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48화 (248/303)

248화 형 간다

정엽이는 언제나처럼 나와 정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 중간에 콕 끼어 앉았다.

“여기 잔 하나 준비해 줘요.”

바텐더에게 잔을 받아, 그 속으로 내 피 같은 술을 겁도 없이 콸콸콸 따르는 정엽이에게 정태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코딱지만 한 호텔 하나 운영하면서 제일 바쁘지?”

“네 코딱지 커서 좋겠다.”

“여기에 안 바쁜 사람이 어딨어? 혼자 바쁜 척이야? 이 시간까지 퇴근도 못 하고 뭐 했어?”

“나라고 퇴근이 싫어서 안 하고 있었겠냐?”

“정훈이 말로는 객실에 난 컴플레인 직접 해결하고 있었다면서? 그런 거까지 직접 다 하는 거야? 그럴 거면 사람을 왜 써?”

“컴플레인이 난 게 아니라 나기 전에 확인을 한 거지.”

“요지 못 잡지. 사람을 시키면 될 걸 그걸 왜 직접 하느냐고 묻는 거잖아.”

“아무리 책임감 강한 직원들도 직원은 직원이야. 진짜 자기 사업처럼 할 수는 없는 거라고. 너희야 사무실에 앉아서 올라오는 보고서로 일을 하면 되는지 몰라도, 호텔, 이쪽 서비스업은 달라. 사장이 직접 안 챙기고 잠시 딴눈 팔면, 금세 티가 나는 게 이쪽 일이라고.”

나는 그런 거보다는 정엽이의 복장이 거슬렸다.

“그렇게 입고 일하는 거야?”

명색이 호텔을 관리한다는 놈이 면바지에 티셔츠, 거기에 체크무늬의 얇은 재킷 차림이었다.

“응.”

“그렇게 입고 일을 한다고?”

“정훈이 이 자식 분위기 보니까 또 잔소리 시작되겠는데?”

“아니, 잔소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이건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너만 문제 안 삼으면 아무도 이게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해.”

“뭐?”

“내가 여기 대표지, 총지배인은 아니잖아. 고객 응대가 상품의 전부인 호텔 사업에,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입고 일하면 안 돼?”

뭐지?

왜 내가 지금 이 말 같지도 않은 논리에 설득을 당하고 있는 거지?

“이럴 때 보면 정훈이 얘는 진짜 도대체 어느 시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

갑자기 정태까지 툴툴거림의 대상인 정엽이의 편을 들기 시작하네?

“그건 나도 인정. 어릴 땐 안 이랬는데, 애가 갑자기 좀 이상해졌어.”

난 정엽이 편을 들기 시작한 정태를 쳐다보며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고 물었다.

“이게 진짜 문제 될 게 없다고?”

“정엽이 형 말도 틀린 건 없지. 관리 중인 업장이 어디 한두 개야? 대표실도 여기 소공동점 말고 강남점에 뒀다며. 우리처럼 외부 미팅을 회의실 같은 데서 하는 것도 아니고, 관리하는 업장들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할 텐데, 굳이 정장을 입을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그렇지, 그렇지.”

자기 편을 들어 주는 정태를 향해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정엽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막내야. 네 눈엔 형이 많이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형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형 인생 살고 있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고, 상처 안 주면서. 그리고 또 더 이상 사람으로 인해 상처 안 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렇게 안 살아 봐라. 몇 년 뒤에 정태 이 자식이 계약서 들고 와서 호텔 경영권 내놓으라고 할 건데, 그럼 나 개털 되는 거야.”

“…….”

“그렇게 힘든 걸 동시에 다 하면서 살고 있는데, 옷까지 내 맘대로 못 입어서야 되겠어?”

이놈이 갑자기 내 볼을 꼬집네?

웃음이 나왔다.

그래, 웃자.

그리고 이 녀석들의 시대를 인정해 주자.

이 녀석들의 시대를 인정해 주기 위해선 이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실수와 시행착오까지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내가 가진 사고방식이 틀릴 때가 더 많아져 버린 시대.

나는 또 이렇게 내 손주 놈들을 통해 이 시대를 배워 가고 있었다.

“근데 잠깐만.”

갑자기 이건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정엽이가 자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왜 저러는 거야?

“난 왜 계속 너희들 눈치를 봐야 되냐?”

정태가 내게 물었다.

갑자기 이 인간은 또 왜 이러냐는 식으로.

