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52화 (252/303)

252화 나만 알고 있었나?

“저희 쪽으로요?”

오후 3시가 이제 막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차 한 잔을 내려놓고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태산이한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던 참이었다.

요즘 내가 태산이한테 이틀에 한 번꼴로는 꼭 전화를 건다.

나이 들어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혼자 집에 있으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나.

건강도 건강이지만, 말 상대해 주는 사람도 없어 많이 적적할 텐데, 이럴 때 나라도 전화를 걸어 짧게 말 상대를 해 주는 거지.

그렇게 태산이한테 전화를 한번 걸어 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조동희 전무한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오는 거였다.

그러면서 지금 통신 본사에 와있는데,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다며 지금 식품 본사로 오면 나한테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냐고 묻네.

그룹 본사 전무씩이나 맡고 있는 사람이 말 그대로 차 한잔 얻어 마시겠다고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닐 테고….

―회장님께서 한번 가 보라고 하셔서 넘어와 있는데, 회장님은 또 자리에 안 계신다고 하네요? 그룹 본사 들어가도 회장님을 뵙는 건 힘들 거 같고, 여기에서 바로 퇴근을 하자니 시간이 너무 이르고. 하하. 그냥 겸사겸사 본부장님 자리에 계시면 넘어가서 차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해서요.

통사 본사?

거길 갔다고?

뭔가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으니까 보자고 하는 거겠지.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이 친구가 양심은 있다.

완전 뻔대라고 생각을 했는데,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 차 한 상자를 가지고 찾아왔다.

“본부장님 덕에 차 마시는 취미를 붙였다고 하니까, 집사람이 이걸 어디서 구해 왔네요. 이거 맞지요, 본부장님 드시는 차.”

“그렇네요. 근데 이건 선물용이네. 포장이 과한데?”

“내용물만 같으면 되는 거지요. 차에 싣고 다니길 잘했어요. 언제 만나지면 드려야지… 하면서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오늘 시간이 나네.”

“앉으세요.”

직접 차를 내려서 한 잔 대접한 뒤에 나는 아까 마시던 차에 뜨거운 물만 새로 부어 조 전무를 마주 보고 앉았다.

“통신 본사는 좀 어떻습니까?”

“잠깐 들러서 사장 얼굴만 보고 온 건데요, 뭐.”

“그래도 새로 빌드 업 되고 있는 내용은 전해 들은 게 있으실 거 아닙니까.”

“통신 쪽이 생각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네요.”

그래?

통신 쪽이 보수적이라고?

이건 또 의외네.

“그래요?”

“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 당연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밖에서 보기엔 예민하고 정교해 보여도 결국 우리가 하는 건 통신 서비스 유통인 거잖아요.”

“그렇죠.”

“하루아침에 큰 변화를 주기가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직접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집중하고 있는 사업들 대부분이 소프트웨어적인 부분보다는 하드웨어적인 부분이 많은 거 같고.”

“하드웨어적인 부분이라고요? 통신에 무슨 하드웨어적인 부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단말기를 파는 것도 아니고.”

“굳이 표현을 하자고 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서비스 자체가 소프트웨어적인 사업의 영역이긴 하나, 이미 통신 서비스업 자체가 하나의 정형화된 틀이 있다 보니까요.”

그런 의미라면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적인 부분이 맞는다고 봐야지.

“그리고 아직 내부적으로 교통정리가 끝난 게 아닙니다. 혼선이 많아요. 그렇다고 내부 혼선을 그룹 본사가 직접 관여해서 정리를 하기도 애매하고.”

“애매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필요하면 억지로라도 정리를 해야죠.”

“그러기엔 그룹 본사가 직접 움직여야 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거 같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심각성에 무슨 정도가 있습니까? 소 다 잃고 외양간 고쳐 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문제라는 건 눈에 보일 때 바로바로 처리를 해야지.”

“우선은 회장님도 그렇고, 그룹 본사 차원에서 올 하반기까지는 기존 시스템대로 흘러가는 결과물을 지켜만 보자… 그러고 있는 중인 거 같아요, 직접 그룹 본사에 올라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참 일들 하는 거 보면 잔소리를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하는데도 꼭 입을 대게 만든다.

좋다.

일단 통신 관련해선 당분간 신경을 쓰지 말자.

월권을 할 것도 아니고, 못마땅하지만, 당장은 식품에만 집중해서 정엽이, 정태가 동생이 만들어 내는 활약에 자극을 받을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게 우선이다.

우선은 그러냐는 식으로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 * *

우린 자리를 태화장으로 옮겼다.

4시 반쯤 이른 퇴근을 하고 태화장에 도착을 하니 다행히 아직 저녁 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거의 빈자리뿐이었다.

