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엽이한테 무슨 소릴 들은 게 있는 모양이지?”
아주 오랜만에 태산이와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가을 하늘이 끝내주게 맑고 높은 주말의 점심이었다.
첫판을 허무하게 내어 줘 놓고, 새로운 장기를 준비하는 동안 태산이가 내게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엽이 다녀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진즉에 주말 발길이 뜸해졌던 사람이 늙은이 감동 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 얼굴을 다 보여 줘?”
항상 궁금했다.
나는 내 친구 태산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그때까지도 이렇게 손자 놈의 몸을 빌어 내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내 친구 태산이에게 어떠한 시간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일까.
너무 고마운 게 많은 친구다.
받은 것만 기억이 나지, 딱히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뭔가를 했던 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렇다고 손주 몸에 삭월세 비슷하게 빌려 들어와 있는, 그래서 언제 쫓겨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고, 억울할 게 없는 보너스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가 이 보너스 기회를 오로지 벗을 위해서만 쓴다는 것도 나답지 않은 선택인 것이고.
결국 내가 만들어 낸 결론은 내가 해 주고 싶은 걸 해 주는 게 아니라, 이 친구가 원하는 걸 최대한 근접하게 해 보자는 거였다.
태산이라고 어디 정리할 게 없겠나, 따로 챙겨야 할 사람이 없겠나.
육십 줄에 암 선고를 받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바로 나의 재경이었다.
집사람도 아니었고, 아들놈들, 그 아들놈들의 자식 놈들도 아니었으며, 아직 시집을 보내지도 못한 여정이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사업들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어쩌면 진짜로 해 보고 싶은 사업들을 오로지 재경을 위해서만 해 보겠다고 그렇게 재경을 키워 왔던 건데, 그걸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는 건가… 하는 억울함과, 어떻게 재경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정리를 해서 홍명이 놈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었다.
태산이라고 다를까.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나야 느닷없는 죽음 선고를 받은 것이었지만, 태산이는 꾸준히 자신의 마지막과 자신이 없는 미래금융을 준비해 왔을 테니.
덤덤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내 친구를 위해서도 더 좋을 것 같았다.
“저라고 어디 뭐 장기 생각이 안 나서 발길이 뜸했겠습니까? 제가 회사 사람들 외에 할아버지 말고 친구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뭐? 친구? 허, 허허….”
“친구지요. 지금처럼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동안만큼은.”
“예끼, 이 사람아. 젊은 친구가 오늘내일하는 늙은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못 하는 말이 없다.”
“장기 친구가 아니면 뭡니까? 호적수라고 하기엔 승률이 너무 일방적이잖아요.”
서로의 장기 알 대열이 새로 맞춰진 상태였다.
졸 하나를 먼저 열어 차가 움직일 길을 미리 터놓고 태산이에게 말했다.
“제가 딴 사람 눈치 보고 그런 성격은 아닌데, 이상하게 최근 요 몇 달은 장기 두러 이 집에 올 엄두가 잘 안 나더라고요.”
“자네 어머니 때문에?”
마를 움직여 포가 장군을 지키게끔 길을 만든 태산이의 첫수를 보고, 똑같이 마를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이 집에 할아버지하고 장기 두러 오는 거랑 제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럼? 그럼 누구 눈치 때문에 엄두를 못 내.”
“당연히 아줌마, 아저씨죠.”
“하늘이 애미, 애비?”
“네.”
“왜?”
“왜긴요. 뭘 다 알면서 물어보십니까? 양쪽 집안 회장님들끼리 따로 자리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태산이는 대답 없이 자신의 수를 펼쳐 나갔다.
“아주머니, 아저씨 두 분 다 사람이 좋아서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이해해 주시는 거지, 저희 회장님께서 구한 양해가 상식적인 양해는 아니잖아요. 영석이 아저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가 만약에 아줌마 입장이었으면 당장에 때려치우라고 했을 겁니다. 얼마나 귀하게 키우셨을 거예요. 그런 딸 혼사 문제를 그것도 별거를 하든, 이혼을 하든 어쨌든 시어머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어느 부모가 기분이 좋겠어요?”
장기판 위로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피식하고 미소를 흘리는 태산이었다.
