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56화 (256/303)

256화 나한테 미안한 거 없냐?

반가운 연락을 한 통 받았다.

모직 인사부의 정현수 과장으로부터 카톡이 들어왔는데, 이게 뭐라고 오랜만에 그 친구 얼굴이 떠오르자 무척 반가운 거였다.

받은 카톡 내용은 무척 단순했다.

―상무님 잘 지내시죠?

그게 끝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정 과장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연락을 줬겠거니 싶어서 가볍게 답장을 보냈는데, 돌아오는 내용이 보통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현수 씨는 요즘 좀 어때요?

그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안부 인사 정도라고만 생각을 했지.

식품으로 완전하게 옮겨 온 이후로는 처음 연락을 하는 거기도 했고.

마음 같아서는 통화를 하면서 목소리를 듣고 싶던데, 요즘 친구들이 워낙 통화보다는 이런 문자 메시지에 익숙하다 보니 괜히 대뜸 전화를 걸어 당황을 하지나 않을까 계속 톡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이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답답하다.

통화로는 1초도 안 걸릴 대답을 듣는데,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나는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통화가 편하지 문자 메시지로 대화를 하는 건 불편해 죽겠는데, 어떻게 이게 통화보다 더 편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아무리 애를 써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게 바로 이렇게 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거다.

어쩐 일로 오랜만에 연락을 줬냐고 톡을 찍고 있을 때였다.

띵동! 하면서 평소 내가 받아 봤던 카톡 메시지와는 알람 소리부터 아예 다른 이모티콘 같은 게 날아왔다.

처음엔 이모티콘인 줄 알았다.

하늘이가 이런 비슷한 걸 자주 보내거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모티콘이 아니라 무슨 파일 같은 거였다.

“응?”

뭔가 싶어서 열어 봤지.

그랬더니 청첩장인 거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식품으로 옮겨 오기 바로 전, 그러니까 정현수 과장을 데리고 정장을 맞춰 줬을 때까지만 해도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식품으로 옮겨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거였다.

―현수 씨 지금 통화 가능해요?

―넵넵!

전화를 걸었지.

톡을 찍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톡으로 축하는 한다는 것도 내 기준에선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서.

“이게 또 무슨 소리예요?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보내 준 청첩장에서 신부 얼굴 봤는데, 내가 아는 모직 사람 얼굴은 아닌 거 같던데요?”

―아이고, 큰일 날 소릴 하세요. 아닙니다.

“그게 뭐가 큰일 날 소리예요?”

―저는 사내 연애 그런 거 극혐합니다. 상무님도 인사부 생활 해 보셔서 잘 아시잖아요. 사내 연애의 결과가 어떤 건지.

“잘되는 커플들도 더러 있지 않았나?”

―가뭄에 콩 나듯이요?

“하하. 그건 그렇지. 어후, 일단 축하해요. 축하하고… 와, 잠깐. 전혀 예상을 못 한 이야기를 들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 어떻게 만난 거예요? 신부 될 사람이 상당히 미인이시던데?”

―업체 통해서 만났습니다. 히히.

“박종근 차장은? 혼자 하지 말고, 그런 기회가 있음 박종근 차장도 데리고 다니면서 해 보지 그랬어요?”

―박 차장님은 아예 비혼 선언을 하셨고요.

“아, 그래요? 그건 또 몰랐네. 아무튼, 진짜 축하해요.”

갑자기 모직 인사부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런 통화에서 그런 내용까지 일일이 다 묻기도 조금 그랬고.

몇 마디를 더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축하한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던 나한테 정 과장이 이런 말을 했다.

―상무님 바쁘신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형식상 모바일 청첩장이라도 한 통 보내 드려야 예의일 거 같아서 큰 기대 없이 보낸 거니까, 괜한 부담 가지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부담은 무슨….”

―청첩장 보내기 전에 진짜 고민 많이 해 봤거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무님께는 꼭 결혼 소식을 말씀드려야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찾아뵙고 종이 청첩장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성의 없이 모바일 청첩장으로 대신해도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근데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 이런 일로 뵙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하실 거 같고, 또 바쁘신데 괜히 제가 직접 찾아뵙고 전달을 하면 참석을 못 하시는 게….

