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60화 (260/303)

260화 진심이야

본가에 도착했을 때 차고 안에서 홍준이의 차량은 볼 수가 없었다.

정엽이의 차도 없었고.

처음 보는 흰색 마세라티 SUV가 한 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과연 저게 정태가 타고 다니는 차일까 싶었다.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는데, 저런 게 정태의 취향은 아닌 걸로 알고 있거든.

아니나 다를까,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나보다 먼저 도착한 집안사람은 승현이를 데리고 온 원수경이가 전부였다.

거실에선 승현이의 보모처럼 보이는, 그간 본가에서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40대 초반 정도의 여자 한 명이 동화책을 펼쳐 놓고 승현이에게 그림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왔어요?”

보통 본가에서 원수경을 볼 때엔 항상 앞치마 차림으로 주방에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앞치마 차림도 아니었고 오히려 한껏 멋을 낸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현관까지 배웅을 나오는 모습이었다.

거실 소파 테이블 위로 찻잔이 하나 올려져 있었거든.

그 찻잔은 누가 봐도 원수경이가 사용을 하던 거였고, 역시나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함씨에게 내가 마실 음료를 준비해 달라며 먼저 소파 자리로 향했다.

“아이고, 이놈 이거. 안 본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컸다고?”

소파로 향하기 전 보모와 동화책을 보고 있던 승현이를 얼른 들어 안았다.

“누가 옷 이렇게 예쁘게 입혀 줬어? 엄마야? 엄마가 이렇게 예쁘게 입혀 줬어?”

그리고 반나절 동안 까칠하게 자라 버린 턱수염으로 승현이의 보드라운 볼을 몇 차례 비벼 봤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낯선 촉감에 꺄르르 넘어가고 있는 승현이를 얼른 원래 자리로 내려놓고 소파로 향했다.

원수경과 마주 보고 앉아 입고 있던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았다.

곧바로 내가 부탁한 물 한 잔을 가지고 온 함씨가 테이블 위로 그 잔을 내려놓더니 내가 걸어 놓은 재킷을 챙겨 안에 걸어 놓겠다고 말했다.

난 그에 건성으로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원수경에게 물었다.

“승현이 데리고 혼자 먼저 왔나 보네?”

“같이 오기엔 거리가 애매하잖아요. 일 마치고 집까지 왔다가 우리 데리고 다시 여기 오려면 차 안 막히는 시간대라도 한 시간은 잡아야 하니까.”

원수경은 그간 못 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적당히 차가워진 모습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난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나아 보였다.

그전까지 내가 봐 왔던 원수경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많았거든.

항상 눈치 보고 계산하고….

재경가의 일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이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들보다 더 홍준이와 장혜란이의 기분을 맞추기에 급급한 모습들만 줄곧 봐 왔다.

이제 더 이상 시댁 눈치는 보지 않겠다는 건가?

하긴.

일전에 홍준이에게 크게 한번 혼이 난 적이 있다고 했지?

여기저기 여우짓을 많이 하고 다녔을 건데, 그게 내 눈에만 보였을 리는 없지 않겠나.

홍준이도 장혜란이와 별거를 시작하며 적당한 시점에서 괜찮은 방법으로 정태, 원수경이한테 긴장을 잘 심어 준 것 같고, 원수경이도 확실히 강단이 있다.

똑똑해.

그것도 자기 입장에선 기회라면 기회 아니었겠나.

그참에 갑갑하고 무거웠던 가면을 벗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언제쯤 온다는 말은 있었고?”

“30분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 도련님 들어오기 바로 전에 전화가 왔는데, 이제 막 마쳤다고 그러네. 혹시 큰집 형님하고는 연락해 보셨어요?”

큰집 형님?

정엽이를 큰집 형님이라고 부르던데, 순간 헷갈렸다.

이상하게 아주버님이라는 표현보다 그게 더 친근하게 느껴졌거든.

그런 표현이 맞는 표현인가 싶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돈된 원수경이의 마음 상태를 보는 거 같아 내 기분까지 편안해지는 거 같았다.

“안 해 봤는데, 한번 해 볼까?”

