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내 손주니까
“왜… 그렇게 웃으세요”
조동희 전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이네.
아, 이건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어쨌거나 자기 자식뻘 정도밖에 안 되는 내가 자신을 앞에 앉혀 놓고 이런 웃음을 보이는 건 실수가 맞는 거 같다.
하지만 웃긴 걸 어쩌라고.
정태가, 아니 원수경이가 정태를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해?
아이고, 이 친구야….
자네도 아직 많이 멀었다.
좀 치나 싶더니, 이런 타이밍에 날 또 실망을 시키네.
그래, 이해한다.
어떻게 자네가 나보다 더 나의 재경을 생각할 것이고, 나보다 더 내 새끼들을 자세히 보겠나.
자네 정도면 충분히 홍준이 곁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다.
예의 없는 웃음으로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게 조금은 미안해서, 두 손으로 조 전무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조금 웃겨서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자주 쓰는 표현 아닙니까.”
“누가 쓰든 웃긴 건 웃긴 거죠. 그리고 최소한 우리처럼 우리 물건을 만들어서 그 물건을 조금이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해, 소비자들에게 파는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최대한 안 쓰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째서요?”
“이 세상에 영업이 아닌 게 어디에 있고, 가스라이팅이 아닌 게 어디에 있습니까? 채서린이한테 시니어즈를 입혀서 소비자들에게 ‘자, 이거 봐라. 이거 채서린이가 입은 거다. 우리 대한민국 브랜드인데, 이게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패션의 중심지 파리 방돔에 단독 부티끄도 있을 정도로 유러피언 감성을 자극하는 오리엔탈 브랜드이다.’ 이건 가스라이팅인 겁니까, 아닙니까?”
“그건….”
“그럼 벼락거지라는 단어는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평생 내 집 마련의 기회는 없다. 평생 미련하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아등바등 살며 모아 봐라, 티끌 모아 티끌일 뿐. 어디 아파트는 1년 사이에 5억이 올랐다더라, 7억이 올랐다더라… 지금이 바로 영끌을 할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끌을 해 볼 기회조차 없다. 비트코인은요? 주식은요?”
“다릅니다.”
“아뇨, 같습니다. 사람은 다 누구나 자신만의 계산이 있고, 그 계산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욕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타인의 계산과 욕심을 인정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엔 분명 큰 차이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요. 저나 전무님이나, 어쨌거나 우린 대한민국이 이뤄 낸 시장 경제 안에서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타인의 계산과 욕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회장님께서 그런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지금 걱정이 되는 겁니다. 도대체 왜 믿지 못하시나….”
“믿지 못하시다니, 뭘 말씀이십니까?”
난 소주 반 잔을 잘라서 마신 후 그 잔을 내려놓고 조동희 전무를 빤히 쳐다봤다.
“손정태 사장이요. 손정태 사장이 가스라이팅을 당해요? 하, 하하하….”
내가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 버리자, 조 전무는 그제야 조금 전 내게 보였던 불쾌한 표정 대신 혹여나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있지 않을까… 그런 표정으로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의심을 잠시 했었습니다.”
첫 만남에 원수경이의 눈빛이 너무 살아 있었거든.
그에 비해 당시 모직 인사부에서 들었던 정태의 평판이 살짝 의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겪어 보니까 확실히 내 손주더라.
“그런데 전혀 그런 거 아니에요. 자기 기준이 확실한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자기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은 자기 눈에 시니어즈 제품이 예뻐 보였다면 모를까 채서린이가 입고 나왔다고 해서 주관 없이 그 옷을 사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코로 숨을 내뿜기 시작한 조 전무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 티끌 모아 티끌. 하지만 정직하게, 우직하게 자기 자신을 믿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벼락거지, 영끌, 비트코인, 주식…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릴 정신이 없죠. 자기 속도를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기 바쁜데. 그리고 그렇게 미련하게 나아가서 성공을 한 사람들은 성공을 하기 전부터 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만큼 비싼 건 없다는 걸. 그리고 자신들을 미련하다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어리석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기 속으로만 하는 거죠.”
“…….”
“손정태 사장은 자기 기준, 자기중심이 확실한 사람이에요. 그게 설혹 회장님일지언정,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고집이 대단해요. 그 기준, 중심이 유별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인데 최소한 다른 사람 말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가스라이팅이라는 건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사람이 하위에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거 아닌가요?”
재빨리 물어봤다.
“전무님이 보시기엔 손정태 사장이 형수 밑에 있는 거 같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절대 아닙니다. 어쩌면 진짜 가스라이팅은… 형수가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손정태 사장이 형수를 상대로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손정태 사장이요?”