그에 나도 뭘 잘못 먹은 거 같다는 식으로 어깨만 살짝 들었다 올렸다.

“아, 그냥 말할래.”

“뭐래? 왜 저래?”

나도 모르겠다니까!

정태가 인상을 쓰며 턱을 앞으로 빼어 낸 뒤 정엽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결국은 정태 너도 알아야 되는 내용이니까.”

“……?”

“오해는 하지 마.”

“뭔데 시작도 전에 밑장 빼기부터 하고 있어? 왜? 뭔데?”

가슴 앞으로 끼고 있던 팔짱을 푼 뒤, 바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온더록스 잔을 든 정엽이.

“며칠 전에 영석이 아저씨가 불러서 태산이 할아버지 집에 갔었거든. 드모어 인베스트먼트를 JK 드 누락 쪽으로 지분 투자 형식으로 흡수시키는 내용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한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럼?”

“태산이 할아버지가 갑자기 날 우리 아버지 이름으로 부르시는 거야.”

가슴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난 좀 더 자세히 물었다.

“뭐 어떻게?”

“그냥 식사 중이었어. 보통 때랑 똑같으셨단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밥 먹고 있는데 나한테 홍명아, 이러시는 거야.”

정태도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자세를 정엽이 쪽으로 돌려 앉았다.

“처음엔 그냥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시는 건가 싶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날 아버지로 착각을 하신 거야.”

“착각?”

“어찌나 놀랐던지, 왜 그런 거 있잖아. 걷다가 다리를 삐끗해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찰나처럼 여러 번 찍히면서 슬로 모션처럼 느껴지잖아. 그런 경험 한 적 없어? 완전히 그 순간 내가 그랬다니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신 게 아니라 날 아버지로 착각을 하셨다는 걸 눈치로 알게 되니까, 그 순간 그 식탁에서 같이 식사 중이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하나 다 내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영석이 아저씨, 영우 아저씨 다 있었거든. 태양이 빼고는 그 집 식구들 다 있었어. 크게 놀라는 사람이 없는 거야. 다들 한 번쯤은 나처럼 크게 놀란 경험이 있는 사람들처럼. 어쩌겠어? 분위기가 그러니까 그냥 거기에 맞춰 드렸지.”

“그랬더니?”

“이게 진짜 신기해. 분명 그 식탁에 할아버지 가족이 있었잖아. 그럼 그게 아닌 걸 아셔야 할 거 아니야. 근데도 한참 동안 나한테 마치 우리 아버지를 상대로 말씀을 하시는 거처럼 머리 잘라야겠다, 왜 오늘 같은 날 처하고 정엽이는 안 데리고 오고 혼자 왔냐… 그러시는 거야.”

내일쯤 태산이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

최근 몇 주 태산이 본가에 발길을 하지 못했다.

전화 통화는 수시로 해 왔고, 또 지난주 회사 앞으로 찾아온 하늘이와 같이 점심을 먹으며 안부를 묻기도 했는데 태산이의 상태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왜 그랬지?

“그러다 다시 돌아오신 거야. 원래대로. 근데 조금 전까지 날 아버지로 착각하고 하신 말을 전혀 기억을 못 하셔. 어찌나 놀랐던지, 나중에 할아버지 안 계실 때 하늘이한테 물어봤거든. 종종 그러시냐고.”

“뭐래?”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근데도 나는 좀 마음이 안 좋더라.”

다시 정태의 눈치를 보며 정엽이가 말을 이었다.

“스너프는 미래금융하고 투자로 많이 엮여 있잖아. 미리 알고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거 같아서. 영석이 아저씨랑 사업 건으로 따로 만날 일 있으면, 지나가는 말이라도 할아버지 안부 물어봐 주고 그렇게 해.”

정태도 나 못지않게 놀란 눈치였다.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는 걸로 봐서는.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 회장님도 이제 연세가 보통 연세는 아니시지.”

* * *

정엽이는 이곳 JK 드 누락 소공동점에서 오늘 밤 하루를 묵을 계획이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에 나올 조식 뷔페 상태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다며.

나와 정태를 따라 엘리베이터 복도까지 함께 나와 준 정엽이.

술이 어느 정도 올라 버린 정태는 그런 정엽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형수는?”

형수.

정태의 입에서 정엽이 처의 호칭으로 형수라는 말이 나왔다.

정엽이는 순간 하고 있던 당황을 애써 숨기며, 정태가 기껏 용기를 내어 준 그 질문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계속 그렇게 떨어져 지낼 건 아니잖아.”

