴도 같이 볼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 일부러 자리를 JK 드 누락 소공동점으로 정했다.
“며칠 전에 내가 통화로 말했던 거 기억나지?”
“통화? 아, MJ 관련된 내용 말하는 거야?”
“어.”
“그쪽 대표랑 미팅 잡았다더니, 벌써 만난 거야?”
여전히 내 눈엔 많은 부분 어설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스너프는 정태가 사장으로 있는 기업이다.
내가 만들어 내는 속도를 정태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엄연히 사장이 따로 있는 그곳의 사업을 내 마음대로 추진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정태가 가진 그릇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키워 주고 싶은 욕심도 분명히 있었던 거 같다.
스너프 자체가 정태 입장에선 동생이 기획한 사업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뱅크 시스템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내용들에 나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스너프가 개발한 JK 기프티콘을 통해 다양한 요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을 추가시켜 그 자체만으로 배달 앱과는 다른 하나의 외식 문화를 상품화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 정태는 동생이 던진 제안을 오로지 사업으로만 받아들이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고, 혹시 구체적인 방법이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기특했다.
동시에 걱정도 조금 됐고.
이놈이 보기와는 다르게 마음이 약하다.
분명 욕심은 큰 놈인데, 그 욕심도 가족 앞에선 사그러지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MJ사의 도민종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발전이 되었고, 아무래도 같은 식품권이니까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가 JK 기프티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 봐도 되겠냐고 물어봤었다.
그에 정태는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라는 대답과 함께 디테일은 자기들 쪽에서 MJ 측과 따로 잡을 테니까 가능하다면 다리를 한번 놓아 봐 달라고 했다.
“오늘 오후에 잠깐 미팅을 했어.”
“뭐래?”
“좋다고. 계약 조건에 대해 묻던데, 내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는 거잖아. 우리 쪽으로 잡아 주는 조건 그대로 MJ와 이야기를 할 건 아닐 거 아냐.”
“우리도 먹고살아야지.”
“그러니까. 일단 명함을 하나 더 받아 왔어. 그쪽에서 먼저 관심이 있다는 뜻을 보였으니까, 연락 정도는 스너프에서 먼저 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해서 말이지.”
“줘. 내가 직접 컨택을 해 볼게. MJ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정도면, 단숨에 JK 기프티콘 인지도를 띄울 수도 있겠는데? 고맙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아직 정엽이는 자리에 오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도착을 해서 안 보이길래 전화를 해 봤는데, 갑자기 객실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정태와 먼저 시간을 보내고 있으라고 했다.
객실에 생긴 문제를 대표가 직접 챙기느냐고, 당연한 거지만 떠보듯 물어봤더니 그게 호텔 대표가 하는 일이라며 마치 가르치듯 뽐을 내길래 귀여워서 대단하다 칭찬을 해 준 참이었다.
내가 아끼던 술 중 하나였던 1934년산 윔블러 싱글 몰트를 뜯어 정엽이가 오기 전까지 입을 축이고 있던 도중, 정태가 입맛을 다시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 왜 그러냐?”
“뭐가?”
“어머니 말이야. 너 왜 한 번도 안 찾아가 보냐?”
“또 그 소리야?”
“진짜 안 찾아가 볼 거야? 너 사춘기 아니야, 인마. 너 이제 서른 넘었어. 결혼할 여자도 있는 놈이 애처럼 왜 그러냐, 도대체?”
“내가 뭘?”
“부모님도 부모님 인생이라는 게 있는 거야. 너 혹시 어머니가 미래금융 쪽으로 감정이 안 좋으신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너한테나 부모지, 나한테는 내가 한 최고의 실수가 바로 장혜란이다.
내가 그 사람 얼굴을 보고 싶겠냐?
그간 어쩔 수 없이 본가에 갈 때마다 봐야 했을 때에도 내 마음은 괴로웠단다.
그런데 지금은 안 볼 수 있어 너무 편하고.
내가 왜 편한데?
얼굴을 보면 화가 날 텐데?
그럼 또 틀림없이 혼을 내 주고 싶을 텐데?
하지만 너한텐 부모인데.
내가 없는 재경을 상대로 부경 놈들이 한 짓만 생각을 하면 더 심하게 혼쭐을 내 주고 싶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어, 일부러 더는 혼을 안 내겠다고 일부러 장혜란이를 멀리하고 있는 거다.
“너 그런 거라면 진짜 생각이 없는 거야.”
그냥 들어만 줬다.
“이럴 때일수록 네가 중간에서 처신을 잘해야 하는 거야. 왜 네가 중간에서 더 심한 갈등을 만들어? 회사 일은 그렇게 잘하면서, 왜 회사 일보다 더 쉬운 어머니 마음 하나 헤아리지를 못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나는 자식이라고 봐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진 적도 없고.
져 준 적은 있다.
홍명이 결혼에 관해서.
하지만 그 역시도 홍명이를 믿었기에 한발 뒤로 물러서 준 것일 뿐, 자신의 결정을 어떤 결과로 만들어 낼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양보였다.
“네가 진짜 그 결혼을 할 거라면, 하늘이하고 좋은 결혼 생활을 해 보고 싶다면 어머니를 상대로 당장 설득은 못 해내더라도, 너로 인해 어머니가 하늘이, 그리고 미래금융을 더 안 좋게 보이게는 안 해야 될 거 아냐.”
“술 마시자.”
“어머니는 지금 네가 이렇게 변한 게 다 미래금융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계신다고. 그때도 형이 한번 말했잖아.”
이놈은 또 언제 왔어.
갑자기 누군가가 팔로 내 목을 감싸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봤더니, 정엽이 놈이 싱긋이 웃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나도 정태 말에 공감.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요령이 없어, 요령이.”
내 목을 감싸는 동시에 정태의 어깨에도 팔을 두르고 있었는데, 정태는 그런 정엽이의 팔을 귀찮다는 듯 뿌리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 이야기 중이야.”
“나는 뭐 가족 아니냐?”
“낄 데 안 낄 데 구분 좀 하지?”
“까칠한 놈. 편을 들어 줘도 난리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