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모든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짤막한 노크 후 사장실 문을 연 내게 편 사장이 다가와 물었다.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안 모양이다.
“어… 5분만요.”
“네?”
우선은 소파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5분은커녕, 1분도 기다려 주지 못하는 편 사장이었다.
“저 지금 제 방에서 이 방으로 잠시 도망 온 겁니다. 하하.”
“도망이요?”
이게 웃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고 본부장, 인사부장을 함께 내 방으로 불러 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정리한 내 모습이 솔직히 좀 우스웠다.
그만큼 내가 당황을 했었다.
낸들 전세 사기라는 답답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알았겠나.
그렇다고 아침부터 인사부장한테 전화를 넣어 해당 직원을 상대로 개인 면담까지 해 보라고 했는데, 겸업 금지 조항이라는 취업 규칙을 어긴 직원의 사정이 딱하니 모르는 척 눈감아 주자는 말도 이미 늦은 거였다.
“뭔데 그러십니까?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같이 좀 알고 함께 웃어 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장님.”
“네.”
마침 인사부장이 챙겨 온 도성훈 과장의 인사 고과 평가서를 내가 들고 있었다.
그걸 펼쳐서 도성훈 과장의 나이와 과장 호봉을 확인한 뒤 편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서른다섯 때 뭐 하고 계셨습니까?”
편 사장의 사무실로 장소를 옮겨, 한 뜸 식히고 보니 이번 사안을 어떻게 정리를 해 줘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뭐 하긴요.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며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죠.”
난 다시 한번 도성훈 과장의 작년 인사 고과 평가서를 쳐다봤다.
도성훈 과장의 나이가 서른다섯이었다.
“꼭 회사에서뿐만 아니라요.”
“서른다섯이요? 제 서른다섯 때는… 정말 바빴네요. 회사 안에서 제 뚜렷한 목표도 딱 그때쯤 세워졌던 거 같습니다. 학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스물아홉에 장가가서 바로 그해에 첫째가 태어나고, 또 2년 있다가 둘째 태어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흔들리지 않을 자리를 잡아야 했던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제가 해야 할 역할이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하고요.”
“그때 사장님은 직책이 어떻게 됐습니까?”
“과장이었죠. 서른일곱에 제가 차장을 달았거든요.”
“서른다섯 때 사장님은 과장에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였네요.”
“그랬죠.”
“그때 사시던 집은 자가였습니까?”
마치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하지만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편 사장이 대답했다.
“네. 첫째 때까지는 엄두를 아예 못 내고 있다가 과장 승진하고 또 곧바로 둘째가 태어나니까 애들 엄마가 푸시를 많이 하더라고요. 더 늦기 전에 빚을 내어서라도 내 집 마련을 해야 한다고. 결국 애들 엄마 말 듣길 천 번 잘한 거였죠.”
“사장님은 서른다섯에 결혼도 하고, 애도 둘씩이나 있는 상태에서 내 집 마련까지 성공을 하셨네요.”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사장님처럼 세팅을 깔끔하게 해 놓는 게, 그게 그렇게까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 말에 편 사장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나도 충분히 안다.
편 사장 눈에 비치는 나는 어디까지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일반 서민들이 하는 고민은 전혀 해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재경가의 차남일 뿐 아니겠나.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재경식품 QA팀의 2년 차 과장.
작년 기준 연봉 8.900.
세후 월 실수령 600 수준.
타고 다니는 차는 구식 아반떼.
도성훈 과장은 정말 열심히, 큰 사치 없이, 의미 없는 플렉스 같은 거 하지 않고 보수적으로 대기업에서 자기 커리어를 쌓아 왔다고 봐야 한다.
인사부장이 가져다준 도성훈 과장의 작년 인사 고과 평가 내용만 봐도 충분히 미뤄 짐작을 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거냐고 물으시는 건 지금의 서른다섯을 기준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내가 들고 있는 도 과장의 인사 고과 평가서를 눈짓하며 편 사장이 물었다.
“네.”
“모든 건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봅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서 다 해야 한다는 가정하에, 그리고 대기업을 다닌다는 가정하에 지방이라면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서울은 힘들다?”
힘들기 때문에 회사가 함께해 줘야 한다는 생각.
“서울은 불가능이죠.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면서 악착같이 숨만 쉬면서 모아도 해도 불가능입니다. 회사 몰래 투잡, 쓰리잡을 뛰지 않는다면. 하지만 대기업 생활을 하면서 정신력으로 투잡까지는 몰라도 무슨 수로 쓰리잡까지 뛰겠습니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투잡 이야기를 꺼내길래 편 사장에게 물어봤다.
“사장님은 현재 우리 재경식품에 겸업을 하는 직원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과연 어디까지를 겸업이라고 봐야 하고, 어디까지를 겸업이 아니라고 봐 줘야 하는지, 그 기준부터가 무척 모호해진 시대이긴 합니다.”
