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그것도 내가 전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냐
호텔 야외 가든이었다.
아이들이 갑갑해서 힘들어한다는 핑계로 원수경이 야외 가든에 테이블 하나를 새로 잡았다.
남편들은 안에서 사업 이야기를 하게끔 배려를 해 놓고, 아이들, 장민석의 처인 배씨 집안 장녀와 함께 야외 가든으로 나온 원수경.
그녀는 승현이가 뒤뚱뒤뚱 가든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쳐다보며 찻잔을 들었다.
그런 원수경에게 배씨 집안 장녀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승현이가 많이 컸네.”
“예준이도 많이 컸어요.”
“우리 예준이는 예쁜 거 진작에 다 끝났지, 뭐. 이젠 말로만 듣던 미운 다섯 살. 그걸 내가 요즘 경험을 하고 있어.”
“밉긴요. 예쁘기만 한데.”
“말 안 들어.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조금만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울고불고 난리도 아냐.”
“애들이 다 그렇죠, 뭐.”
원수경과 배씨 집안 장녀는 넓은 가든 위에서 따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새로 받는 커피를 함께 음미했다.
그러다 원수경이 통유리 벽을 통해 보이는 호텔 안, 남편들의 모습을 흘깃거린 후 입을 뗐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소리였어요?”
“뭐가?”
“아까 안에서 아주버님이 꺼낸 민규 도련님 이야기요. 그걸 아주버님이 저희 집 정훈이 도련님한테 정리해서 줬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배씨 집안 장녀는 원수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 건너 건너 원수경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접하고 있던 차였다.
그만큼 재경 그룹의 위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고, 그와 동시에 원래라면 자신의 자리였던 재계 며느리들 모임 자리에 이젠 원수경이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전혀 몰랐던 내용이야?”
“제가 사업에 대해 뭘 알아야죠. 저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어요. 크게 관심도 없고. 그런데 저희 정훈이 도련님이 그런 내용에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하니까 뭔가 싶어서요.”
원수경은 본능적으로 해당 내용이 정훈이에게 큰 약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부경통신의 장민규.
음주 뺑소니 운전에, 호텔 직원 폭행.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던 존재다.
장민규에 비하면 손정훈이 치고 다니는 사고는 애교 수준에 불과할 정도였다.
지금의 손정훈을 생각하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불과 2, 3년 전까지만 해도 손정훈은 재경가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손정훈은 집안의 기대에 부응을 못 하는 정도였지, 어디 가서 형사 소송에 휘말려 재경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다.
반면에 장민규는 태생이 잔인하고 폭력적이라 많은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 존재였다.
원수경은 장민규에 관련된 내용이 장민석과 손정훈의 합작품이었단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도 아주 재미난 생각들이 발전되고 있었다.
배씨 집안의 장녀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원수경의 입장 앞에 싱긋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집안 행사에서 마주치면 형식상 인사 정도나 주고받을까, 이런 자리를 함께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 상대였다.
다른 집안 동서들에 비해 크게 관심이 가는 배경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재경가 맏며느리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어쩌면 평생 상대를 할 이유가 없었을 존재.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크게 바뀌었다.
집안 사업을 위해서도, 오늘 이런 자리를 억지로 만든 남편을 위해서도 배씨 집안의 장녀는 원수경의 기분을 맞춰야만 했다.
“예준이 아빠가 장손이잖아. 부경은 다른 그룹들이랑 달리 분리 경영을 하면서도 부경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준이 아빠가 사촌 형제들이랑 따로 자리를 많이 만들 수밖에 없었어.”
“그러셨겠죠.”
“민규 도련님 말고도 다른 동생들에 관련된 내용으로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썼어. 내 친정이 마침 또 법조계하고 인연도 깊고.”
배씨 집안이 법조계 안에서도 영향력이 큰 집안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원수경은 아이들이 노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수차례 끄덕였다.
“오늘 형님네하고 같이 점심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을 해 봤는데, 제가 아직 형님 개인 번호를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원수경이 말했다.
“앞으로 오늘 같은 이런 자리가 종종 만들어질 거 같은데, 형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형님 번호를 좀 받아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우리가 아직 서로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나?”