“그냥 집에 찾아와도 손님이란 생각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인데, 그런 이야기까지 주고받은 상황에서는 제가 찾아오는 게 얼마나 더 불편하시겠냐고요. 저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고요.”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때 자네 집안에서 제일 양심 없는 사람은 바로 자네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업하는 사람이 어떻게 양심 같은 걸 일일이 다 챙기며 살아가겠나.
우직한 양심보다는 현명한 변심이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게 사업이라는 건데.
“나는 자네 아버지가 우리 장 회장 따로 불러서 구한 그 양해가 내심 고마웠어.”
“그러셨습니까?”
“만들기 어려운 자리였을 거야. 현재 서로 묶여 있는 사업 투자 건이 한두 개도 아니고, 자칫 그런 내용으로 서로 어색해져 버리면 우리도 우리지만 재경, 스너프… 우리 미래금융 투자로 벌여 놓은 사업이 작지가 않으니 분명 마음고생을 시작해야 할 건데, 그런데도 가장 예민하고 조심을 해야 할 타이밍에 딱 그런 자리를 만들었더군.”
이건 나도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런 홍준이의 결단력과 판단을 속으로 무척 높게 사고 있었다.
“정훈이.”
“네.”
“하늘이한테 진심이 안 담길 거 같으면, 이 결혼 안 해도 된다.”
여기에서 차가 아니라 상을 움직인다고?
이 친구 이거 장기에 영 집중을 못 하고 있네.
“양쪽 집안 관계 때문에 하겠다고 하는 거라면, 오히려 그 결혼 때문에 나중에 양쪽 집안 관계가 멀어질 수가 있는 거야.”
“지금 저한테 해 주신 말씀, 하늘이한테도 해 주셨습니까?”
난 얼른 포로 무방비 상태의 차를 주워 먹었다.
움찔하는 것도 잠시, 태산이는 먼저 움직였던 상을 얼른 원래 자리로 갖다 놓고서 포가 장군 진영으로 넘어갈 길을 급하게 차단시켰다.
“저한테 저희 집안에서 제일 양심이 없는 사람이 저라고 하셨죠?”
“너 같은 친구를 내가 자네 할아버지 이후로 만나 본 역사가 없다.”
“제 할아버지도 저처럼 양심이 없는 분이셨습니까?”
“있는 거보다 없는 게 훨씬 더 많은 분이셨다. 그런데도 가지고 계신 것들이 워낙에 압도적이라, 부족한 것들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분이셨지. 가까이서 모셔 봐야 아, 이분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이분한테도 이런 허점이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돼.”
“제 할아버지는 어떤 걸 그렇게 압도적으로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하겠어?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설명을 해 준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뿐인데. 그런 분이셨어, 자네 할아버지란 사람이. 절대 가까이에 두고 사귀면 안 되는 유형의 사람인데, 한 번 가까이에 가게 되면 거절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리지. 그게 뭐든.”
“친구로서는 참 별로였겠습니다?”
“별로라고 한들 바뀌는 게 있나. 그 양반 쫓아 평생을 장사에 사업에… 그렇게 재경을 키우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어느새 내 주위에도 자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네 할아버지 말고는 친구가 없던데.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버려? 하하하.”
장기판은 어느새 내 쪽에서 넘어간 포와 차, 마가 태산이의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먼저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앞으로 제가 하늘이하고 차근차근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자네 부모님 일은 참 유감이다. 자네 아버지가 그런 결정까지 할 거라곤 나도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아닙니다.”
“자네 어머니 입장, 우리 쪽에서도 충분히 이해해. 불편하지. 안 불편하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 아니겠나.”
“…그렇죠.”
“어떤 식으로든 알아서 잘 정리해 봐. 내가 너니까 이렇게 믿고 말을 한다. 항상 생각이 있고, 그 생각으로 다음 수를 만들어 내는 놈이니까.”
태산이에게 얼굴에 미소를 띄워 보여 줬다.
“다행이에요.”
“다행? 뭐가?”
“사실 걱정을 많이 하면서 왔거든요. 근데 뭐 직접 보니까 멀쩡하시네요. 하하하.”
“이 나이 먹고 몸에 고장 하나 안 나는 게 그게 더 비정상이지. 정엽이 앞에서 했던 실수는 일종에 몸살 같은 거였다. 걱정 안 해도 돼.”
몸살?