“갈 건데?”

―네?

“갈 거라고요. 현수 씨 결혼식 날 갈 거예요.”

―지, 진짜요?

“뭘 그렇게 놀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수 씨 결혼식인데 당연히 가야지. 부담은 내가 아니라 현수 씨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어느덧 가을은 깊어졌고 슬며시 겨울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난 통화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가 섰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시내 모습에서 쌀쌀한 기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기로 했어요?”

―겨울 결혼이라 따뜻한 몰디브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데 가네. 잘 결정했어요. 날짜는 다 정했고?”

―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현수 씨. 비행기 표 다 끊었죠?”

―그럼요. 재경 직원 할인 받아서 여행사 안 통하고 미리 다 끊어 놨습니다.

“나는 축의금 대신 비행 편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줄게요.”

―아닙니다, 상무님.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부담 느끼지 말라며. 현수 씨 결혼식 날 축의금으로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게 나한테는 더 부담이에요. 몰디브면 여기에서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그 정도 폼은 잡아 줘야 앞으로 결혼 생활이 편해지지. 나는 그런 식으로 축하 성의를 전달하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해도 괜찮죠?”

―아, 이러려고 연락을 드린 게 아닌데….

“갑자기 다들 보고 싶네.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고 본부장한테는 이야기했어요?”

―아뇨, 아직. 근데 이게… 해도 될까요?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당연히 해야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대충 눈치를 긁었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한테만 연락이 왔다고 하면 고 본부장 성격에 많이 섭섭해할 거 같은데?”

―그런데 고 이사님은 사실 모직에 같이 계셨을 때 저랑은 딱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셨던 것도 아니고, 지금은 식품으로 옮겨 가셨는데 연락을 드리기가 조금….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잖아. 난 모직에 있을 때 그런 거 전혀 못 느꼈었는데?”

―아뇨, 아뇨. 사이가 안 좋고 자시고 할 게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 그건 현수 씨 생각인 거고. 고 본부장이 모직 인사부장 출신인 거에 식품에 와서 얼마나 자부심을 크게 느끼고 있는데. 이럴 때 이전 부하 직원이 살갑게 연락해서 와 주십사… 하는 거. 그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가든, 아님 시간이 없어서 축의금만 보내든 연락을 받은 거랑 아무 연락도 못 받은 건 큰 차이거든.”

―그럴…까요?

“그럼요. 요즘 시대에 평생직장, 평생 부서가 어디에 있어요? 다들 내색은 못 하지만 사람이 그립다고. 특히 고 본부장 정도 나이 먹고 위로 모셔야 하는 사람보다 아래로 챙겨야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경우에는. 챙겨 주는 것도 요즘은 많이 조심스럽지. 자칫 꼰대, 오지랖 소릴 들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챙겨 줘야 하는 명분이 생기면,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거예요. 고 본부장한테도 나한테 보낸 거 똑같이 보내 줘요. 고 본부장 앞에선 난 아직 연락 안 받은 걸로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결혼식 날 봅시다. 내 꼭 갈 테니까.”

―넵! 아 참, 상무님!

“네.”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김 부장님, 박 차장님, 상무님과 같이 인사부 생활 했던 사람들 모두 응원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안 할까. 나도 응원하고 있는 중이에요. 현수 씨, 김 부장님, 박 차장님… 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 * *

정태는 퇴근과 동시에 정엽이의 집을 찾았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술이 필요한 자리냐고 눈치껏 정엽이가 물었다.

그에 정태는 한잔 정도는 곁들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그럴 거면 편하게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자는 거였다.

“왔어?”

현관문을 열고 있는 정엽이의 모습에 정태는 묘한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시감은 아주 오래전, 큰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당시 종종 큰집에 놀러 갈 때마다 반갑게 달려와 현관문을 열어 주던 어린 손정엽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자신을 참 많이 챙겨 줬던 사촌 형이었다.