“…….”
“자기 취미 생활로 퇴근 후 블로그 활동이나 SNS 같은 걸로 수입 활동을 하는 걸 더는 겸업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자기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회사 업무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거나 가족, 배우자 명의로 함께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경우가 부쩍 늘면서 겸업 금지 조항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벌써 몇 년이나 됩니다.”
“…그렇죠.”
“주식은요? 주식이나 부동산도 결국은 수입을 창출시킬 수 있는 일종의 경제 활동인데 그걸 아무런 노력 없이 오로지 운에만 의존해서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렇게 따지면 주식, 비트코인, 부동산… 그런 것들도 보기에 따라선 겸업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편 사장의 의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스마트폰이라는 게 있음으로 인해 잠시 쉬는 시간, 혹은 점심시간 동안 그걸 붙잡고 주식 차트를 보거나 부동산 시세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런 거에 비하면 대리운전은 오히려 퇴근 후에 하는 일이기에 더 너그럽게 봐 줘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참 어려웠다.
“제가 서른다섯이었을 때에도 제 주위 친구들 중에 부모님 도움 없이 자가를 구입한 경우는 무척 드물었습니다. 저야 아이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그래도 애들 엄마의 당시 유일한 취미가 가계부를 쓰는 거였을 정도로 짠 내 나게 살림을 살아 줬고, 또 은행 금리 자체가 지금이랑은 비교가 아예 안 되던 시절 아닙니까. 아, 이건 본부장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안다 치고.”
“그때만 해도 행복 배틀을 조장하는 SNS 같은 게 있었습니까, 아님 요즘처럼 오마카세니 뭐니, 워라밸, 소확행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까? 일년에 한 번씩 하는 해외여행? 하! 그땐 지금처럼 대한민국 여권 들고 비자 없이 바로 떠날 수 있는 나라도 몇 군데 없었습니다.”
편 사장은 천지가 개벽을 한 거라는 걸 내게 알려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마냥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난 또 그 모습이 우스워서 맞장구를 쳐 주며 들어 주고 있었고.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되어 버린 겁니다. 구석기에서 청동시 시대로 시대 자체가 바뀐 것처럼요.”
다 아는 내용, 다 공부를 한 내용, 다 체감을 하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을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해 본 경험자의 입을 통해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생활 물가는 20년 전, 30년 전과 비교해 몇 배나 올랐는데 월급은 그대로다? 아니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20년, 30년 전에도 한 그릇에 6천 원, 7천 원 하는 순댓국밥집은 있었고, 지금도 잘 찾아보면 5천 원, 6천 원짜리 순댓국밥집이 더러 있습니다.”
어쩐 일로 편 사장 이 친구가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기 주장을 펼치네?
해당 내용에 관해서는 무조건 나보다 자기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 시대를 살아 보지 못한 내가 그 시대를 거쳐 지금에 있는 편 사장보다 더 정확한 현실을 알 수는 없는 거겠지.
“반대로 물가 성장률에 비례해서 최소한 중견급 이상 대기업의 연봉 수준은 꾸준히 함께 올랐습니다. 최저 시급은 30년 전 제가 군대 전역하고 호프집에서 알바를 했을 때와 비교를 하면 거의 여섯 배, 일곱 배가 올랐습니다. 다만 오른 생활 물가, 비슷한 비율로 오른 연봉 수준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요즘 젊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더 크게 올라가 있다는 게 문제겠죠. 그럴 수밖에요. 모든 사람의 목표인 집값이 네 배, 다섯 배가 올라 버렸는데 한 봉지 500원짜리 라면이 1,000원, 1,200원 하는 거랑 3억, 4억 하던 집값이 10억, 15억 하는 건 느낌 자체가 다른 거니까요. 어쩔 수 없는 포기라는 게 당연시되어 버리는 거죠.”
이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다.
물가 성장률에 비례해서 최소한 중견급 이상 대기업의 연봉 수준은 꾸준히 함께 올랐다는 말.
이 내용은 내가 모직에서 식품으로 옮기기 전부터 인정을 하고 있었다.
모직, 패션은 원래 업계 자체가 박봉이다.
반명에 식품은 어느 정도 전자나 자동차 쪽과도 크게 비교를 안 당할 정도로 정상적인 수준이고.
모직에 비해서 식품 쪽, 특히 연구, 개발 쪽은 비록 일은 3D에 가깝지만 최소한 보수만큼은 그 고된 업무량을 감수할 수 있게끔 만들고 있었다.
한 봉지 500원짜리 라면이 1,000원, 1,200원으로 오른 것과 3억, 4억짜리 아파트 한 채가 10억, 15억으로 오른 게 어떻게 같은 거겠냐는 그 말에 다시 한번 허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허튼 웃음 속에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으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부분에서 오는 안도의 웃음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었던 것 같다.
