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통신으로 보내실 생각 중이신가 해서요
“어떤 걸로 내가 너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야?”
당당하고 싶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태 앞에서는 반드시 그런 모습을 유지해 가야 했고.
뻔뻔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불편함과 어머니 대신 가져야 할 미안함은 다른 거다.
사과?
못 할 이유가 없다.
해야 하는 거라면, 그리고 상대가 그걸 바란다면 10번이고 100번이고 정태가 만족을 할 때까지 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정도도 못 할 손정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 작은아버지가 아닌 정태에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정엽이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호텔 사업권을 받아 오는 과정에서 작은아버지와 정훈이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
그건 마땅히 앞으로 계속해서 갚아 나가야 할 빚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이유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사과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엽이는 순간의 불편함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과라는 수단을 쉽게 사용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정엽이는 생각했다.
가능만 하다면 정태하고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 털고 간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태는 스스로를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자조적으로 말아 올렸다.
“이런 거 보면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멍청한 짓만 골라 한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딱 그 꼴이잖아,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난 감정들 때문에 현명해질 기회, 세련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그게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정태의 진짜 이유였다.
변명.
변명이 맞는다.
정태는 지금 정엽이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왜 형을 상대로 날을 세우고 불편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며 생각을 정리한 정태가 차마 정엽이와는 눈도 못 마주친 채, 들고 있던 와인 잔만 빙빙 돌려 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형은 나한테 미안한 게 없다니까, 나라도 사과를 해야겠네. 나는 형한테 미안한 게 좀 있거든.”
정엽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나한테? 뭘?”
“뭘 다 알면서 물어? 이런 자리 한번 만드는 데 용기까지 만들어 본 사람 민망해지게. 그동안 내가 형을 너무 싫어했어. 싫어해야 하는, 아니, 싫어해도 되는 이유를 억지로 찾았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해.”
“…….”
“그렇게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이유가 아마, 형은 아예 기억도 못 하고 있는 내용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유치했어.”
“내가 기억도 못 하는 내용?”
정태는 와인 한 모금으로 입 안을 적셔 놓고 고개를 수차례 내저었다.
“다 옛날이야기야. 그걸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거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다시 한번 정엽이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런 정엽이를 쳐다보며 정태가 말했다.
“솔직히 나 그때 형, 백모님… 정말 징글징글하더라. 어떻게 우리 아버지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남도 이렇게까지는 안 하겠단 생각에 속으로 두고 보라고 했어. 그런데 형, 그거 알아?”
비록 자신이 한 건 아니지만, 작은아버지를 상대로 어머니가 해 오셨던 금전적 요구에 대한 억지를 잘 알고 있는 정엽이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다섯이야. 그래서 그런 건가? 이제 우리가 그 당시 어른들만큼 나이를 먹었잖아.”
“…그렇지.”
“내가 요즘 그때 백모님이 하셨던 행동들, 입장이 조금씩 이해가 돼.”
“……?”
“승현이 엄마가 요즘 좀 그래.”
“제수씨?”
“어. 내 상식에선 이해가 잘 안 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그런 생각들로 날 놀라게 하는 행동들도 종종 하고.”
“뭐 어떤 거?”
“누워서 얼굴에 침 뱉기 할 것도 아니고, 그냥 형이 두루뭉술하게 알아들어. 그냥 좀… 후계 문제 관련해서 뭐가 많이 불안한 모양이야.”
정엽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불안해하는 사람을 불안해하지 말라고 강요만 할 수도 없는 거고, 저러는 이유를 내가 알아야겠는 거야. 그 사람 입장에서 이해를 해 보려고 시도를 참 많이 했어. 그러다 깨달았어. 승현이 엄마가 저러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참… 이게 우습게도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하고 있는 행동들이 백모님 예전 모습과 아주 비슷한 거야.”
정엽이도 현재 재경가의 후계 부분이 어떠한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건 대충 눈치로 긁어 알고 있었다.
“그건 너무 억지 아니냐? 그거랑 이건 상황이 완전 다르지.”
“느낌이 비슷해. 형이 그걸 억지라고 하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내가 요즘 승현이 엄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당시 백모님 입장이 어쩌면 이랬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솔직히 안 그랬음 좋겠지. 그냥 날 믿고 가만히 있어 주면 참 좋겠는데… 근데 그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목표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그 사람한테는 그게 나와 결혼을 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 기준에서만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섭섭하다…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고.”