“아주 능해요, 그런 쪽으로.”
“누가, 손 사장이 말입니까?”
도통 모르겠단 표정으로 조급하게 묻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내가 정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를 짧게 말해 주었다.
원래라면 내가 이런 말까지 조 전무 이 친구 앞에서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젠 그룹 본사 생활을 다시 하면서 홍준이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무엇보다 내 다음 인사지를 살펴보겠다고 통신 본사까지 다녀온 친구 아닌가.
틀림없이 오늘 이 식사 자리도 홍준이의 귀에 들어갈 거다.
홍준이가 알아야 한다.
지금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는 정태에게 어떠한 능력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지를….
“그게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부경통신의 장민규. 장민규 결혼식 날 그 피로연장에서 제가 장민수 옷에 와인을 일부러 쏟았어요.”
“파장이 대단했죠. 결국 우리 재경에서 전사적인 보이콧을 강행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회장님께서 전 계열 사장단을 다 불러서 긴급회의를 여실 정도로 긴박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 사실 나는 홧김에 장민수 옷에 와인을 쏟은 게 아니었다.
그 정도 도발이 뭐시라고.
내가 재경을 일으키는 동안 그보다 더 심한 도발, 굴욕을 맛보지 않았겠나.
훨씬 더 심한 도발과 무시, 굴욕, 비참함을 웃는 얼굴로 견뎌 내며 일으킨 게 바로 나의 재경이다.
하물며 장민석이, 장민수처럼 깜냥도 안 되는 녀석들의 눈에 빤히 보이는 수준 낮은 도발을 견디지 못해 내 성격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때 나는 그저 궁금했었다.
도대체 우리 재경이 얼마만큼 썩어 있는지, 얼마만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그걸 알아야 잘라 낼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 내고, 포기할 부분은 포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고작 부경.
그 부경에서 만든 피로연장.
그 피로연장에 있었던 하객 대부분은 장민석이의 인맥이었다.
철저한 부경의 판이었지.
과연 내가 고의로 와인을 쏟아 문제를 만들어 내면 우리 재경을 상대로 부경이 어떠한 공격을 해 올지, 그리고 그 공격에 재경과 홍준이가 어떠한 대응을 해낼지 궁금했었다.
그것만 봐도 그간 우리 재경과 부경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거니까.
고작 부경을 상대로, 그 정도 시비도 무마를 못 시켜 낸다면 대기업이란 간판을 내려야지.
오너가 자식 하나 보호를 못 하는 조직이 무슨 수로 직원들을 보호할 수 있겠나.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조직 안에서 무슨 수로 직원들이 앞뒤 안 재고 들이박고 밀어붙이는 공격성, 야수성을 만들어 낼 수 있겠나.
그건 내 기업관 안에선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때 손정태 사장 표정을 전무님이 옆에서 보셨어야 됩니다.”
봤다고 한들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느꼈을 리는 없겠지만.
“어땠는데요?”
“드디어 때가 온 건가… 딱 그 표정이었어요.”
“때가 왔다니요?”
“언제든 부경과 붙을 준비가 되어 있었단 말이죠, 손정태 사장은.”
“……!”
“그저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거뿐입니다. 아직도 우리 재경이 부경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 그 중심에 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마치 아직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대화 흐름상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듯 조 전무는 간질거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제가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서 결론적으로 부경을 잡는 게 빨라지긴 했지만, 아마 제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망나니처럼 출근을 했어도 우리 재경은 손정태 사장 손에 의해 부경 정도는 금방 따라잡았을 겁니다. 만약 그날 제가 장민수의 옷에 와인을 쏟자마자 손정태 사장이 저랑 같이 안 싸워 주고 꼬리를 내렸다면요?”
“…….”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상대가 부경이고, 부경의 홈그라운드, 거기에 부경의 파트너들이 다 모인 자리였는데 꼬리를 내리는 게 뭐가 흠이 되겠어요? 보기에 따라선 싸우는 게 미련한 거고 말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손정태 사장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싸우더란 말입니다. 남들 눈엔 그저 객기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제 눈엔 우리 재경을 얕잡아 본 부분에 대한 응징을 해 주겠단 의지처럼 보였어요.”
“흐음….”