일전의 방문으로 이젠 내가 재경가 차남이란 사실을 알게 된 그곳 사장이 직접 카운터를 돌아 나와 자리를 안내했다.

나와 조 전무는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 전무가 먼저 자신이 통신 본사를 찾은 진짜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생각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제 생각이요? 무슨 생각이요?”

“식품엔 언제까지 계실 생각이십니까?”

어쩌면 조만간 통신 쪽으로 인사 발령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야 당장은 그룹 본사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에이, 저한테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식품은 어디 그룹 본사에서 가라고 해서 오신 겁니까? 본부장님이 식품 쪽으로 생각을 정하시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야 그때는 모직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다 채웠고, 또 거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충 다 한 거 같았으니까요.”

“그럼 아직 식품에서는 하실 일이 더 남아 있다는 정도로 제가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난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일에 끝이 어디에 있습니까? 찾아보면 계속해서 나오는 게 일이라는 건데. 최소한 고비드까지는 자리가 잡히는 걸 직접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일 벌이는 거야 누가 못 합니까?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기 위해선… 당분간은 이동 권유가 없었음 하는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그렇군요.”

“왜요? 전무님더러 절 통신 쪽으로 이동시켜 보라고 하시던가요?”

그에 조 전무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김없이 말했다.

“기본적인 회장님 생각은 그러신 거 같습니다. 그룹 전체적으로 놓고 봐도 통신이 가장 취약한 상황인 건 확실하고, 그간 모직과 식품에서 본부장님이 보여 주신 결과물이 있다 보니까, 본부장님이라면 그 비슷한 성과를 통신에서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계시는 눈치셨어요.”

지금 홍준이가 하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그렇다?

“전무님 생각은요?”

“그때도 한번 말씀드렸다시피 제 생각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쭉 그러했고, 앞으로도 회장님 곁에서 회장님이 생각하고 그리신 밑그림에 충실히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적극적이신데요?”

“제가요?”

“절 만나러 여기에 오신 게 회장님 생각은 아니실 거 아닙니까.”

“…….”

“거리로 치자면 통신 본사에서 여기보다 스너프 본사가 훨씬 더 가깝고. 차 선물은 핑계이신 거 같고, 전무님이 저한테 따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신 것도 아주 예외적인 일이죠. 저한테 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 같은데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뭘 또 우리끼리 허수를 두고 그러십니까? 하하.”

결국 조 전무의 입에서 최근 홍준이가 하고 있는 생각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회장님께서는 지금 이 상승세를 굳히고 싶어 하십니다.”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여 줬다.

“이 상승세를 굳히기 위해선 미래금융과의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무엇보다 후계 문제가 빠른 시일 내로 안정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세요.”

“그래서 결국 회장님의 마음은 저다, 이 말씀 아니십니까?”

“본부장님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계신 건 사실입니다.”

“그걸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세요? 제 입장에선 듣기 좋은 소리잖아요.”

“허허, 참. 어느 장단에 맞춰 드려야 됩니까, 제가? 언제는 저한테 손정태 사장의 가능성이 본부장님 눈에만 보이는 거냐고 실망스럽게 쳐다보셔 놓고는.”

“실망도 처음 할 때나 실망인 거지, 그런 감정이 두 번, 세 번 계속 이어지면 그게 더 이상 실망이겠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이는 거죠.”

후계 문제에 있어선 나도 사실 거의 포기 상태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렇게 급하게 뭔가를 결정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홍준이 입장에선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내 욕심만을 챙기려 할 수 있겠나.

내 욕심만 챙기는 건 손중길이었을 때 이미 충분히 해 보지 않았나.

홍준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그려 놓은 그림도 같이 봐 주고 싶다는 생각.

홍준이가 펼치고 싶어 하는 재경의 모습을 애비로서 함께 지켜봐 주고 싶기도 했다.

난 이미 해 봤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난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애비로서 홍준이에게 못 해 준 게 너무 많다.

미안하지.

그래서 홍준이가 만들어 보고 싶어 하는 재경에 힘을 보태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홍준이가 저렇게까지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확신을 내가 무슨 수로 사라지게 만들겠나?

자기 확신 안에서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큰 만족이고, 설렘인지 다 알고 있는데.

다만 내 욕심이 그런 홍준이의 확신을 아쉽게 보는 거뿐, 결국은 미래 재경의 후계에 대한 홍준이의 눈이 정확한 거라 봐야 하는 건데.

내가 홍준이라도 첫째 정태보다는 둘째 정훈이를 선택할 거 같다.

어쩌겠나, 최근 몇 년간 보여 준 성과물이 다른데.

