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59화 (259/303)

259화 아버지 과실도 큽니다

재경 본가 서재.

손홍준 회장은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미 서재 안은 매캐한 담배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그의 재떨이 속으로는 다 타 버린 꽁초가 여섯 개나 담겨 있었다.

“통신. 제가 한번 맡아 보면 안 되겠습니까?”

통신 운영 정상화에 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그 기회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던 정태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미 정태는 정훈이를 통신 쪽으로 보내겠단 자신의 의중을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통신 운영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땅한 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변명 앞에 공정하지 않은 시선으로 두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손 회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공정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거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손 회장은 정훈이가 아닌 정태 쪽으로 많은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장선길로부터 통신을 가져온 건 정태가 아니라 정훈이다.

어디 통신만 그런가.

같은 유통이기에 스너프로 편입을 시킨 백화점, 아웃렛, 면세점, 거기에 마트까지.

제대로 된 공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부경유통의 잔해들을 스너프에 편입시킬 것이 아니라 따로 분리를 해서 정훈이가 맡아 나가게 만들었어야 맞는 거다.

그럼에도 그걸 하지 못했던 건, 아직 정훈이에게는 그럴 만한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이고, 동생이 만들어 내는 성과에 정태의 기가 죽지 않도록 조절을 하기 위함이었다.

사업이라는 게 그렇다.

꾸준히 오랫동안 현상을 유지하고 지켜 내는 게 어렵지 한두 번 정도의 뛰어남, 탁월함은 기회와 운이 맞아떨어지면 누구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많은 기업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차세대 기업인들이 신선한 관점, 순발력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는 왕왕 있다.

사고는 신인이 친다는 말처럼, 기업 경영에서도 아직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젊은 사람들이 획기적인 기획들을 발표하고 그걸 현실화시켜 시장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런 사람들까지도 몇 년 지나지 않아 기업 활동이라는 걸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가 굳어 버리고 현상 유지를 위한 방어적인 자세로 돌아서면서 더 이상 신선하지 못하게 되는 게 바로 이 기업 경영이라는 것이고.

모직에서 보여 줬던 정훈이의 맹활약에 대해 손 회장은 최대한 보수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건 최대한 뒤로 숨기고, 주위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과 평가에 함몰되어 더 뛰어난 성과, 더 눈부신 활약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부담에 스스로 갇히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정훈이는 그간 손 회장이 지켜봐 왔던 수많은 인재와 달랐다.

부경통신을 무너뜨리는 과정, 그리고 현재 식품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결과물들….

실로 앞으로의 모습을 계속해서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정태에게 스너프를 차고 나가게 만들어 봤던 건 손 회장이 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잘 해낼 거라는 믿음, 반드시 잘해 주길 바라는 기대.

정태는 손 회장으로 하여금 어지간하면 실망을 시키지 않는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었고, 재경에 입사를 한 이후 둘째 정훈이가 보여 주는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느덧 모직을 거쳐 식품에서 1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유의미한 성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정훈이.

손 회장은 더 이상 정훈이의 운영, 기획에 관한 자질을 걱정하고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통신에서 만들어 낼 활약과 성과들에 대한 기대가 커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공정한 기회?

도대체 무엇이 두 아들을 상대로 자신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공정한 기회인 것일까.

손 회장은 다시 새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몰랐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직접 통신 운영 정상화를 시켜 보겠다며, 그에 관한 기회를 요구하는 정태.

정태는 그간 자신이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 같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회사 안에서는 아버지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재경을 이끌어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회사 밖에서는 정신 못 차리고 여기저기 정훈이가 치고 다니는 사고 뒷수습하기에 바빴어요.”

그랬다.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회사 밖에서까지 정태는 재경의 이름이 정훈이의 기행으로 구설에 오르지 못하도록 많은 애를 썼다.

혼자 잘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이 기대하는 역량을 충분히 증명해 내며, 회사 밖에서는 정신 못 차리고 사고나 치고 다니는 동생까지 살뜰히 챙기는 든든한 맏이였다.

