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55화 (255/303)

255화 참 말 많이 시켜

JK 드 누락의 나주석 본부장은 명실상부 업계 베테랑이었다.

15년 차 호텔리어.

스위스 호텔학교를 졸업해서 객실팀 주임으로 첫 국내 호텔리어 생활을 시작했고, 3년 차 대리 때부터는 현장 업무가 아닌 당시 부경호텔 오너가의 눈에 들어 오너 사이드(직계)에서 외국인 총지배인들을 상대하는 일들을 주로 맡아 왔다.

한 학기 등록금만 4천만 원.

다행히 스위스 호텔학교 시스템은 1년에 한 학기만 학업을 하고 다른 한 학기는 현장 실습으로 대체되는 시스템이라 자신만 절약을 한다면 6천만 원 내외로 1년 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본 생활비와 현지 물가 등을 감안해, 스위스 호텔학교 졸업장을 얻기까지 3억 가까운 돈을 부모님께 부담시켜야 했던 나주석 본부장은 정말 치열한 각오로 호텔 생활을 시작했다.

겉만 화려하지, 그 내부로 들어오면 박봉 중에서도 최고 박봉인 호텔업.

엘리트 코스를 밟은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과 3억이라는 돈을 쓰고 부경호텔에 입사를 했지만, 주임으로 첫 호텔리어 생활을 시작한 나주석 본부장 손에 떨어지는 실수령액은 200만 원이 채 되지 못했다.

정상적인 승진 코스라면,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7, 8년을 모아야 대학 졸업장을 사는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정말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다 모아야만.

본전을 뽑는 거 자체가 불가능한 게임.

당시 나주석 본부장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실적을 올려 부경호텔 오너 사이드로 들어가자.

비록 그게 자신이 4년 간 유학 생활을 하며 꿈꿔 왔던 호텔리어의 모습은 아닐지언정, 현실과 타협을 하지 않고 미련하게 꿈만 쫒기엔 현실이 너무 막막했다.

어느새 호텔의 실무보다는 부경호텔 오너가의 개가 되어 있었고, 호텔 안에서 주로 하는 업무는 외국인 총지배인과 오너가 사이에서 해 주는 통역이 전부였고 그 외엔 다 오너가 사생활에 관한 잡일들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의 오너가 바뀌었다.

그리고 자신이 출근을 해서 해야 되는 업무 역시 크게 바뀌어 버렸다.

“오후 미팅이 3시라고 했죠?”

“네, 대표님.”

나주석 본부장은 JK 드 누락의 손정엽 대표를 의전해 두촌점을 방문했다.

로비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앞으로 서둘러 다가온 그곳 컨시어지.

그녀의 얼굴에는 서비스 미소로도 다 숨기지 못하고 있는 긴장감이 올라와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대표의 불시 방문은 여전히 JK 드 누락의 전 지점 관리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컨시어지의 방문 인사에도 손정엽 대표는 성의 없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해 놓고 곧장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그사이 호텔 컨시어지는 빠르게 폰을 꺼내 손정엽 대표의 불시 방문을 상부로 보고했다.

제이와이.

이제는 그 존재 자체가 JK 드 누락 안에서는 공포가 되어 있었다.

“오늘 객실 아큐파이는 어떻게 됩니까?”

얼음보다 차가운 대표의 물음에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객실팀 직원은 시작부터 주눅이 들어 버렸다.

“68퍼센트입니다.”

“전날 놀았던 객실 중에 아직 고객 체크인 안 된 객실 타입별로 하나씩, 방 키 까 주세요.”

총 다섯 개의 객실 카드를 대신 건네받은 나주석 본부장은 익숙하게 손정엽 대표를 엘리베이터 복도 쪽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사이 JK 드 누락 두촌점은 초비상 상태로 돌입을 하고 있었다.

제이와이의 불시 방문도 긴장을 해야 하는 사안인데, 객실 정비 상태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객실 카드를 받아갔다.

작정을 하고 털겠다는 소리였다.

JK 드 누락 두촌점은 외국인 총지배인은 물론이고 객실팀 팀장까지 손정엽 대표가 이동 중인 객실로 모여들고 있었다.

똑. 똑.

“하우스 키핑입니다.”

전날 놀았던 객실.

그리고 아직 고객 체크인이 이뤄지지 않은 객실.

그럼에도 객실 카드를 들고 있는 나주석 본부장은 손정엽 대표가 항시 강조하는 서비스 스탠다드대로 객실 문을 노크 후 ‘하우스 키핑’이라는 말로 객실 안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객실이었다.

잠깐의 텀을 두고 다시 한번 노크 후 ‘하우스 키핑’을 외친 나주석 본부장은 그제야 객실 카드를 문고리 마그네틱에 붙여 객실 문을 열었다.