“만약 그때 손 사장이 꼬리를 내리고 절 구슬려서 저더러 사과를 하라 그 정도 선에서 상황을 무마시켰다면, 그 해에 우리가 무슨 수로 부경유통이랑 싸워 그 절반을 가져올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
난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전무님이라도 객관적으로 보셔야 해요. 직접 앞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그동안 손 사장이 뒤에서 한 백업들을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간 손 사장이 스너프를 그렇게 빠른 속도로 키워 내며 제대로 된 백업을 해 주지 못했다면 비록 미래금융이라는 든든한 파트너가 옆에 있긴 했지만, 우리 재경이 우리 힘으로 부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지도 생각을 해 보셔야 돼요.”
“후우….”
“손정태 사장에 대한 전무님의 생각, 걱정, 의심… 오늘 이 자리에서 종식시키는 걸로 합시다. 이게 무슨 코로나도 아니고, 왜 자꾸 반복을 하십니까? 더는 똑같은 이야기 반복하지 말자고요. 무조건 자기 사람일 거라고 믿었던 전무님까지 이제 제 옆에 서 계신데, 손 사장… 지금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 지금 이 외로운 싸움을 어떻게든 버텨 보려면 옆에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줄 가족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자기 술잔을 말끔히 비운 조 전무.
그런 조 전무에게 내가 말했다.
“그동안 백업만 해 왔던 손 사장이 본격적으로 공격이라는 걸 해 보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거 같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곧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번엔 잘 좀 지켜보세요. 그동안 전무님이 발견하지 못했던 손 사장의 치밀함과 근성, 그리고 기획력. 언제 저한테 손 사장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항상 제가 하고 있던 걱정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스너프를 저렇게까지 완성형으로 키워 내고 있는 사람이 감정적이고 즉흥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바닥에 이미 치밀한 계산과 기획이 다 깔려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계산과 기획을 바탕으로 때론 폭력적인 모습을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보여 주기도 하고 감정적인 상황을 교묘하게 만들어 가는 거죠. 벌써 저 나이에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라고요, 손정태 사장이.”
“벌써 저 나이라니요. 하하. 모르는 사람이 들었음 본부장님이 형인 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약하게 보지 마세요.”
“……!”
“제 눈에는 현재 우리 재경 안에서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 바로 손 사장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전무님까지 손 사장에 대해 함께 의심하고, 걱정하고… 평가 같은 거 하지 마시라고요.”
내 손주니까.
* * *
조양 그룹.
시가 총액 158조.
국내 재계 서열 3위.
국내 최대 석유 기업인 조양오일을 지주사로 두고 있으며 반도체 사업인 조양하이엔드, 그리고 금융의 조양카드가 각각 업계 1위 자리를 십수 년째 유지해 압도적인 현금 동원력을 가진 기업이다.
비록 재계 서열 1, 2위와의 시총 격차는 크게 벌여져 있지만, 정유 사업의 조양오일과 조양하이엔드, 그리고 조양카드라는 막강한 조양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일각에선 국내 유일의 절대 망할 수 없는 완벽한 포트폴리오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거기에 국내 재계 서열 5위의 계성 그룹 고명딸, 설유림이 맏며느리로 버티고 있다는 부분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철옹성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철옹성도 그 내부로 들어가면 구멍이 보이기 마련.
장자 승계 원칙에 의해 진작에 그룹의 후계자로 지목이 되었고, 처가의 폭발적인 지원으로 부회장 자리에 앉은 최영대 부회장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바로 동생들이 계열사 지분을 놓고 일으키고 있는 반발.
철저한 장자 승계 원칙에 의해 장남 최영대 부회장에게 일방적인 지분 상속을 진행하고 있는 아버지, 최호경 회장을 상대로 동생들의 불만이 위험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 최영대 부회장에게 재경 그룹의 장남이자 현 스너프 플랫폼의 사장 손정태는 최근에 사귄 아주 잘 통하는 친구였다.
첫 만남은 아내 설유림을 통해서였다.
설유림이 자주 자리를 하는 친목 모임에 손정태 사장의 아내 원수경이 들어가면서부터 그 만남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손 사장. 내가 좀 늦었지요.”
JK 드 누락 강남점의 일식 오마카세 업장, 모토야마.
먼저 와 자리를 맡아 두고 있던 손정태 사장은 최영대 부회장의 목소리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걸어오는 쪽으로 몇 걸음 미리 다가갔다.
그런 손정태 사장에게 최영대 부회장이 반가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금방 오긴 뭘 금방 와요. 안내받아 오면서 여기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20분도 더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던데.”
“약속 시간보다 제가 15분 먼저 도착한 거뿐입니다. 부회장님은 딱 코리안 타임을 지켜서 오신 거고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