자신이 참 잘 따랐던 사촌 형이기도 했고.

사촌이라는 존재.

재경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후로 아버지 쪽이든, 어머니 쪽이든 정태는 사촌에 대한 개념이 항상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밖에서 먹으면 되지, 뭐 한다고 귀찮게 집으로 오라고 그래?”

자기가 보자고 해 놓고도 아직은 정엽이에게 마음을 다 열어 주는 게 힘든 듯, 괜히 툴툴거리며 정태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정엽이의 집.

해 놓고 사는 집안 인테리어만으로도 정태는 얼마든지 정엽이의 취향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밖에서는 못 먹는 음식이니까 그렇지.”

“이건 무슨 냄새야?”

“머썰.”

“머썰? 홍합?”

“프랑스에서는 지금 같은 계절에 무조건 꼭 먹어 줘야 하는 음식.”

“머썰레이트 말하는 거야?”

“오! 알아?”

“그걸 왜 몰라. 그거 하는 집이 한국에 왜 없어? 요즘은 많아.”

“설마하니 호텔 장사 하는 사람이 한국에 머썰레이트 하는 집 있다는 걸 모르겠냐? 나름 흉내 좀 낸다는 집은 다 찾아다녀 봤어. 근데 제대로 하는 집은 아직 한 군데도 못 봤다.”

“불안한데… 그거 조금만 잘못해도 비린내 장난 아니잖아. 할 줄 아는 거야?”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정태에게 정엽이는 가볍게 비웃음을 날린 후 말했다.

“너무 잘하는 게 탈이지. 이런 실력을 숨기고 주방이 아닌 사무실에서 호텔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게 아까울 정도로.”

“하여간 말은….”

“맛을 보고 나서도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 어디 한번 보자.”

정엽이는 화이트와인에 푹 삶겨진 머썰레이트를 식탁 중앙에 올려놓고 껍질을 가려낼 앞접시까지 준비를 한 뒤 정태를 불렀다.

그리고 정태는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정말 언젠가 파리 여행을 하며 현지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경험해 봤던 로컬 전통 머썰레이트의 향기에 크게 놀랐다.

어디 그뿐인가.

파스타 육수로 써도 완벽할 정도로 감칠맛이 깊게 우러나는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 보고는 두 눈이 크게 떠지기까지 했다.

“이거 맛이 왜 이래? 왜 맛있어?”

“기가 막히지? 비린내 하나도 안 나지?”

“오, 진짜 좀 하는데?”

“형이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야. 대충대충 그런 거 절대 없다.”

“요리는 또 언제 배웠대? 진짜 맛있는데?”

“다음에 언제 기회 되면 제수씨하고 승현이 데리고 집에 한번 놀러 와. 오늘은 급하게 준비하느라 구한 재료가 이게 전부라 이렇게밖에 못 차렸지만, 제대로 준비하면 여기 식탁 다리 부러뜨릴 수도 있다.”

차가운 화이트와인을 정태의 잔에 따라 줘 놓고 정엽이가 물었다.

“그런데 네가 어쩐 일이냐? 정훈이가 자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네가 직접 날 보자고 다 하고. 그것도 정훈이 없이 단둘이.”

“그렇지? 이상하지.”

“어, 완전.”

“어색하지?”

“대박 어색해. 아닌 척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넓은 국자로 정태의 그릇에 홍합을 한가득 덜어 줘 놓고 정엽이가 말했다.

“근데 고맙기도 해.”

“고마워? 뭐가?”

“형 집에서 보자고 하면 미쳤냐고 할 줄 알았거든. 근데 별말 없이 알았다고 하길래 이게 뭔가 싶었어.”

“…….”

“내가 지금 어색한 걸 아닌 척 하고 있는 것보다 너한테는 그게 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걸 해 주네.”

시원하게 잘 익은 화이트와인을 한 모금 한 뒤, 그 잔을 반듯하게 앞으로 내려놓고 정태가 물었다.

“형 나한테 미안한 거 없냐?”

“내가 너한테?”

“어. 나한테 미안한 감정 같은 거 없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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