“…….”
“나 역시 승현이 엄마하고 결혼을 해야겠다 결심했을 때 승현이 엄마라는 사람만 본 게 아니거든. 처가에 휘둘리는 아버지의 처진 어깨만 보며 컸어. 나는 안 그러고 싶은 거야. 죽어도 그렇게는 못 살겠는 거야.”
정태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후계에 장남인 자신이 아닌 정훈이 쪽으로 마음을 기울고 계신지를 이미 알아 버렸으니까.
“아무튼, 그래.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도대체 손정엽이 무슨 잘못인가. 그리고 나는 손정엽을 왜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있나. 깔끔한 이유가 없는 거야, 이게. 있었더라도 이젠 없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나는 없는 이유를 지금까지 억지로 계속 부풀리고만 있었더라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난 항상 우리 아버지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어. 형네만 힘든 시간을 보낸 게 아니야.”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철저하게 아버지 편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게 우리 재경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거든.”
정엽이 역시 정태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아버지 편에서 내가 바라봤던 세상이 우습게도 아버지가 바라보고 계신 세상이 아니었더라? 내가 아닌 정훈이 자식이 아버지랑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더라고.”
“정훈이가?”
“미래금융, 그리고 형.”
“너는 말을 좀, 듣는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좀 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이야기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설마 내가 원래 이러겠냐? 모자란 놈도 아니고. 그만큼 지금 이 자리가 나한테는 쉽지 않은 자리라는 뜻이잖아. 좀 눈치껏 알아들어라.”
그에 정엽이는 몇 살이나 더 많은 사촌 형으로서 동생 정태에게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이 아닌 정태에게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 이런 자리를 마련해 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과 달리, 동생이 먼저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고맙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것인가?
미안한 감정?
조금 전까지는 그저 불편함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정엽이는 어렵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 정태에게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정태가 자조적인 미소를 얼굴에 걸어 놓고 말했다.
“미래금융, 그리고 손정엽이라는 장조카. 나는 그 두 존재가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는 약점이라고만 생각을 했지, 아버지가 언제라도 꼭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마치지 못한 숙제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어.”
“…….”
“그런데 스너프 건으로 뱅크 시스템을 미래금융 통해 완성하게 만드시고, 또 형한테 하시는 걸 보니까 알 거 같은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 한다고 했던 내 행동들이 아버지 눈에는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라 보였을지. 나부터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던 거야. 당연히 그게 아버지의 시선인 줄 알고. 근데 정훈이 이 자식은 정확하게 아버지가 뭘 보고 계시는지를 알고 있더라. 그걸 알고 나니까 정훈이 쪽으로 기울고 있는 아버지 마음에 섭섭해할 엄두도 못 내겠는 거야. 하하하.”
바로 옆 식탁 의자 위로 올려놓았던 서류 가방에서 플라스틱 파일 하나를 꺼낸 정태.
그걸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정엽이 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게 뭐야?”
“전에 정훈이하고 다 같이 술 마시면서 물산 쪽 관심 있다고 했지?”
정엽이는 그저 미간 사이 주름만 만들어 놓고, 테이블 위로 올려진 파일과 정태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꼭 부경물산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어쨌거나 장선동 회장 쪽 사업들은 화학부터 시작해서, 물산, 화재… 우리 재경 그룹이 다 지분을 확보하고 있어. 변화가 안 생기는 게 현재 재경에는 더 유리해. 하고 싶으면 형이 새로 만들어.”
“계성물류?”
정엽이는 귀로는 정태의 이야기를 들으며 파일을 열어 보았다.
“요즘 계성 그룹이 물류 쪽으로 투자를 집중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어?”
“자기들끼리 찢었다 붙였다 하는 거 같긴 하더라.”
“형이 하겠다고 하는 게 결국은 드모어 인베스트먼트가 가지고 있는 유럽 쪽 채널 통해서 한국으로 물건들 가지고 들어와 한국, 일본, 중국 쪽으로 뿌려 보겠다는 거 아냐?”
“그렇게 시작을 하는 게 아무래도 유리하지.”
