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냐?
그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부경통신과 물고 뜯는 소모전을 이어 나가던 중, 하늘이는 정훈이로부터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 음… 엄마라는 사람 싫어해.”
입속에 저절로 담기는 비난의 워딩들을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다시 밀어 넣으며….
그렇게 가까스로 쿨한 척, 받고 있던 충격을 정훈이 앞에서 숨기는 데 성공은 했지만, 하늘이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 말이 가진 의미뿐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정훈이의 차가운 표정 모두가 하늘이에게는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거칠고 날카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낳아 주고, 키워 준 엄마라는 존재를 상대로 싫어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는 것일까?
싫다는 말을 할 때 정훈이의 얼굴에 담긴 표정은 지긋지긋함이나 불편함, 애증과 같은 엄마라는 존재를 상대로 자식이 어쩌면 가질 수도 있는 상식 가능한 표정이 아닌,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정훈이에 대한 하늘이의 감정은 속수무책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비즈니스로 묶인 정략결혼이었어도, 최소한 자기 남편이 회장 자리에 욕심이 있어 친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루머가 나돌면, 그 루머가 자기 친정 쪽에서 흘린 루머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그 말을 할 때엔 언제 그런 차갑고 경멸에 가득찬 표정을 얼굴에 담았나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깊은 슬픔이 두 눈에 담겨 있었다.
그 슬픈 눈빛이 하늘이를 무너뜨렸던 거다.
“오늘… 내가 같이 있어 줄까?”
비록 정훈이가 보여 준 반응 때문에 얼른 장난으로 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하늘이는 정훈이에게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고백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백.
정훈이의 말처럼 아무리 비즈니스로 묶인 정략결혼이라도, 어느 쪽에서 먼저 하건 결혼엔 고백이라는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 고백을 하늘이가 먼저 했었다.
그리고 오늘.
하늘이는 다시 새로운 고백을 시도해 본다.
“그냥 궁금하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손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하지만 역시나 오늘도 정훈이의 반응은 건조하기만 했다.
마치 지금 이 고백도 그때처럼 알아서 장난으로 덮으라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하늘이는 용기를 내고 있었다.
자기도 자기가 왜 손정훈을 상대로 이런 용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자존심에 의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조금 전 꺼낸 고백만큼은 그때처럼 비겁하게 없던 걸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오기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표정 썩네? 헐…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건 비매너 아닌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나도 궁금해지네.”
“뭐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란 사람에 대해. 말 잘 꺼냈어. 말 나온 김에 좀 물어보자.”
“…뭘?”
“나는 도대체 어떤 놈이었어?”
“오빠?”
정훈이가 말했다.
궁금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궁금해지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네가 너한테 아무 짓도 한 게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내가 왜 그래? 내가 사이코야?”
“그러니까. 근데 나한테는 왜 그랬어?”
“오빠한테?”
“어. 처음 너희 집에 할아버지 만나러 갔을 때. 손님이라고 억지로 자리는 함께했지만, 너 나 상당히 싫어했잖아. 요란다? 내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 때문에. 그 이름이 이젠 나한테 아예 인이 박였어. 내가 그 친구한테 그렇게까지 큰 실수를 했어?”
실수?
하늘이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니, 정훈이가 요란다에게 딱히 실수를 한 건 없었다.
다만 하늘이는 그 당시 자신의 친구였던 요란다에게 정훈이가 했던 행동에 실망을 했던 것 뿐이다.
정훈이가 실수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정훈이에게 일방적인 실망을 했던 거였다.
그리고 그 실망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당시 어렸던 하늘이에게 정훈이는 해외 유학 생활에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한 명이었고, 그런 지인이 해외 유학 생활을 하며 가까워진 자신의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는 유치함이 만들어 낸 실망이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일이야.”
“그걸 너는 2년 전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잖아.”
“됐어, 그만해. 내 감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글거려.”
“내가 궁금해서 그래,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이었는지, 얼마나 개차반에 악질이었는지….”
점점 더 그 시절 손정훈에 대한 모습이 선명해지는 하늘이었다.
슈퍼 카로 등하교를 하고, 주말만 되면 시내 클럽, 호텔 카지노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 당시 손정훈.
하지만 조금 전 정훈의 본인 입에서 나왔던 표현들처럼 형편이 없는 놈이었다든지, 개차반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다.