나도 내 새끼들 없는 집에 달랑 원수경이하고 둘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정엽이한테 전화를 걸어 봤더니, 이 녀석도 지금 가는 길이라며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꽤 막힌다고 한다.

내비상으로는 도착까지 22분이 찍힌다고.

홍준이야 항상 제일 늦게 도착을 하니, 딱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춰서 들어올 것이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하고 계시지만, 어머님이 많이 섭섭해하고 계세요.”

“왜?”

장혜란이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왜긴. 전화라도 한 통 드려요.”

전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할 일이 태산인데, 안 봐도 되는 얼굴을 내가 뭐 하러 굳이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목소리를 듣겠나.

“형수.”

“응? 왜?”

“회장님이 형수한테 이젠 두 사람 별거 중이니까 엄마 찾아가서 얼굴 비추고 하는 거 불편하다고 하지 말라, 아님 가급적이면 좀 줄여라… 그러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

“그거 되게 유치할 거 같지 않아? 형수는 또 형수 나름대로 그런 소릴 한번 들었으니까 오늘처럼 회장님 봐야 할 때마다 잘못한 거 하나 없이 괜히 불편할 거고.”

“에이, 그거랑 이건 다른 거지.”

“다를 게 뭐가 있지? 둘 다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똑같지 않나?”

찻잔을 들어 혼자 쿡! 하고 웃음 참는 소리를 만들어 내며 원수경이 말했다.

“그렇네. 내가 도련님한테 안 해도 될 말을 했네.”

“각자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내가 형수 취향을 존중하고 있는 거처럼 형수도 내 취향을 존중해 주면 좋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뾰족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

“뾰족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얼굴을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요즘은 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는데 그런 이야기 말고는 딱히 꺼낼 이야기가 없어서 꺼내 봤던 거뿐인데. 그런데 몰랐네? 도련님이 내 취향에 관심이 있는 줄은? 내 취향이 어떤데 그걸 존중해 주고 있었어요?”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자주 찾아가는 거고.”

마치 오랜만에 즐거운 농담 따 먹기를 한다는 듯 유쾌하게 큰 웃음을 터뜨리는 원수경이었다.

“그건 또 그렇네. 오랜만이다.”

“뭐가?”

“도련님하고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 진지하게 주고받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여기에서 내가 하늘 씨 소식까지 물어보면 진짜 말 많은 아줌마 소리 듣게 되는 건가?”

“그런 건 아닌데, 하늘이 소식은 나보다 형수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내가? 내가 무슨 수로?”

“요즘은 나보다 형이 더 하늘이랑 자주 만날걸? 어후, 나보다가 뭐야? 나야 끽해 봤자 일주일에 한 번, 어떨 땐 서로 바쁘고 하면 보름에 한 번 정도 같이 밥 한 끼 하는 정도지만, 형은 스너프 영상 사업 관련해서 이틀이 멀다 하고 하늘이하고 미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뭘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원수경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가 진짜 하늘 씨 안부를 물어본 건가? 잘 지내는 거야 나도 알지. 두 사람 바빠서 자주 못 보는 것도 승현이 아빠 통해 들어서 알고 있고. 결혼 이야기 오고 간 게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관계 발전이 없는 거 같으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나하고 하늘이 관계에 발전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지? 지금 우리 재경은 미래금융의 투자가 계속해서 필요한 상황이고, 미래금융 역시 재경이라는 든든한 투자처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커 가고 있는데, 그게 나랑 하늘이하고의 관계이지, 뭐.”

인상을 찌푸리며 원수경이 말했다.

“그건 너무 건조하잖아. 그래도 결혼인데 진짜 그런 생각으로 하늘 씨랑 만나고 있는 거면 너무 슬픈데?”

원수경이가 이제 봤더니 은근히 재밌는 사람이네.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결혼은 사업이지, 거기에서 무슨 감정을 찾고 슬픔을 찾아?”

“하늘 씨가 지금 그 말 들었음 많이 섭섭해하겠는데?”

“섭섭한 감정 때문에 미래금융이 지금 잡고 있는 기회를 포기할 사람은 아니니까.”