“정훈이 역시 제 책임이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동생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재경 전체를 관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라 하셨죠. 그렇게 재경 안에서 보낸 시간이 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훈이가 입사를 했죠. 정훈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성과들, 결과물. 인정합니다. 이젠 대견하고 기특하지도 않아요. 샘이 나고 솔직히 말씀드려 이젠 두렵기까지 합니다.”

“…….”

“그래서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시작이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제가 만약 정훈이처럼 아무것도 따로 챙겨야 할 대상 같은 거 없이, 오로지 혼자서만 잘하고, 그렇게 성과만 내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요.”

아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최근 정태가 마음고생이 많았겠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된 손 회장이었다.

워낙에 아버지 앞에서는 속에 있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는 아들이 아니었다.

그런 정태가 재경을 위해 해 왔던 노력에 후회라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과 장남으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지내 왔던 아들의 부담감, 책임감에 마음이 아릴 지경이었다.

“성과만 내도 되는 상황? 그게 말처럼 쉬운 일 같으냐?”

“아뇨, 어렵죠. 그게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요, 아버지.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더는 환경에 구속받지 않고, 오로지 재경이 현재 가지고 있는 사업들만 가지고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저 스스로 확인을 해 보고 싶어요. 저한테 그런 기회 한번 정도는 주실 수 있잖아요. 제가 언제 아버지한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부탁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까?”

“…….”

“이미 했던 실수는 후회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똑같은 후회를 나중에가서 똑같이 다시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제 알겠습니다. 묵묵하게 언젠가는 알아서 잘 챙겨 주시겠지… 하면서 기다리는 것보다, 제 손으로 직접 제가 원하는 걸 만들어 내는 걸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걸 제가 정훈이에 비해서 너무 늦게 알았는데, 거기엔 아버지 과실도 큽니다.”

“내 과실?”

“처음부터 저한테 재경의 후계자 자리를 당연하게 말씀하셨잖아요.”

“…….”

인정을 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경쟁이 아닌 재경을 전체를 살피는 눈을 키우게만 하셨잖아요. 경쟁은 내가 직접 하는 게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게끔 만들어야 하는 거라며, 그런 자질들만 강조를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정훈이하고 경쟁을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정훈이가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주위 장애물들을 걷어 내 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

“저한테 제대로 된 기회, 제가 원하는 기회를 한 번만 주세요.”

“그게 통신이냐?”

“6개월 안에 운영 정상화시켜 놓겠습니다.”

* * *

서재를 빠져나온 손 회장은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만들어 내며 함씨를 불렀다.

마지막 집 안 뒷정리 중이었던 함씨가 내일 아침 식사 준비를 감독하다가 얼른 거실로 나왔다.

“주무시게요?”

“함씨 지금 마땅히 하는 거 없으면 나 좀 잠깐 보지.”

“네.”

손 회장의 온몸에서 찌든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얼른 서재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 환기부터 시켜 놓고 함씨는 손 회장이 앉은 상석 옆자리 긴 소파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손을 무릎 위로 다소곳이 올려놓고 있는 함씨 앞으로 손 회장이 흰 봉투 더미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곧 추석이잖아. 떡값 미리 함씨 편에 주는 거야. 봉투가 하나 남을 거야. 하나 남는 걸로는 아줌마들 한우 세트라도 하나씩 나눠 가질 수 있게 알아서 준비해. 함씨 거는 특별히 좀 더 챙겼어. 애들 엄마가 명절 때 떡값으로 얼마씩 챙겨 줬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한번 봐. 그만하면 되나?”

민망했지만, 사모님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 역시 자신의 역할이란 생각으로 함씨는 손 회장이 보는 앞에서 봉투 하나를 열어 봤다.

안으로는 백만 원권 수표 두 장이 들어 있었고, 이내 그 봉투는 자신의 봉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얼른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찾아 열었는데, 백만 원권 수표가 세 장이나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만하면 돼?”

“회장님, 이거 너무 많습니다.”