그저… 지는 게 싫어서 더 그렇게 노골적으로 재벌 3세임을 자랑하며 다니는 철없고, 생각없는 바보 정도였던 거 같다.
“그때 이야기는 내가 더는 안 하고 싶어. 꼭… 노래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녹음된 걸 듣는 기분이야.”
“…….”
“손발 오글거린다고.”
* * *
대학에서 만났던 정훈이는 하늘이에게 정엽이 오빠 못지않게 고맙고 의지가 되는, 꼭 사촌 오빠 같은 존재였다.
첫 유학길엔 정훈이가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서 자신의 짐을 싣고 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학업보다는 같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돈과 함께 젊음을 낭비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방탕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런 절제 없는 모습이 하늘이에게 처음부터 안 좋게 보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을 떠나 전혀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기 시작한 하늘이에게 정훈이의 모습은 새로운 자극이기도 했고, 한국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탈이기도 했으니까.
정훈이는 쓸데없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돈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그들의 앞에서까지 서슴지 않고 보이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실제 시비가 걸리는 경우도 많았고, 심한 경우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돈으로 돈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 짓밟으려는 모습.
참 유치한 모습들이었다.
학교 야외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억 소리가 나는 중국인 유학생들의 슈퍼 카들.
하지만 그들의 슈퍼 카는 그보다 더 비싸고 구하기 힘든 슈퍼 카를 몇 대씩이나 보유해서 요일별로 바꿔 타고 다니는 손정훈의 컬렉션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다른 빈자리도 얼마든지 많은데, 가만히 보면 정훈이 오빠는 항상 중국인 유학생들의 슈퍼 카 바로 옆에 자신의 차를 주차시켰고,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러다 나중에 하늘이도 정훈이의 그런 유치한 승부욕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시작을 하게 된 건지 알게 되었다.
같은 전공에 정훈이가 1년 반 정도 사귀었던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중국 유학생이었다.
중국인 유학생들 중에서도 학업보다는 클럽, 파티, 카지노를 다니는 걸 좋아하는 부류에 속해 있던 여학생이었는데, 정훈이가 보기 좋게 차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여학생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을 상대로 그런 유치한 승부욕을 보여 온 거 같은데, 하늘이의 눈에 그런 정훈이의 모습은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요란다가 하늘이에게 정훈이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했고, 마침 룸메이트로 요란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하늘이는 그런 풋풋한 감정이 재밌기도 해서 기꺼이 자기가 적극 응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정말 딱 그 시절, 그 나이였으니까 가능한 일들이지, 그걸 지금에 와 추억하고 떠올리자니 손가락 지문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하늘이는 요란다와 정훈이가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종종 만들었다.
뭘 좀 급하게 사야 할 게 있어서 다운타운에 나가야 하는데, 차로 태워 주면 안 되느냐고 징징거리는 시늉을 조금만 하면 정훈이는 궁시렁거리며 항상 차로 기숙사 앞까지 하늘이를 태우러 왔고, 그럴 때면 하늘이는 요란다와 함께 정훈이의 차를 타고 다운타운까지 나갔다가 거기에서 셋이 함께 저녁까지 먹고 다시 학교로 들어오는 일종의 연애 도우미 역할을 자처했었다.
자연스럽게 셋은 자주 어울려 다니며, 어느새 정훈이와 요란다도 많이 친해졌다.
그러다 문제가 생겨 버렸던 거다.
요란다가 정훈이에게 고백을 했고, 정훈이는 괜히 그 고백 때문에 하늘이하고의 사이까지 어색해지는 게 걱정이 되어서 최대한 요란다가 상처 받지 않도록 둘러서 거절을 했는데, 그 거절이 요란다를 더 정훈이에게 집착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요란다는 하늘이의 룸메이트였고, 유학 생활 중 처음 사귄 친구였으며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괜한 오지랖.
중간에 끼어서 요란다의 마음을 응원해 준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참 쓸데없는 짓을 많이 했는데, 결국 정훈이는 다른 여자 친구를 만들었고, 그렇게 하늘이는 룸메이트였던 요란다와도 거리가 멀어지며 바람둥이 손정훈에 대한 실망감으로 오로지 학업에만 집중을 하기 시작했던 거다.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자 하늘이는 그때의 풋풋함이 그립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이불 킥을 하고 싶을 정도로 그 당시 자신이 했던 행동들, 오지랖, 감정들이 부끄럽기도 했다.