“설마 하늘 씨랑 둘이 있을 때도 지금처럼 이런 이야기들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그러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자체를 안 하지. 사업 이야기 하기 바쁘니까.”

“못 이기겠네. 졌다. 그래도 도련님. 감정을 조금은 챙겨요. 사랑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게 결혼이라지만, 사랑까지 없는 결혼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우리 땐 혼례식 하는 날 배우자 얼굴 처음 보고 그랬다.

그래도 잘만 아들, 딸 낳고 살았다.

“그건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들한테나 적용이 되는 말인 거고. 이제는 마트, 통신 포함해서 재경 이름이 찍힌 월급 명세서를 매달 받아 가는 사람이 7만 명이 넘어. 그 사람들 월급에 구멍 안 나게 만든다는 이유로 온갖 대우, 혜택들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남들처럼 똑같이 살 수는 없는 거잖아. 나는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많은 사람들의 월급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남들처럼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거든. 미래금융. 얼마나 좋은 파트너야? 이미 충분히 고마운 파트너인데, 그런 파트너한테 감정까지 기대한다? 그건 욕심이지. 이미 난 충분히 하늘이하고의 관계에 만족해.”

얼굴이 미소를 걸어 놓고 원수경이 물었다.

“하늘 씨도 도련님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난 아닌 거 같은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와 본 게 아니니까.”

“이런 거 보면 우리 도련님 정말 나쁜 남자라니까? 이러니 하늘 씨 같은 여자도 도련님 앞에선 순한 양이 되는 걸 테고.”

“혹시라도….”

혹시일 리가 없다.

원수경이가 덜 민망하라고 괜히 서두를 붙여 준 것일 뿐.

“나랑 하늘이, 그리고 미래금융과의 관계에 대해서 엄마가 혹시라도 형수한테 물어보면, 대신 이렇게 좀 대답을 해 줘. 나는 우리 재경에 도움이 되는 선택이라면 그게 뭐든 다 할 거라고. 개인적인 감정을 다 비우지 못할 거 같으면, 더는 우리 재경이 하는 일에 불필요한 관심은 안 가져 주면 고맙겠다고 말이야.”

“…….”

“진짜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라면,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내 계획, 내 계산이 다 선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데 그걸 자기 마음 조금 불편하다고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지금 이 타이밍에서만큼은 형수가 엄마 말고 내 편을 들어 줬음 좋겠네?”

“가족들끼리 네 편 내 편이 어디에 있어요? 도련님도 참….”

“그런 게 왜 없어? 남이야 마음 안 맞으면 서로 평생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게 안 되는 게 가족인데 당연히 그런 게 더 있을 수밖에. 나는 일전에 회장님이 형수가 하고 있는 계획, 형수가 하고 있는 계산을 힘으로 찍어 누른 적이 있단 소리 듣고 그건 크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

“…….”

“그렇게 다 일일이 참견하고 간섭하고 컨트롤을 할 거면 그에 맞는 보상이라도 좀 해 주면서 그러든가. 나는 지금 형수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진심…이에요?”

진심이다.

“형한테는 형수가 꼭 필요해. 착한 아들, 착한 형, 착한 장남 콤플렉스. 거기에 그런 걸 잔뜩 끌어안고도 혼자 힘으로 다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대단하고. 그런 거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잖아.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형수 입장에선 그거 상당히 숨 막히는 걸 거야.”

“우와… 내가 오늘 여기에서 이런 위로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거 봐. 위로라는 말이 바로 툭 튀어나오잖아.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바로 눈앞에 탐나는 물건들을 잔뜩 깔아 줘 놓고 그 물건들에 눈독을 들인다고 속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 비정상인 거지. 형수가 가지고 있는 욕심, 목표… 나 그거 다 진심으로 응원하는데, 형수.”

“…응?”

“나는 그 욕심이 형한테 도움이 되는 욕심이길 바라지, 우리 재경에 피해가 될 수도 있는 욕심은 아니길 바라. 그런 것만 아니라면 현재 스코어상으로는 난 형수 편이야.”

“…….”

“진심이야. 난 착하기만 한 사람보다, 욕심 앞에 솔직하고 그 욕심을 좋게 발전시키는 사람이 진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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