그런 나주석 본부장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먼저 객실 안으로 들어선 손정엽 대표는 객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자동으로 펼쳐져야 하는 창문 커튼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모습에 말없이 나주석 본부장을 쏘아봤다.

그에 나주석 본부장은 얼른 창가 쪽으로 뛰듯이 걸어가서 천장에 달린 센서를 향해 팔을 두세 번 휘저었다.

그러자 그에 반응한 센서가 빨간불을 한 차례 깜빡거렸고 커튼이 자동으로 벌어지며 탁 트인 두촌 시티 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빛을 감지하는 거지, 사람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확인, 제가 하기 전에 본부장님이 먼저 하실 순 없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손정엽 대표는 더 이상 커튼 센서에 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수첩을 꺼내 든 나주석 본부장의 손놀림은 더없이 빨라지고 있었다.

객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손정엽 대표.

그리고 그런 손정엽 대표 뒤를 바싹 붙어 따라다니며, 혹여나 객실 정비에 미스가 난 건 없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함께 살피기 시작한 나주석 본부장.

그사이에 손정엽 대표의 방문을 보고 받은 외국인 총지배인과 객실팀 팀장이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그들의 앞에 등장했다.

손정엽 대표는 그들과 눈인사조차 교환하지 않았다.

그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 부스 내부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뿐이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샤워 부스 바닥에 만들어진 물 얼룩.

그 앞으로 쪼그리고 앉아 손정엽 대표가 객실팀 팀장을 불렀다.

“네, 대표님.”

“이쪽으로 잠깐 와 보세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자기 옆으로 객실팀 팀장이 다가온 기척만 느끼며 손정엽 대표가 물었다.

“이거 뭡니까?”

객실팀 팀장이 얼른 손으로 물 얼룩을 지우려고 하자, 그 손을 신경질적으로 막아 세우며 손정엽 대표가 말했다.

“손대지 말고.”

“…….”

“이거 뭔 거 같으세요?”

“…죄송합니다.”

엄지에 침을 묻혀 가볍게 물 얼룩을 지워 낸 뒤 손정엽 대표가 피식하고 웃었다.

“이거 드라이징 제대로 안 된 거죠?”

“…네, 그런 거 같습니다.”

“확인 안 합니까?”

“…….”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객실팀장을 뒤로하고 샤워 부스를 빠져나온 손정엽 대표는 객실 입구에서 긴장한 채 손을 모으고 있는 외국인 총지배인에게 영어로 말했다.

“당신. 여기 왜 있어요?”

“…….”

“어떻게 내가 직접 와서 객실을 까 볼 때마다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 줄 만한 수준의 컨디션 한 번을 못 만들어 내요? 이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총지배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처음 JK 드 누락 두촌점에 왔을 땐 FA 개념의 프리랜서 총지배인의 역할만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정엽 대표의 지나친 운영 간섭에 직접적인 마찰도 감수를 했고.

하지만 이젠 인정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가 가진 호텔 운영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는 자신의 변명이 통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업장 불시 방문이 수도권에 있는 업장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부산, 제주점까지 함께 이뤄진다는 부분에서 손정엽 대표가 보여 주는 괴물 같은 체력과 의지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서 올라오는 보고서 서류로만 업장 쪽으로 트집을 잡고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닌, 이렇게 전 업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문제점들을 그 자리에서 지적을 하는데, 그런 모습에 당해 낼 재간이 이곳 총지배인에겐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JK 드 누락의 모든 업장 외국인 총지배인들이 손정엽 대표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

바로 언어였다.

다양한 국적의 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외국인 총지배인들이 자주 써먹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던 거 같다는 핑계를 전혀 댈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 직원들 앞에서는 한국어로, 총지배인들 앞에서는 외국어로 언어를 정확하게 분리시키기 때문에 그가 한국어로 한국 직원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때엔 도대체 어느 부분을 어떻게 지적하고 문제로 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많은 국가를 옮겨 다니며 FA 개념으로 총지배인의 경력을 쌓아 온 그들이 손정엽 대표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였다.

“객실팀장님.”

“네, 대표님.”

“이 객실 어제 놀았죠?”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 확인할 필요 없어요. 놀았던 객실 맞아요. 요즘 황사 심하지 않아요?”

“…네. 심합니다.”

“그럼 상식적으로, 진짜 내가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말이에요. 창문은 좀 닫아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창문 닫아 놓고 에어클리너 시간별로 맞춰 놓고 돌려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

“혹시 뭐 요즘 전기세 많이 올랐다고 회사 생각해 주는 거예요? 마음은 고마운데, 팀장님은 회사 말고 고객 만족만 신경을 쓰세요. 이게 뭡니까, 이게. 잔에 먼저 앉아 있는 거 보이세요? 이 잔에 뭐 따라 마시고 싶으세요?”

