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제대로 된 계산.
그 말 앞에 홍준이뿐 아니라 정태, 정엽이, 원수경까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날 쳐다보며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냈다.
“스위트럼. 그 사업의 베이스인 삐에르 에슈메의 마카롱과 티라미수 레시피. 그거 확보하는 데 1.5밀리언 유로를 썼습니다.”
한층 더 깊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정태가 날 쳐다봤다.
“그거 제가 식품으로 옮겨 가기 전에 제 사비로 산 거거든요. 삐에르 에슈메 사장을 직접 만나서. 레시피 자체는 제 건데 정작 돈은 식품이 벌고 있어요. 저한테 레시피에 관한 로열티는 한 푼도 안 주면서.”
표정이 심각해지고 있는 정태와는 달리 홍준이의 양쪽 광대가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 정도 장난 정도야 애교로 받아 줄 수 있어야지.
“그런데 제가 이걸 가지고 식품 사장한테 레시피는 내가 내 돈을 주고 산 거니까 그에 맞는 로열티를 나한테 주거나, 아님 레시피를 저한테 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걸로 문제 삼을 사람이 있겠냐만, 결국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회사 내 위치를 이용해 사익을 챙기려는 배임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지. 그 사업을 네가 진행을 시킨 게 아니라면 몰라도 네가 산 레시피를 가지고 네가 진행을 시킨 사업이니 결국 그걸 식품에서 너한테 따로 레시피 이용에 관한 로열티를 준다거나 레시피를 너한테 사게 되면 문제가 되지.”
“그거 회장님이 저한테서 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식품의 사업 방향성을 넓히기 위해 제 사비로 그 레시피를 샀던 겁니다. 그리고 그 레시피로 스위트럼을 론칭시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가지고 식품 사장한테 생색을 내고 싶지도 않고, 그 레시피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그래 버리면 남들 보기에 얼마나 보기가 안좋겠습니까?”
“1.5밀리언 유로를 줬다고?”
“살 때 그렇게 주고 샀죠.”
“살 때 그렇게 주고 샀다? 그럼 뭐 더 얹어서 값을 쳐 달란 소리야?”
그때부터는 정태의 표정도 말랑하게 녹아 있었다.
“빵값, 짜장면값, 김밥값, 국밥값… 다 올랐는데, 파는 사람 입장에선 당연히 더 받고 싶죠.”
“그래서 얼마 쳐주면 되겠냐?”
“1.5밀리언 유로. 저도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그 1.5밀리언 유로를 주고 산 삐에르 에슈메의 레시피 가치가 지금은 얼마나 될는지. 다들 얼마 정도를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정엽이 형 생각은 어때? 우리 마카롱이랑 티라미수 먹어 봤잖아. 스위트럼 성장 속도도 옆에서 지켜봐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고. 얼마까지 내가 불러도 될 거 같아?”
“너 지금 혹시 이거 진지한 거야?”
“꽤나.”
갑자기 왜 이런 엉뚱한 분위기를 연출시키는 거냐는 듯, 정엽이는 나와 홍준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애꿎은 자기 뒤통수만 긁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른 정태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손정태 사장님 생각은 어떠실지 궁금한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눌 내용은 아닌 거 같다, 정훈아.”
하지만 홍준이도 내심 녀석들의 생각이 궁금한 듯, 내가 지른 불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나눌 내용도 아닌 거 같은데?”
홍준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태 네 생각은 어때? 정훈이 말 들어 보니까 계산을 정확하게 해 주는 게 맞겠네. 너는 스너프에서 지금 스위트럼을 영업해 주고 있으니까 브랜드 가치가 어디까지 올라가겠다 하는 감이 있을 거 아냐. 정훈이 말대로 그 레시피가 없었으면 애초에 시작이 불가능한 기획이었고.”
“아버지….”