“우리 쪽 스너프 유통 라인을 조양 그룹 쪽으로 유리하게 열어 주겠단 조건으로 조양 그룹 부회장한테 내가 부탁을 좀 했어. 결국 계성 그룹이 최 부회장한테는 처가니까.”
정엽이는 식탁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파일 속 서류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가장 뒷장에서 낯익은 서류 한 장을 발견했다.
바로 부경호텔 경영권을 가져올 때 숙모님이 들고 계시던 부경호텔 지분을 빌리며, 뒤로 정태에게 써 줬던 각서 한 장.
숙모님의 지분의 도움으로 호텔 경영권을 잡고, 5년 동안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경영권을 재경 그룹 쪽으로 넘기겠다는 약속을 담은 각서였다.
“이건 또 왜 여기에 있어?”
정엽이의 물음에 정태가 양쪽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버지가 결정을 하신 일에 내가 뒤에서 몰래 그런 걸 형이랑 만들었다는 거 자체가 코미디더라고. 호텔. 가성비도 안 나오는 그 사업 경영권이 우리 재경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너 이거 후회 안 하겠냐?”
“해낼 거잖아. 그런 거 없이도 JK 드 누락, 업계 1위로 올려놓을 거잖아. 나는 뭐 보는 눈이 없겠어, 듣는 귀가 없겠어? 그냥 괴롭히고 싶었던 거야. 그런 각서라도 받아 놓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괴롭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데 이젠 그만하고 싶어. 내가 나 자신한테 쪽팔려서 더는 안 되겠어. 그거 조양 그룹 최영대 부회장이 직접 다리 놔 준 거니까 잘 한번 읽어 보고 계성물류 쪽으로 접촉 한번 해 봐. 기회가 좋을 거야.”
* * *
며칠 뒤 손정태 스너프 사장은 계열사 업무 보고에 관한 내용으로 재경 그룹 본사를 찾았다.
매달 찾아오는 자리이지만, 이번 달만큼 스너프 업무 보고 순서를 기다려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한 달간 스너프에서 일으킨 매출과 투자, 그리고 그룹 전사적으로 기대 중인 기획들의 진행 상황들까지….
정태는 오늘도 막힘없이 아버지 손 회장을 마주 보고 앉아 스너프에 관한 내용들을 풀어 나갔다.
“수고가 많다. 잘하고 있네. 그럼 스크린 골프장 해외 진출은 늦어도 12월 안에는 진행이 되는 거야?”
“11월 14일이 1차 진출인데 현재 목표는 7개 도시 8개 업장이 오픈을 할 거고, 2차 진출은 내년 2월 중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1차, 2차를 나눠? 그냥 오픈을 하면 오픈을 하는 거지?”
“스크린 골프 프로그램이 일반 제품들처럼 아직은 자유롭게 수출이 안 됩니다. 한 번 보낼 때 같이 보내야 해요. 이게 프로그램을 받는 나라에서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는데 개별로 보내게 되면 세금 관련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집니다.”
“그게 또 그런 문제가 있어?”
“그 관련된 내용도 법무팀에서 계속 관련처하고 조율 중인데, 조율이 안 될 거 같으면 해외 공장을 따로 하나 섭외를 해 볼까 싶어요. 프로그램 개발이야 한국에서 하더라도, 생산까지 한국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처럼 없는 시장을 만들어서 수출을 해 보겠다고 하는데, 정부가 이렇게까지 협조를 안 해 준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5년마다 바뀌는 정권. 모든 정권이 다 우리처럼 기업 하는 사람들한테 우호적일 수는 없는 거야. 그만한 일로 정권 눈 밖에 날 결정을 할 이유도 없는 거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잘하고 있는데, 다 아는 내용 끝까지 다 들어서 뭐 할 거야? 오후에 내가 따로 약속이 있어. 오늘은 점심을 좀 일찍 가자.”
손홍준 회장이 자리를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아버지.”
정태는 무겁게 입을 뗐고, 보고 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손 회장은 고개만 살짝 들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뭔데?”
“그 전에 먼저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챙기고 있던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손 회장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들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무척 편안해 보이면서도 뭔가를 결심한 듯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라.”
“통신이요.”
“통신? 통신이 왜?”
“정훈이를 통신으로 보내실 생각 중이신가 해서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