반가움.
2년 전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집으로 찾아온 정훈이에 대한 하늘이의 첫 감정은 사실 반가움이었다.
하지만 같이 대학 생활을 하던 당시 워낙에 허물없이, 정훈이와는 친남매처럼 티격태격하며 지냈던 하늘이었기에 그 반가움을 틱틱거림으로 표현을 했던 거뿐인데, 그 표현을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정훈이의 모습 때문에 감정이 어긋났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정훈이의 발길이 잦아지는 동안 자신이 반가움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툰 점이 있었다고 굳이 인정을 하고 싶지도 않아 자존심을 부리다 보니, 그게 정훈이에게는 틱틱거리는 모습으로 보였을 수밖에.
그때는 하늘이도 몰랐던 거다.
정훈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런 식으로 발전이 되어 버릴 거라고는….
* * *
그 시간 정태는 아내 원수경과 함께 부경화학의 장민석 부부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촌 형 부부의 초대.
형식은 사촌 형제들끼리 부부 동반으로 편하게 식사나 하자는 거였지만, 목적은 뚜렷한 자리였다.
바로 현재 스너프의 온라인, 오프라인 유통판을 통해 부경화학의 생활건강 제품들을 재도약시켜 보기 위함.
고급 프랑스 요리로 식사를 끝낸 그들은 곧바로 같은 호텔의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애프터눈 티를 즐겼다.
그 자리에서 장민석이 식사 자리 내내 참고만 있었던 본론을 꺼냈다.
“곧 추석인데, 스너프도 명절 맞이 스페셜 이벤트 준비해야지?”
“해야지.”
“올 추석은… 우리 생활건강 쪽 제품들 좀 밀어주면 안 돼?”
원수경은 고작 1년 사이에 서로의 입장이 180도 바뀌어 버린 장민석의 처, 배씨 집안의 장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수경의 미소를 받고 있는 배씨 집안의 장녀.
그녀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그간 손아래 사촌 동서에게 보여 왔던 적당한 무시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냐. 형도 잘 알잖아.”
“그러지 말고 좀 해 주라.”
“내가 월요일에 출근하면 쇼핑 쪽 부문장 통해서 이야기는 해 놓을게.”
“야, 진짜 너랑 정훈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우리가 또 뭘?”
말은 편하게 하고 있지만 장민석은 정태의 눈치를 과하게 살피고 있었다.
“부경통신 이슈 있었을 때 말이야.”
장민석의 입에서 불편한 부경통신의 존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태는 표정 관리를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다.
원수경 역시 사업은 남자들의 몫이라는 듯, 배씨 집안의 장녀 쪽으로 작은 케이크 선반을 직접 밀어 넣으며 맛이 괜찮다고, 한번 맛을 보라고 했다.
“형이 민규 자식 호텔 직원 폭행 건이랑 음주 운전 뺑소니 사건. 그거 다 재경에서 무기로 쓰라고 같이 묶어서 한눈에 다 들어오게끔 정리시켜 정훈이한테 줬었잖아. 그거 준비하면서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냐?”
“뭐라고? 뭘 했다고?”
정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정태의 모습에 장민석은 반응이 왜 그렇냐며, 혹시 몰랐던 내용이냐고 물었다.
그에 정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대답하자, 장민석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훈이 이 자식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걸 너한테도 말을 안 했다고?”
“…….”
“그래, 좋아.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사촌끼리 자랑할 일도, 칭찬을 들을 일도 아니니까 그 이야기는… 내가 안 꺼낸 걸로 하자. 근데 이건 좀 알아줬음 좋겠다, 정태야. 나나 우리 아버지는 너희 재경이랑 부경통신 사이에서 최대한 중립을 지킨다고 지켰어. 그리고… 할 만큼 했고. 화학, 물산 지분까지 가져갔잖아. 이젠 같이 좀 살자. 형이 진짜 앞, 옆으로 제수씨, 와이프 앉혀 놓고 이런 소리까지 해야겠냐?”
부경통신의 장민규 부사장에 관련된 내용들이 장민석을 통해 손정훈의 손에 들어갔었다?
그 순간 원수경의 눈에 미묘한 흔들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