“아냐.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거 없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중요한 내용을 정훈이가 짚은 거고. 내가 사야지. 이걸 사업이 다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식품 통해서 정훈이한테 레시피를 사라고 하는 건 문제가 될 수가 있어. 이건 레시피 관련해서 교통정리를 못 한 편 사장한테 일차 책임이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정훈이가 사비로 샀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깜빡하고 있었던 내 실수가 분명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내 돈 주고 사서 식품에 쓰라고 그냥 주는 수밖에 없는 게 맞아.”
그제야 정태도 내가 이런 장난을 걸고 있는 이유를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아니까 날 똑바로 못 보는 거겠지.
약한 놈.
가족들 상대로 저렇게까지 마음이 약해서 어디에다 쓸까.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정태가 내게 물었다.
“레시피 계약할 때, 그 계약 조항에 신메뉴 관련된 레시피도 공유를 받도록 그렇게 한 거야?”
“공유도 받고, 또 우리 쪽에서는 고비드 아이스크림 쪽과 콜라보로 일으킬 수익에서 일정 부분 로열티를 떼 주겠다고 약속했어.”
홍준이를 쳐다보며.
“현실적인 가격을 말씀드려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오로지 제가 생각하는 레시피 가치를 값으로 매깁니까?”
“네가 생각하는 레시피 가치가 현실적인 가격보다 크게 비싼 모양이네?”
재밌다는 얼굴로 홍준이가 물었다.
“어쨌든 스위트럼은 삐에르 에슈메의 명성을 등에 업고 있는 브랜드로 소비자들이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마카롱 하나, 티라미수 하나의 레시피로만 볼 수가 없는 사업이 되어 버렸고, 그걸 만든 게 정훈이니까요. 그리고 삐에르 에슈메를 상대로 마카롱, 티라미수 레시피를 1.5밀리언에 받아 낸 거 자체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
“진짜 현재 스위트럼으로 만들어 낸 그 레시피 가치로만 값을 매길 거면… 정훈이가 부르는 대로 주셔야죠. 지금 저한테 그런 사업 소스가 있다고, 얼마에 그 레시피를 사겠냐고 누가 물어보면… 저는 50억까지는 불러 볼 거 같습니다.”
“50억? 내가 그걸 정훈이한테 주게 되면 정훈이 저놈은 1년도 안 돼서 1.5밀리언을 주고 산 레시피를 가지고 두 배 반 떼기 장사를 한 게 되는 거네?”
“그게 어떻게 오로지 1.5밀리언짜리 레시피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정훈이가 식품에서 다른 기획들이랑 잘 엮어서 프로젝트를 차례차례 성공시켜 내고 있기에 가능한 거죠.”
정태의 대답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홍준이가 내게 말했다.
“네 형 하는 말 들어보면 50억은 줘야 한다 그 말인 거 같은데, 그건 너무 세다. 가족 할인 같은 거 좀 없냐?”
정태가 통신 자리 때문에 나한테 꽤나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네.
그걸 50억까지 불러 준다고?
콜.
만들어 주는 데 내가 안 받을 이유는 없지.
“두 배 반 장사라고 하셨는데, 깔끔하게 뒷자리 반 떼 버리고 그럼 저는 두 배 장사만 하겠습니다.”
“40억?”
“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정태를 쳐다보며 홍준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거 너희들끼리 미리 짜고 내 주머니 터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이거 내가 이렇게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는 게 맞는 거야?”
“그런 거 같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상.”
“그래, 줘야 하는 거면 줘야지. 오늘 비싼 밥 먹네. 정훈이.”
“네.”
“내일 중으로 입금시켜 줄 테니까, 너는 네 명의로 가지고 있는 레시피 식품으로 돌려놔.”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원수경은 본가까지 타고 온 차에 보모만 타게 하고 승현이와 함께 남편의 차에 올랐다.
승현이는 정태가 안았다.
“참 돈 벌기 쉽네.”
원수경이 말했다.
“정훈이 말이야. 앉은 자리에서 말 몇 마디로 현찰 40억을 만들어 내. 정말 대단해. 지금까지 해 온 게 결국은 다 미래금융 배경도 아니고 운도 아니었던 거야.”
“당신한테는 아까 그 식사 자리에서 정훈이가 레시피 이야기를 꺼낼 때 그런 거밖에 안 보였어?”