“…….”

“그리고 지금 여기 이 부분. 여기 이거요. 이거 머리카락 아닙니까? 난 아무리 봐도 여자 머리카락인 거 같은데? 이 방 이거 36만 원짜리 방이에요. 입장을 바꿔 놓고 팀장님이 36만 원 주고 이 방을 하루 샀는데, 객실 문 열자마자 같이 열려야 할 커튼은 움직이지도 않아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시원하게 트이는 시티 뷰도 이 방 객실에 포함이 되는 거죠?”

“…네.”

“좋아요. 그런 내용을 모르는 고객도 많을 테니까. 그럼 우리가 방값 가지고 장난질하는 거지, 뭐.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샤워 부스에 생긴 물 얼룩은 어쩔 거고, 여기 이 유리잔에 앉아 있는 먼지들은 다 어쩔 거예요?”

JK 드 누락의 한국 직원들이 손정엽 대표의 방문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

“본부장님.”

바로 업장 운영에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실수를 해당 업장 관리자들이 아닌 나주석 본부장에게 따져 묻는다는 거였다.

“…네.”

“제가 언제 객실 컨디션 유지에 비용을 아끼란 말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객실 컨디션 유지에 필요한 돈이라면 그게 1억이든, 10억이든 전 신경 안 씁니다. 쓰라고요, 제발 쓰세요, 얼마든지. 쓰고 그 돈값을 저한테 보여 주시라고요. 이거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이런 작은 객실 컨디션 하나 완벽하게 정비를 못 해내면, 제가 뭘 믿고 본부장님한테 동부산 리조트 오픈 후 거기 운영을 맡깁니까?”

“…….”

“하기 싫으세요?”

“아닙니다!”

나주석 본부장은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JK 드 누락의 첫 골프장 리조트가 될 JK 드 누락 동부산점.

객실 1,400개의 초대형 리조트다.

그 리조트의 운영 총괄을 자신에게 맡겨 보겠단 약속을 받았다.

그게 현재 나주석 본부장이 까탈스러운 와이제이를 바로 옆에서 모시며 버티고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오너 사이드와 운영 총괄을 함께한다는 건 실질적인 경영에 참여를 한다는 소리.

호텔리어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인 그곳은 사실상 나주석 본부장의 목표이기도 했다.

나주석 본부장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주석 본부장에게 손정엽 대표는 주저하지 않고 짜증을 토해 냈다.

“아니이이이! 하기 싫거나 못 해낼 거 같음 빨리 저한테 솔직하게 말을 해 주셔야 해요. 그래야 저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죠.”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거하고, 해 놓는 건 다른 거죠. 진짜 계속 이렇게 한번 해 보세요. 내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이렇게 말로만 할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손정엽 대표는 그 말만 남기고 다른 객실 정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주석 본부장은 썩어 버린 얼굴 표정과 칼이 달린 눈빛으로 그곳 외국인 총지배인과 객실팀 팀장을 쏘아본 후, 손정엽 대표가 지적한 내용을 옮겨 적어 놓은 수첩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찢어 객실팀 팀장의 가슴팍으로 때리듯 전달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손정엽 대표가 다른 객실로 이동 중일 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손정엽 대표의 폰으로 걸려 왔다.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손정엽 대표는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언제 불같이 화를 냈냐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

“어, 정태야.”

―바빠?

“아니? 내가 바쁠 게 뭐가 있어?

―지금 통화 가능해?

“음… 어… 그럼, 그럼. 가능하지.”

―바쁜가 보네. 짧게 이야기할게.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오늘 저녁? 몇 시쯤?”

―약속 있음 다음에 해도 되고.

“3시에 미팅이 있어. 아무리 빨리 끝나도 두세 시간은 걸리는 미팅이야. 그게 정확하게 언제 끝난다는 보장이 없어서 그렇지, 그거 말고는 다른 약속은 없어.”

―그럼 넉넉잡고 7시로 시간을 잡으면 괜찮은 건가?

통화 중인 손정엽 대표 앞으로는 나주석 본부장을 시작으로 두촌점의 총지배인, 객실팀 팀장이 앞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디로 올 건데? 소공동점?”

―7시로 잡으면 돼, 안 돼? 그거부터 말해 줘.

“돼. 와.”

―호텔 음식 지겹다. 밖에서 보자.

“밖에서?”

―그… 형 혹시 뭐 좋아해?

“뭐가 뭘 좋아해?”

―메뉴 말이야, 메뉴. 좋아하는 거 있어?

“나는 뭐 아무거나 다 괜찮아.”

―참 말 많이 시켜. 아무거나 먹을 거면 내가 왜 물어보겠어? 좋아하는 음식 있음 말해. 그쪽으로 식당 예약할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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