그래서 나도 내 욕심, 내 고집을 조금 내려놓고 생각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중이다.

정 홍준이가 그렇게 후계 문제를 정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빠르게 정리가 되게끔 만든 다음 재경을 장악해 놓고 정태, 정엽이가 가진 능력 안에서 새로운 분배를 해도 되는 부분이니까.

결국 중요한 건 집안 나눔이 재경의 성장의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다.

하지만….

물론 지금 나는 홍준이의 결정, 앞으로 펼쳐 나갈 인사에 힘을 실어 주고 그 결정에 최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지지를 할 생각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엽이와 정태가 각자가 가진 욕심을 현실화시켜 내는 모습, 욕심과 더불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컸다.

“요즘 회장님이 손정태 사장 말고, 형수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죠?”

“그걸 본부장님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저희 집안일인데, 전무님도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을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본부장님 쪽으로 마음이 크게 기울어 계신 거하고 그 내용이 관련이 있는 건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건 회장님 본인만 아실 내용인 거고요.”

나도 조 전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홍준이가 그릇이 아예 작은 놈도 아니고, 특히나 집안 장남에 후계 관련된 일을 결정하는 데 그만한 일로 좌지우지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원수경이가 홍준이의 눈 밖에 날 짓들을 자주 하고 돌아다니는 건 사실인 거 같고.

장혜란이를 찾는 발길이 잦다지?

그건 이미 정태를 통해서도 직접 들은 내용이 있으니, 사실일 거다.

거기다 재계 며느리들끼리 모여서 만든 모임이 있다는데, 거기에도 최근 들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릴 내가 들었다.

“실은 회장님께서 최근에 손정태 사장의 움직임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손정태 사장의 움직임이요? 어떤 움직임이요?”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거의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최근 들어 조양 그룹 최영대 부회장하고 개인적인 자리를 자주 가지는 거 같습니다. 원래 손정태 사장은 그런 사적인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는 걸 안 좋아하는 편이었거든요.”

“필요하고, 그게 재경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해야죠.”

“회장님 생각은 그러신 거 같습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인맥 넓히는 데 관심이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오히려 사업 외적으로 그런 사적인 자리를 가지는 걸 극도로 꺼리던 사람이 한순간 그렇게 바뀌니까….”

“형수가 시켜서 하는 거다?”

“뭐 꼭 시켜서 한다기보다는… 내조를 그런 방향으로 하는 거처럼 보이니까 회장님이 걱정을 하시는 거죠.”

걱정?

걱정이라….

나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그간 장혜란이가 해 왔던 내조에 홍준이가 얼마나 숨이 막혀 왔을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혜란이가 그런 걸 참 열심히 잘했던 거 같다.

그건 내가 인정을 한다.

그걸 다시 원수경이가 정태를 상대로 하고 있는 거 같으니, 그게 안 좋게 보이는 걸 테고.

“전무님 생각은 어떠세요?”

“왜 아까부터 계속 제 생각을 물어보십니까? 제 생각이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왜 전무님 생각이 안 중요합니까? 현재 재경 안에서 전무님만큼 회장님과 가깝게 자리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

“전무님 생각에도 형수가 그런 모임에 손정태 사장을 데리고 함께 참석을 하는 게 문제라고 보십니까?”

다행스럽게도 조 전무의 생각은 단단했다.

“그런 모임 자체가 문제 될 건 없죠. 본부장님 말씀대로 필요하고, 그게 재경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하기 싫더라도 해야 하는 거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걸 왜 회장님께서 걱정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부분은 형수가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다만 그런 모임에 본격적으로 참석을 하기 시작한 게 회장님과 사모님이 별거를 하시기 시작한 직후부터였다는 게 좀… 걸리는 거죠.”

나만 알고 있었나?

원수경이가 보기하고 다르게 깜찍한 아이일 거라는걸.

난 그냥 첫 만남부터 서글서글 웃는 두 눈에 담긴 욕심부터, 그 욕심을 위해선 뭐든 할 것 같은 근성 같은 게 바로 보이던데?

“그리고 회장님께서 손정태 사장 집에 찾아가서 좋지 못한 모습을 직접 보셨잖아요.”

“아, 그때 그거요?”

“네.”

“참 진짜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그런 모임에 계속해서 참석을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니까, 회장님 입장에선 이게 혹시라도… 그… 일종에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로 작은 사모님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손정태 사장을 상대로 가스라이팅 같은 걸 하고 있는 아닐까… 그런 의심을 하고 계시는 거죠.”

가스라이팅?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가스라이팅이요? 형수가 그것도 손정태 사장을 상대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