“아니지. 근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 드모어 관련된 내용만 정리가 되면 불러야지.”

“푸후… 쩝. 데미안은 아직 한국말 전혀 안되지?”

“넌 꼭 이렇게 길어질 말을 술자리 다 끝난 뒤에 하더라?”

“한국말 가르쳐. 아빠 가족들이 다 한국에 있고, 앞으로 한국 생활을 해야 하는데 한국말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피식하고 웃으며 정엽이가 내게 물었다.

“정태 쟤 지금 랩한 거야? 한국말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라임 괜찮은데?”

그런 정엽이에게 다시 한번 정태가 말했다.

“매사 장난이지. 내가 이래서 형이 싫은 거야. 다른 사람은 심각해 죽겠는데, 자기 혼자 여유 있어. 꼴 보기 싫게.”

“왔다. 타라.”

열린 엘리베이터 문.

그 안으로 나와 정태를 동시에 밀어 넣어 놓고 정엽이가 정태에게 말했다.

“데미안이 아니고 데이빗.”

“……?”

“네 조카 이름 말이야. 데미안은 내 이름이고, 네 조카 이름은 데이빗이라고. 조카 이름도 똑바로 모르면서 삼촌 흉내 내기는. 아무튼, 제수씨한테 안부 전해 줘라. 조만간 기회 되면 다 같이 자리 한번 만들자.”

나와 정태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 있었다.

각자의 차를 세워 둔 게 꽤 거리가 있어 보였다.

내가 타고 갈 차가 먼저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입구 앞으로 들어왔다.

차에 타고 있던 정 과장이 밸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였다.

“저 사람이야?”

장선길이의 차를 몰았던 친구가 정 과장이냐고 묻는 듯했다.

“어.”

“생각보다 젊네?”

“나도 처음에 직접 보고 놀랐어.”

손짓으로만 차에서 내리려는 정 과장에게 그럴 필요 없다며, 잠시 차에 있으라고 한 뒤 정태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하는 거 괜찮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혹시 모르니까 차 안에서 사업 관련된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해.”

“걱정하지 마.”

“누가 어디 널 걱정하냐? 저 사람이 한 전적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러니까 걱정을 하지 말라고.”

“그래, 뭐 니가 알아서 잘하겠지. 정훈아.”

어느새 정태의 차도 내가 타고 갈 차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왜?”

“아까 정엽이 형이 한 말 말이야. 장 회장님.”

“어.”

“나는 좀 그래도, 너는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어?”

“들여다봐야지.”

“어머니는?”

결국은 또 장혜란이 이야기를 꺼내겠다고 태산이 이야기를 꺼낸 거구나.

“정훈아. 형은 그렇다.”

“하아, 또 뭐가?”

“한숨 쉬지 말고, 인마. 나도 너한테 이런 잔소리 안 하고 싶어. 너 아니라도 형 요즘 신경 쓸 거 한 트럭이거든?”

“그럼 그 트럭 정리에 집중을 해.”

“나는 그래. 형은 그렇단 말이야.”

이놈 이거 취했네.

꼴랑 위스키 서너 잔에….

“솔직히 잘 모르겠어.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 싶다가도, 그러시는 마음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야. 근데도 나는 네가 하늘이하고 잘됐으면 좋겠어. 네가 진짜 그 결혼에 마음이 있다고 하면. 그냥 옛날에 어른들 사이에서 있었던 케케묵은 약속 때문에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너나 하늘이 둘 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형 입장에선 이해가 안 돼.”

“…….”

“어머니 찾아봬. 어려운 일 아니잖아. 언제는 나만 쏙 빼놓고 어머니랑 단둘이 영화도 보러 다니고 데이트도 곧잘 하던 놈이 갑자기 왜 그래? 어? 왜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걸로 일을 키워? 네가 꼭 그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형이 얼마든지 옆에서 같이 어머니 상대로 설득을 해 줄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언제 기회 봐서 어머니 한번 찾아봬.”

“내가… 알아서 할게.”

“형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형 섭섭해질 수밖에 없어. 장 회장님은 들여다보러 가면서 왜 어머니한테는 그렇게 못 해?”

“…….”

“푸후, 형 오늘 좀 취한 거 같지?”

“취했네.”

“그래, 그런 거 같다. 아, 씨… 모르겠다, 나도. 암튼 형 생각은 그러니까, 너도 인마, 너무 그러지 말고 좀 똑똑하게 처신을 해. 형 간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