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63화 (263/303)

263화 누군지 알아요?

하늘이는 내게 그 결혼식에 왜 직접 가느냐고 물었다.

정현수 과장의 결혼식.

정말 마음이 있다면 송금을 하든, 아님 다른 사람을 통하든 축의금 정도만 전달을 하는 걸로 대신 성의를 보여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지금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식품 쪽 직원도 아니고, 모직 인사부 직원의 경조사까지 다 챙기는 건 오바가 아니냐고 하던데,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 과장은 모직에 같이 있을 때부터 괜히 따로 챙겨 주고 싶은 친구였다.

하물며 어렵게 용기를 내어 결혼 소식까지 내게 알려 주고 청첩장까지 보냈는데, 안 갈 이유가 없는 거지.

“신부 입장.”

식 중간에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식이 다 끝나고 지하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된다고 쿠폰을 나눠 주던데, 지금 고민 중이다.

가서 국수라도 한 그릇 비워 주는 성의를 보여 줘야 하는 것인지, 아님 다른 모직 직원들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식만 보고 빠져 주는 게 맞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부 입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신부 대기실이 바로 옆에 붙어 있던데, 따로 실물을 보지는 못했고 행사장 앞으로 걸려 있는 웨딩 사진으로만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 과장과 똑같이 생겼다.

이목구비는 당연히 다르지.

그런데 풍기는 이미지라든지, 그런 것들이 정 과장과 남매라고 해도 모르는 사람은 믿을 정도로 닮은 사람이었다.

정 과장은 전형적인 인사부의 외모다.

스마트한 인상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절대 엄한 짓은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모범생의 이미지.

정 과장과 백년가약을 맺고 있는 신부도 무척이나 반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원탁 테이블.

한 테이블에 하객 4명이 여유롭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넓게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 테이블로 나와 고성표 본부장, 오랜만에 만난 모직의 김원호 부장과 박종근 차장이 함께 앉았다.

“박 차장은 아예 그냥 혼자 있기로 한 거야?”

고성표 본부장의 쓸데없는 소리에 박 차장은 애써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미소를 지었다.

“혼자가 편해요.”

“그게 뭐가 편해? 나이 더 차기 전에 박 차장도 준비를 좀 해 봐.”

이 친구는 또 남의 결혼식에 와서 왜 애꿎은 박 차장을 잡고 난리야?

고 본부장은 결혼식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박 차장을 붙잡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이어 갔다.

“지금은 모른다. 아직 마흔 안 됐지? 딱 마흔 중반만 넘겨 봐라. 그때부터는 되돌릴 수 없는 불안감이 시작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나서 계속 이러시깁니까?”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 아냐. 나도 자네한테 국수 한 그릇 얻어먹어 보자.”

“언제든 국수 생각나실 때 전화 주세요. 제가 한 그릇 아니라 두 그릇, 세 그릇, 이사님 드시고 싶으신 만큼 다 사 드릴 테니까.”

그렇게 고 본부장의 쓸데없는 잔소리가 잠잠해질 즈음이었다.

김원호 부장이 나와 고 본부장에게 물었다.

“식사하고 가실 거죠?”

마치 당연히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나는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같이 내려가서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게 뭐가 문제겠나.

하지만 남의 잔칫집에 와서 하객들의 주목을 내가 다 빼앗아 가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싶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부터도 식장 로비에서 정 과장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내가 얼굴이 많이 팔려 있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하객 중 많은 수가 모직의 직원들이기도 했다.

과연 내가 다 같이 국수를 얻어먹으러 내려가는 길에 함께한다면 나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사람들, 괜히 안해도 될 조심을 할 모직 직원들이 여럿 나올 거 같은 기분이었다.

김 부장의 물음에 고 본부장은 내 의사가 더 중요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같이 가시죠.”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박종근 차장이 거절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버렸다.

“저희 인사부 직원들 모두 오늘 정 과장 결혼식에 상무님도 오실 거라고 해서 기대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기대는 무슨….”

“상무님은 모르시는 신입 직원들도 있고, 그 직원들도 상무님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해요. 간만에 저희 인사부 기 한번 살려 주십시오. 지금 민 과장이 벌써 신입들 몇 명 데리고 뷔페식당에 내려가 있어요.”