“긴장이 좀 풀렸어. 그간 부경통신 상대로 긴장이 바싹 되어 있다가, 그게 하나둘씩 좋은 쪽으로 해결이 나고 하다 보니까, 늙은이 머리에 잠시 몸살기가 돌았던 거뿐이야.”
“그게 몸살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제가 좀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나야 고맙지. 이젠 회사 일도 아예 손을 놓은 상태라 전보다 더 적적해.”
“장이요.”
“이거 치우고 바둑알 가져와.”
* * *
눈칫밥 비슷하게 그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하늘이와 밖으로 나왔다.
내가 밖에서 간단하게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다.
물론 먼저 커피 이야기를 안 꺼냈어도 흘러가는 분위기는 하늘이가 따라 나오는 분위기였고.
“장기 두면서 무슨 이야기 나눴어?”
날씨가 진짜 간만에 기가 막혔다.
마음 같아서는 낚시대를 챙겨서 밖으로 나가고 싶은 그런 날씨였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가을을 좋아했네.
가을의 하늘을….
“딱히.”
“딱히?”
“걱정이 돼서 와 본 거지, 따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겠어?”
“할아버지라도 무슨 말씀을 하셨을 거 아냐.”
“우리가 무슨 원시인이냐? 폰 놔두고, 꼭 직접 만나야만 이야기를 하게. 전화는 내가 자주 드리잖아. 할 말 다 통화로 하고 있는데, 뭘 굳이 오랜만에 만나서 장기 두면서까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할 거야? 그리고 너는 궁지로 몰리면서 피할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내 장기 실력 알잖아.”
하늘이까지 어렵게 내 앞에서 장혜란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도야?”
“뭐가?”
“아직도 아주머니 혼자 사시는 곳 안 찾아가 봤냐고.”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안 가.”
“진짜 왜 그러니?”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내가 너한테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나? 나 우리 엄마 별로 안 좋아한다고.”
“그거랑 이건 다른 거 아냐?”
농담을 섞어 가며 하늘이에게 말했다.
이게 내가 하늘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풀어 갈 내용은 아닌 거니까.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누가 봐도 지금 내가 서야 하는 줄은 우리 회장님 라인 아냐? 왜 답이 빤히 나와 있는 선택지 앞에서 고민을 해. 그럴 필요 없잖아.”
“이런 농담을 좀 별론데?”
“그럼 이런 걸로 내가 농담을 안 해도 되게, 네가 불편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마. 내가 장하늘이 오지랖을 모르냐? 그걸 아니까, 미리 너한테 내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정이 없다는 걸 말해 준 거였단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손정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기억 상실. 좋아. 그런 변수가 생겼다고 치자고. 그래도 그런 변수가 생기기 전까지의 손정훈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정이 깊은 사람이었어.”
웃기네.
하늘이는 갑지기 엉뚱한 타이밍에서 나로 하여금 웃음이 터지도록 만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엄마라는 존재에 정이 깊었다는걸.”
“채서린이 그러던데?”
“채서린?”
여기에서 채서린의 이름이 왜 나오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채서린의 이름이 나올 이유가 없는데?
“내가 물어봤어. 기억을 잃기 전의 손정훈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걸 물어볼 수 있는 상대가 채서린 말고는 없잖아.”
“채서린을… 따로 만난 적이 있어?”
“가끔씩.”
“가끔씩? 한 번도 아니고 가끔씩?”
“어, 요즘 따로 가끔씩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와인도 같이 한 잔씩 하고 그래.”
“왜?”
“궁금하니까.”
“네가 채서린에 대해 궁금해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채서린을 왜 궁금해해? 미래기획 쪽을 바로 안 통해도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만 치면 최근 근황이 대통령 근황보다 더 많이 뜨는 사람이 채서린인데.”
“그럼?”
“내가 채서린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대상이 손정훈밖에 더 있어? 직접 물어볼래도 나보다 기억을 잃기 전 자신에 대해 더 모르고 있는 오빠를 상대로 오빠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거잖아.”
“…….”
“괜히 내가 채서린하고 친해진 게 아냐.”
“그게… 왜 궁금하지?”
“궁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문형인데, 그 의문형 앞에 다른 의문형을 다는 건 또 무슨 경우야? 그냥 궁금하네, 하나부터 열까지 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