“저는 없어요. 형님은 있으세요?”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네, 나도 없네.”
그 자리에서 원수경과 배씨 집안 장녀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카톡까지 함께 저장했다.
배씨 집안 장녀의 연락처를 손에 넣은 원수경은 다시 자기 폰을 가방 안으로 챙겨 넣은 후 커피 잔을 들면서 말했다.
“아주버님이 사촌 형제들을 참 잘 챙기셨죠.”
“……?”
“승현이 아빠가 그런 이야기를 참 자주 했어요.”
“…그래?”
“그럼요.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부 손님들이 오면 그 자리에 사촌 형제들 데리고 다니면서 일일이 소개도 시켜 주고 하셨잖아요. 따지고 보면 민규 도련님 결혼식 날 저기 우리 승현이 아빠하고 정훈이 도련님이 민수 도련님하고 문제 생겼을 때도 아주버님이 만든 자리에서 서로 오해가 생겨 그렇게 됐던 거잖아요.”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 날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원수경의 모습에 배씨 집안 장녀는 힘들게 표정 관리를 했다.
“아주버님은 어떠세요?”
“뭐가?”
“민규 도련님 면회는 한 번씩 가고 그러세요?”
“한 번 갔어. 자주 갈 형편은 아니지. 그리고 작은아버님이 길게 받으셨지 민규 도련님은 1년이잖아. 조만간 나올 건데, 좋지도 못한 자리에 자주 찾아가서 뭐 하겠어.”
“민규 도련님은… 나와도 그렇겠어요.”
“그렇지.”
“저희 집안 원망 많이 하고 있겠어요?”
배씨 집안 장녀는 혹여나 자신이 말실수라도 할까 봐 최대한 그에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입을 닫으려고 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손위 동서에게 원수경이 다시금 바람을 넣었다.
“아주버님도 아까 안에서 말씀하신 거처럼 마음이 많이 불편하실 거 같고.”
“…….”
“이런 거 보면 사는 게 뭔가 싶어요. 도대체 사업이 뭐라고 가족끼리, 사촌 형제들끼리… 형님.”
“응?”
“저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그럼.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서 그랬지, 내가 동서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
“저도요. 저도… 가족 행사 있을 때마다 형님하고 따로 이야기도 나눠 보고 싶고 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어요. 앞으로 제가 연락 자주 드릴게요. 우리가 이런 자릴 자연스럽게 자주 만들어야 아주버님이나 우리 승현이 아빠도 편하게 자주 만나지죠.”
“그렇지.”
* * *
월요일, 재경 그룹 본사 로비.
직원들 출근길인 본사 로비는 부서 확인을 위한 층별 사이니지 교체로 평소보다 더 붐비고 있었다.
세 명의 시설부 직원이 긴 A자 사다리를 이용해 부서 사이니지를 교체 중이었다.
모직을 제외한 전 계열들의 사이니지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우선 항공.
지주사 항공의 사이니지 아래로는 다시 항공과 통신의 이름이 들어갔다.
식품.
가공품 사업과 외식 사업으로 분리가 되었다.
스너프.
커머셜 사업부와 유통 사업부, 온라인 금융 사업부,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로 분리가 되었고,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는 다시 영상화 사업부와 스크린 골프 사업부로 세밀화되었다.
출근길이 바쁜 다른 직원들과 달리, 그 앞으로 한가하게 뒷짐을 지고 있는 한 남자.
조동희 전무였다.
사이니지 교체를 즉각 지시한 게 바로 조동희 전무였다.
그는 그룹 본사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가장 먼저 부서별 사이니지 교체부터 지시했다.
도대체 본사에서 임원 자리에 앉아 뭣들 하고 있는 거냐며, 회장님이 계신 자리에서 본사 그룹 임원들을 향해 날 선 비난을 날리고, 그 자리에서 즉각 사이니지 교체를 지시하면서 손 회장의 권위에 힘을 실었다.
사이니지 교체가 썩 마음에 드는 듯 뒷짐을 지고서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던 조 전무는 이만하면 됐다는 식으로 말없이 엘리베이터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조 전무 뒤로 두 명의 수행 비서가 함께했고, 그중 한 명이 얼른 걸음을 빠르게 옮겨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층을 누르는 수행 비서에게 조 전무는 회장님을 먼저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그에 수행 비서는 얼른 카드를 층수 버튼에 갖다 대고 조 전무의 사무실이 있는 층을 취소시킨 뒤 회장실이 있는 층 버튼으로 바꿔 눌렀다.