“식은 안 보고?”

“눈 한 번 깜짝하면 다 끝나 있는 게 대한민국 결혼식인데, 인사부 직원들 최대한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 확보하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죠.”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중에 식 끝나고 사진 촬영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설마 내가 지금 틀린 말 한 건가?

왜 다들 날 저런 눈으로 쳐다보지?

“요즘 누가 회사 동료 결혼식 사진에 자기 얼굴 남기려고 합니까.”

씁쓸하게 웃으며 고 본부장이 말했다.

그리고 김원호 차장이 말을 받았다.

“저희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게 특히 심해졌죠. 진짜 친한 동료나, 바로 위아래 기수 선후배 아니라면 회사 동료 결혼식에 축의금 들고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가능하면 사진 같은데 자기 흔적을 최대한 안 남기려고 하는 게 요즘 직장인들 마인드이기도 하고요.”

굳이 그 이유까지 들을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해 보니까 그렇네.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래된 유물 취급을 받고 있는 요즘.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5년 이상 근속을 장기 근속으로 인정을 해 주는 문화이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자기는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직장 동료 결혼식만 쫓아다니며 축의금에 쓰는 걸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생각 안 하는 게 이상하지.

“민 과장은 그래도 같이 사진 정도는 찍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입사 시기만 놓고 보면 정 과장이 훨씬 선배이지만 어쨌거나 과장 승진을 같이했으니….

“민 과장은 자리 확보하는 거 확인만 해 주고 올라올 겁니다.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민 과장이.”

“무슨 애요?”

“맨날 지지고 볶고… 정 과장이나 민 과장이나 결국은 두 사람이 각각 HRO, HRD를 맡아 나가고 있는 거잖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가면서 절 찾아옵니다. 이건 이렇게 해서 HRO가 문제고, 이건 이렇게 해서 HRD가 교육 자료를 너무 성의 없이 만든다… 그렇게 맨날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다가도, 막상 정 과장이 결혼을 한다니까 자기가 손발 걷어붙이고 저렇게 준비를 하네요.”

궁금해졌다.

내가 빠진 모직의 인사부.

과연 지금은 어떠한 새로운 신입들이 들어와 있고, 또 어떻게 굴러가고 있을지….

마침 내가 결혼식에 참석을 한다고 뷔페식당에 따로 자리까지 마련 중이라고 하니 못 이기는 척 고 본부장과 함께 내려가서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다.

* * *

진짜 딱 국수만 한 그릇 얻어먹고 가야겠다… 하면서 뷔페식당으로 내려갔는데, 그게 생각처럼 될 리가 있나.

막상 내려가니까 인사부 직원들이 자리를 아주 넓게 확보를 해 놓고 있었다.

독립된 룸은 아니었지만, 파티션이 군데군데 처져 있었고, 딱 봐도 결혼식이 없는 날은 소규모 돌잔치 같은 걸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공간을 운 좋게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인사부 직원들이 다 같이 앉을 수는 없었고, 나와 고 본부장을 안쪽에 앉게 만든 뒤 직급별로 둘러앉는 식으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당연하다는 듯 술을 따기 시작하는 직원들과 먼 테이블에서 내게 인사를 하러 찾아오는 다른 부서 직원들.

거기에 폐백을 끝내고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내려온 정 과장 부부까지 찾아오다 보니 운전 때문에 술잔을 피하기만 하던 고 본부장도 결국 백기를 들고 술잔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져 버렸다.

“새신랑, 신부가 주는 데 안 받을 수 없는 거 아냐. 에이, 모르겠다. 그래, 마시자!”

정 과장이 들고 있는 소주잔을 맥주잔으로 바꿔 놓고, 그 안으로 소주를 절반 이상 크게 따라 준 고 본부장.

자신 역시 지금껏 참았던 걸 이 한 잔으로 보상받겠다는 듯 빈 맥주잔을 내밀며 거기에 소주를 따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일어났던 거다.