편 사장에게 도성훈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다.
지난 주말, 모직의 인사부 과장 결혼식에 참석을 했다가 우연히 우리 식품, 그 안에서도 QC팀 과장이 대리운전을 겸업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내용.
그리고 조금 전 지원 본부장과 인사부장을 내 방으로 불러 그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도성훈 과장이 전세 사기를 당해 행복해야 할 신혼 생활을 지옥처럼 하고 있다는 내용.
회사 업무에만 집중을 해 줘도 부족할 QC팀 과장이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까지 대리운전을 투잡으로 뛰고 있다는 내용에 사안의 심각성은 눈치챈 편 사장.
그는 몇 차례 헛기침을 하며 목 근육을 풀어 봤지만, 내 앞에서 어떠한 입장을 내놓아야 하는 것인지 방향을 못 잡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편 사장에게 내가 말했다.
“분명 내용은 심각한 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사부에서 도성훈 과장 개인에게 적당한 경고 조치를 하는 것으로 큰 문제를 삼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일 겁니다.”
“…네.”
“하지만 사연 없는 사람, 사정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사가 그런 걸 다 들어줄 수도 없는 거고요. 회사가 모른다뿐이지, 다른 부서, 생산 라인, 혹은 연구소 쪽에 또 다른 도성훈 과장이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죠.”
“그런 걸 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인정만 하면 결국 조직은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겁니다. 조금 전 고성표 본부장한테 우리 식품 안에 전세 사기의 또 다른 피해자는 없는지 전수 조사를 부탁해 놨습니다. 그 전수 조사 끝나는 대로 사장님께서 임원회를 한번 열 어주시죠.”
“…….”
“최선의 사람 관리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하는 겁니다. 현재 우리 식품, 더 나아가 재경 그룹 전체의 인사 시스템이 여전히 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저만의 기분 탓일까요?”
* * *
하루를 꼬박 준비했다.
그리고 본사 법무팀장을 통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내용에 법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들을 확인받았다.
오전 10시.
임원 회의실로 모든 임원이 자리했다.
인사와 관련된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기에 인사부장도 함께 참석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게 될 나의 프레젠테이션이 현 재경에서 내가 떼는 진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모직에서 신입 사원 채용 방식을 바꾸고, 노조를 해산시키고, 그렇게 모직을 업계 1위 자리에 올려놓은 뒤 식품으로 옮겨 온 거?
그런 것들은 사실상 꼭 내가 아니라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는 사람이라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것들일 거다.
“시작할까요?”
편승일 사장이 분위기를 잡아 주었다.
편승일 사장을 사이에 두고 나와 모범태 전무가 나란히 앉은 자리 정면으로 프레젠테이션용 대형 스크린이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참석한 전 임원 앞으로는 각자의 회의용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대형 스크린은 내가 펼친 노트북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굳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더라도 앉은 자리에서 얼마든지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했다.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의 표지를 마우스로 넘겼다.
그리고 나온 첫 문장.
“많은 회사의 취업 규칙에 겸업 금지 조항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재경식품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고 다시 마우스를 움직여 빈 곳에 새로운 내용이 올라오게끔 만들었다.
“대다수의 직원은 본인이 직접 사인을 한 계약서임에도 그런 내용이 근로 계약서에 들어 있는지를 잘 모를 겁니다. 안다고 해도 그게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 퇴근 후 개인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걸 하겠다는데 그걸 왜 회사가 금지 조항까지 만들어 내는 건지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사 담당자, 관리자들 입장에선 무척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죠.”
또 한 번 마우스를 움직여 이번엔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겸업이라는 행위의 기준이 무척 모호하다는 겁니다. 어느 누군가는 모호한 경계선 밖으로 나가 있다고 다른 경제 활동을 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는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혹은 걸쳐져 있다고 회사에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을 졸이고, 개인 사업자 등록을 하게 되면 회사에서 알게 될까 하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
“우리나라 헌법에 모든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불법이 절대 아니라는 거죠. 다만 회사에서 그걸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뿐입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 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올려 보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는 건 결코 잘못이 아님에도, 이 취업 규칙에 나와 있는 겸업 금지 조항이라는 한 문장 때문에 잘못이 되고 있는 거죠. 재경식품 안에는 과연 지금 현재 얼마나 많은 직원이 잘못을 하고 있을까요? 왜 회사는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하는 우리 직원들에게 그건 잘못이라는 이기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걸까요?”
인정한다.
이게 내가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해도 될 말은 아니다.
나는 겸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반적이지 못했던 시절에 재경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겸업이라는 행위 자체에 누구보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이지 않을까?
그래서 바뀌어 보려고 하는 거다.
내가 먼저 변화할 용기는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변화만 기대하는 건 비겁한 거니까.
“우리 딱 이 한 문장. 겸업 금지 조항이라는 한 문장만 근로 계약서에서 삭제를 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