“그럼 됐어. 항상 받던 것보다 덜 받는 게 문제지, 더 받는 게 무슨 문제야.”

“하지만 이건….”

“안 부족하고, 충분하면 됐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애들 엄마 없이 홀애비 혼자 사는 집, 군내 안 나게 이만큼 신경 써서 챙기기도 쉽지 않을 텐데, 다들 내가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 전해 주고. 내가 요즘 신경 쓸 게 많아. 그거는 그렇게 함씨가 추석 연휴 오기 전에 알아서 아줌마들 선물까지 다 준비해서 정리를 해.”

“…네.”

함씨는 실제로도 피로가 심하게 올라와 있는 손 회장의 얼굴빛에 재빨리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내가 함씨한테 이야기를 좀 하자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차례 말이야.”

“네.”

“지금 애들 엄마가 집에 없잖아.”

“네. 그렇지 않아도 언제 기회 봐서 회장님께 여쭤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 회장의 눈치를 보며 함씨가 말했다.

“혹시… 차례 때는 사모님이 오시나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 회장이 대답했다.

“아니, 올 거면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지, 내가 왜 이 시간에 함씨 붙잡고 앉아 이 이야기를 하겠나.”

“아… 그럼 제가 평소 준비하던 대로 아줌마들하고 같이 준비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손 회장이 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다시 한번 고개를 짧게 흔들어 놓고 손 회장이 말했다.

“아니, 올해부터는 따로 명절 차례, 기제사 준비할 필요 없으니까 준비하지 말라고. 그 말 하겠다고 부른 거야.”

“…네?”

두 손으로 소파 팔걸이 부분을 슥슥 비벼 대며 손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이 딱히 명절 차례, 기제사 같은 걸 신경 써서 챙겼던 집이 아냐. 이번 기회에 그거 다 절에 갖다 올릴까 생각 중인데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네. 애들을 시키자니 나도 잘 모르는 걸 그놈들이 뭘 알겠나 싶기도 하고, 또 다들 회사 일 하느라 바빠. 아무래도 이런 내용은 회사 사람들보다는 자네나 집안일 봐주는 아줌마들이 더 나을 거 같기도 해서 말이야. 그걸 자네가 좀 같이 챙겨 주면 고맙겠다 싶어서.”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함씨는 더 이상 이 집에서 큰 사모님을 만날 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같이 이 집안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적이 있다.

회장님과 큰 사모님이 다시 합치실 수도 있다는 생각.

재벌들이라고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단칼에 자르고 있는 손 회장이었다.

“절은 저기 보광사 쪽이 괜찮다고 하는 거 같아. 보광사나 아니면 삼정사가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주말에 자네 괜찮으면 나하고 같이 한번 가 보지.”

“네, 알겠습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형식이 중요한가 어디. 같이 가서 자네가 잘 좀 봐. 내가 본다고 뭘 알겠나. 안 그래? 그건 그렇게 알고 있고, 이번 추석 때는 내가 한국에 없을 거야.”

“출장이 있으십니까?”

“잡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함씨도 그렇고 아줌마들도 남의 집 차례 준비한다고 귀한 명절 이 집에 붙잡혀 있지 말고 앞으로는 각자 집에 가서 집안 차례 돕거나 아님 휴가차 어디 여행이라도 가거나 그렇게 하라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니까 그 부분은 함씨가 아줌마들하고 이야기 잘해 보고 보안 관련해서 진짜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명절 때는 다들 집에 갈 수 있게 그렇게 해.”

“네.”

“그리고 말이야.”

짧게 “네.” 하고 대답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함씨에게 손 회장이 말했다.

“내일 저녁은 애들도 와서 같이하기로 했어.”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정엽이도 불렀고 술도 한잔해야 할 거 같으니까 안주 될 만한 반찬들 위주로 준비를 좀 해.”

“네. 그러면 혹시… 하늘 양도 오는 건가요?”

“아냐. 그런 건 아니니까 평상시 애들 오면 준비하던 거에 밥그릇, 국그릇 하나씩만 더 준비하면 돼.”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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