“출근하셨습니까?”
회장실로 들어서는 조 전무의 모습은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런 조 전무를 맞는 손 회장의 모습 역시, 드디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있어야 할 사람이 왔다는 듯 편하고 안정적이었다.
“왔어? 이쪽으로 앉아. 아까 로비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직원들 출근하는 모습 좀 보고 있었습니다. 월요일 출근치고는 다들 표정이 좋던데요?”
“하여간….”
“사이니지 교체 끝냈습니다.”
“나중에 점심 하러 내려가면서 한번 봐야겠네. 그런 걸 왜 일일이 챙기고 앉아 있어? 교체하라고 시켰으면 끝나는 거지.”
“그런 거라도 차근차근 간섭하면서 준비 운동 하는 거죠. 저도 요 몇 년 본사 생활을 안 해 봤다고 낯선 부분이 꽤 많이 생겼네요. 하하하.”
“낯설 게 뭐가 있어? 사람 몇 명 바뀐 거 말고는 다 그대로지.”
두 사람은 커피를 받고 한참 동안 사업 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손홍준 회장이 조 전무에게 장난을 걸듯 물었다.
“혼자 준비 운동 하겠다고 긴장을 불어넣고 있는 거 보니까 자네도 그간 계열사들 돌아다니면서 몸이 많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야?”
“그럴 틈이나 있었습니까, 어디. 모직에선 모직대로, 식품에선 다시 또 식품대로… 손 상무한테 계속 그렇게 끌려만 다녔는데, 거기에 속도 맞춰 보겠다고 식겁을 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데요. 하하하.”
“엄살은. 자네, 그…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나?”
“아뇨, 이번 주는 좀 러프하게 일정을 받았습니다.”
“잘됐네. 점심도 따로 약속은 없지?”
“네.”
“그럼 여기서 나랑 커피 한잔하고, 자네는 통신 한번 넘어갔다 오지.”
“통신이요? 저 혼자요?”
“나도 같이 갈까 했는데, 자네가 가면 되지, 굳이 나까지 같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네. 괜히 내가 같이 가면 자네 잔소리만 약해지는 거고.”
잔소리만 약해지는 거고?
가서 긴장을 좀 넣고 오란 말씀이신가?
조동희 전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가서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정훈이 말이야.”
“네.”
“지금 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프로젝트 끝나는 대로 통신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어?”
이미 손 회장의 생각은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것 같았다.
조 전무 역시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프로젝트라는 게 보는 관점에 따라 끝이 다른 거니까요. 론칭 자체를 결과물로 보느냐, 아님 론칭 성과까지를 결과물로 보느냐에 따라 인사이동 시기를 잡아야 할 거 같은데….”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면 되는 거고, 일단은 그런 식으로 방향을 잡아 놓고 통신 쪽 내년 영업 기획을 준비하도록 만들어 봐. 통신 거기는 내가 지금 일부러 크게 관여를 안 하고 있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당장은 항공이 안고 있으니까 마이너스가 나도 적당한 커버는 될 거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가서 잘 한번 둘러봐. 당장은 마이너스가 나도, 명색이 한때엔 부경의 양대 기둥 중 하나였어. 그 안에 자체 체계라는 게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야.”
“네.”
“그리고 시기적으로 언제쯤 정훈이를 보내면 좋을지도 한번 따져 보고.”
그에 조 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통신은… 아직 손 사장도 경험을 못 해 본 분야인데, 손 사장도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손정훈 상무의 생각일 뿐, 이건 조 전무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조 전무의 조심스러운 생각에 손 회장은 말 없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고작 경험 때문에 지금 잘나가고 있는 스너프 사장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거 아냐.”
조 전무의 생각 역시 손 회장과 같았다.
그런데….
“하긴, 그것도 내가 전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냐.”
“어떤….”
“정태한테 통신 경험을 시켜 주고, 그동안 정훈이한테 스너프를 맡아 보라고 하는 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