새신랑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 본부장하고 저렇게 세게 한 잔 마신 후 나랑도 마셔야 할 건데, 그건 새신랑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오겠다 약속을 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정 과장님 결혼식인데. 나랑은 다음에 따로 한번 자리 가집시다. 그리고 매일 보는 회사 사람들한테 너무 얽매여 있지 말고 신부 측 하객들 위주로 챙기세요.”

난 고 본부장 이하 다른 인사부 직원들의 동의를 구하듯 정 과장의 잔에 내 잔을 붙였다.

“이것만 한잔하고, 얼른 다른 테이블 인사하러 가세요.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

한 시간 정도?

그것보다는 조금 더 오래 있었나?

아무튼, 김원호 부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낮술치고는 조금 많이 마시게 됐다.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 그리고 식품으로 옮겨 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 이야기가 고 본부장 중심으로 이어졌고, 처음 보는 인사부 신입 직원들과 인사 겸 술잔을 나누다 보니 그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린 거다.

“우리도 이쯤에서 그만 일어나죠? 다른 테이블 보니까 다들 일어나는 분위기 같은데….”

아마 정 과장 결혼식 다음으로 또 다른 커플이 이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는 모양이었다.

뷔페식당 직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었다.

다음 타임의 결혼식 하객들을 받기 위해 얼른 테이블을 재정비해야 하는 듯, 불안하게 아직 식사 중인 테이블을 힐긋거리는 직원들의 모습에 괜히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었다.

“본부장님도 차 가지고 오셨죠.”

박 차장이 물었다.

“네.”

“그럼 대리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괜찮아요. 운전해 줄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럼 이사님은요?”

고 본부장은 불러야 한다.

“나는 불러야 해.”

“그럼 일어서기 전에 밖에 날도 추운데, 여기에서 콜을 해 놓고 자리를 정리하는 걸로 하시지요.”

현재 차를 가지고 온 인원수를 체크한 뒤, 인사부 직원 몇몇이 열심히 폰으로 대리 기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콜이 잡히고 5분 안에 도착을 할 거 같단 연락을 받은 뒤에야 우린 다 같이 우르르 지하 주차장 쪽으로 내려갔다.

마침 나는 정재현 과장이 차를 빼기 쉬운 공간에 주차를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라 고 본부장 차량을 운전해 줄 대리 기사가 오기 전까지 인사부 일행에 끼어 김 부장, 박 차장과 식사 중에 나누지 못했던 남은 대화를 마저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 본부장의 차량을 운전해 줄 대리 기사가 도착을 했고, 곧바로 김 부장과 박 차장이 함께 타고 갈 차량을 운전해 줄 대리 기사도 도착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이건 내가 눈치를 채고 자시고 할 내용이 아니기도 했고.

기분 좋게 한잔하고, 모직 인사부 직원들과 헤어졌는데 운전대를 잡은 정재현이가 밀려 있는 차량들 속으로 끼어들며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본부장님.”

“네.”

“모직에서 식품으로 넘어오실 때, 같이 넘어오신 분이 조동희 전무님과 고성표 본부장님 말고 더 있었습니까?”

“아뇨. 그 두 분만 제가 특별히 부탁을 드려서 함께 넘어왔던 거예요.”

“그런데 아까 고 본부장님 차 말고, 그 뒤에 곧바로 따라간 차량은 왜 우리 식품 직원이 운전을 하는 겁니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정재현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술을 몇 잔 받기는 했지만, 취할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저 밑도 끝도 없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고 본부장 차 바로 뒤라고 하면 박종근 차장의 차다.

박 차장이 자기 차로 김 부장을 태워서 같이 왔다고 했으니까.

그 차를 왜 우리 식품 직원이 운전을 해?

“아까 고 본부장님 가시고 나서 바로 뒤에 차요.”

“알아요. 내가 봤잖아.”

“그 차… 아닌데? 분명히 우리 식품 직원이었는데?”

“대리 부른 거예요. 대리 기사야.”

그제야 나도 그렇고 정재현 과장도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정재현 과장이 자기도 모르게 내놓고 있는 소리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주말에 따로 대리 운전을 하나 보네요.”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확실해요? 사람 잘못 본 건 아니고?”

“아뇨, 거의 매일같이 보는 사람이라서 제가 잘못 본 건 아닙니다.”

“누군데?”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어느 부서의 누군지 알아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