“다른 게 뭐가 더 있었나?”
“진짜 돈을 받아 내겠다는 게 아니라 나랑 아버지 상대로 애교를 부린 거였잖아.”
“애교?”
어둠이 짙게 깔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정태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아버지한테는 나한테 통신 사장 자리 먼저 맡겨 보는 거에 불편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한테는 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거에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
“유쾌하게 친 장난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거야. 나는 그걸 그렇게 크게 불러 줌으로 인해, 아버지는 또 용돈 주듯 그 돈을 줌으로 인해 서로가 불편한 상황은 없도록 만들자고. 정훈이가 하는 생각이… 이젠 내가 애를 안 쓰면 따라가는 것도 힘들어.”
“왜 꼭 당신이 정훈이 생각을 따라가야 해?”
“뭐?”
원수경은 남편 품에서 잠든 승현이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겨 놓고 이야기했다.
“당신은 당신이야. 정훈이는 정훈이고. 누가 형제 아니래? 형제야. 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인 거고. 왜 당신이 정훈이의 생각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거기에 맞춰 줘야 해?”
“…….”
“당신이 최고야.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주위에서 당신이랑 정훈이를 놓고 무슨 평가를 어떻게 하든, 당신이 그렇게 쫓아다니며 안 챙겼음 지금의 정훈이도 없었어. 당신 말대로 정훈이가 통신 자리에 욕심을 보인 당신한테 미안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런 장난을 친 거라고 해도, 그간 당신이 정훈이한테 했던 걸 생각하면 정훈이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맞는 거야. 그걸 당신만 몰라.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알면서도 인정을 못 하는 건지는 몰라도.”
“…….”
“낮에 병원 갔다 왔어.”
“병원? 무슨 병원?"
차창 밖으로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둬 원수경을 쳐다보며 정태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6주 차래.”
“……!”
“혹시나 해서 승현이 아줌마들한테 맡겨 놓고 혼자 가 봤는데, 승현이 동생이 생겼다네.”
“그런데 술을 받았어?”
“살살 말해. 승현이 깨.”
“…….”
“축하주. 그냥 받아 놓기만 한 거야. 한 잔도 다 안 마셨어. 당신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려고 아까 그 자리에서 일부러 꾹 참았어. 딱히 내가 이야기를 꺼낼 기회도 없었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벼 대며 정신을 차린 정태는 얼른 원수경의 배 위로 한쪽 손을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는 승현이를 끌어안은 채 말했다.
“아… 미리 좀 말이라도 해 주지. 축하해. 잘했어. 진짜 잘했어.”
“승현이한테는… 동생을 안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됐어.”
자신의 품속에서 살짝 뒤척이는 승현이를 쳐다보며, 정태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그런 말이 있어?”
“나는 벌써부터 걱정이네. 지금 우리가 승현이한테 주고 있는 관심과 사랑이 동생이 태어난 뒤로 반으로 줄어들까 봐.”
아니었다.
원수경은 속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지어내고 있는 거뿐이었다.
자신도 심란했기 때문에.
이렇게 덜컥 승현이의 동생이 생길 줄 몰랐기 때문에.
잠든 승현이의 볼을 쓰다듬고 있는 원수경의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남편과 시아버지가 도착하기 전, 본가에서 정훈이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금 형수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 욕심이 형한테 도움이 되는 욕심이길 바라지, 우리 재경에 피해가 될 수도 있는 욕심은 아니길 바라. 진심이야. 난 착하기만 한 사람보다, 욕심 앞에 솔직하고 그 욕심을 좋게 발전시키는 사람이 진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정훈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내기 위해 고개를 내저은 뒤 원수경이 정태에게 말했다.
“진짜 이상해.”
“뭐가?”
“병원에 가서 6주 차란 소리 듣기 전까지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승현이한테 동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승현이도 충분히 당신 같은 좋은 형, 오빠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기는 거 있지?”
“…….”
“나 안 취했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렇게 가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추석 연휴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흘러갔고, 그렇게… 모두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