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돈이라는 건 사람의 그릇만큼 담기는 겁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동희 그룹 본사 전무가 우리 식품을 방문했다.
며칠 전 임원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내용이 그룹 본사 쪽으로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마침 나는 미리 잡혀 있던 오전 외부 미팅 때문에 연구소 건물을 들러 샘스 핫도그 측 관계자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특별히 내가 참석을 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쪽에서 우리 재경식품의 개발 시스템 라인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취지로 임원급 인물이 직접 넘어온다고 하니까 직접 얼굴을 비추면서 내 나름의 성의 표시를 한 거뿐이었다.
2시간 남짓, 그쪽 인물을 데리고 다니며 직접 연구소 수준을 시찰시켜 준 뒤 식품 본사로 돌아왔을 땐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침에 연구소로 넘어가기 전에 편 사장을 통해서 조 전무가 우리 식품 본사를 방문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당연히 잠깐 들렀다가 갈 거라고만 생각을 했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임원층에 도착을 해서 내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데스크 직원이 말을 거는 거였다.
“본부장님.”
“응? 네.”
“본부장님 방에서 지금 그룹 본사 전무님이 들어가 계십니다.”
“내 방에요?”
“네.”
“언제부터?”
“20분? 30분?”
“혼자 계시는 거예요?”
“네. 오전 내내 사장님과 말씀 나누시다가 태영백화점 쪽 외부 미팅으로 사장님 나가고 나신 뒤로 본부장님 방에 들어가 계십니다.”
폰은 놔뒀다 어디에다 쓰려고 그러는 거지?
내 얼굴을 보겠다고 기다릴 거였음 미리 문자라도 한 통 보내 놓든가.
오전 내내 시간을 보냈던 연구소 일정은 사실 빨리 끝내려고 마음만 먹었음 1시간 정도는 충분히 빨리 끝낼 수 있는 스케줄이었다.
원래 그쪽의 한국 방문 목적 자체가 연구소 시찰, 그리고 모범태 전무와의 미팅이었던 거니까.
“혼자 뭐 하고 계세요?”
방 안으로 들어가 조 전무에게 장난스레 인사를 건넸다.
조 전무도 보고 있던 폰을 대충 바지 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재킷 위로 껴입었던 외투를 벗어 소파 등받이 쪽으로 아무렇게나 걸어 놓고 조 전무를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본부장님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복귀를 하자니 아쉽잖아요.”
“얼굴은 누가 봐도 따로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이제는 사람 관상도 봅니까?”
“표정 정도야 우리 사이에 돈 받고 봐 주는 게 민망하니까 그냥 봐 주는 거지, 관상은 비쌉니다.”
내가 던진 농담에 조 전무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리실 거면 전화라도 미리 한 통 하시지 그랬습니까.”
“강인성 차장 말로는 점심시간 전에는 들어올 거라고 하던데요. 따로 점심 약속도 없다고 하고. 잘됐다 싶었어요. 온 김에 겸사겸사 본부장님 얼굴도 볼 겸 같이 점심이나 하고 본사 복귀할까 싶어서.”
“제가 요즘 점심은 가급적 구내식당을 이용한단 말도 강 차장이 같이 하던가요?”
“구내식당이요? 제가 여기에 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면서 일부러 이용을 안 하셨잖아요.”
“제 착각이었더라고요.”
“……?”
“그냥 괜히 직원들 식사하는 데 끼어서 같이 밥을 먹으면 불편해서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한번 해 보니까 딱히 절 신경 쓰는 직원들은 없더라고요. 오늘 메뉴가 생태탕이에요. 괜찮으시면 같이 내려가시겠습니까, 아님 다른 식당을 알아보라고 할까요?”
“그럼 같이 내려가죠.”
* * *
같이 줄을 서서 식판을 받고, 미리 소분된 반찬들을 기호에 따라 옮겨 담은 뒤 빈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 회사 식당에서 본부장님하고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해 보기는 또 처음인 거 같습니다.”
“어제는 편 사장님이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동안 괜히 밖에 나가서 사 먹었습니다.”
주위 다른 테이블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조 전무에게 말했다.
바로 옆 테이블은 아직 비어 있었지만, 그 옆 테이블이나 뒤쪽,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직원들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주고받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 밥을 먹는 등, 나와 조 전무가 앉은 쪽으로 큰 관심을 보이는 직원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모직에 있었을 땐 종종 회사 식당을 이용하셨죠?”
“그때는 같이 일하는 우리 팀이라는 게 있었으니까요.”
“뭔가 그간 제가 못 본 사이에 본부장님 느낌이 아주 가벼워진 거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뭘 잘 몰라서 안 해도 될 조심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게 많았지.
“결국은 그동안 제가 했던 안 해도 될 조심들이 다 소통의 부재에서 나왔던 거 같고, 그런 부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 방식대로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려고 하다 보니 몸이 무거웠던 거 같아요.”
현장에 대한 애착을 크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장 시절 때가 너무 몸에 익어 나란 존재 자체가 현장에선 부담일 거라는 착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요즘 이 시대 직장 생활을 하는 젊은 친구들의 마인드에 대해 너무 몰랐던 거지.
운영 본부장?
회장 아들?
근데 뭐, 그게 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랑 같이 직접적으로 붙어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뭔 상관?
내가 이곳 식당에 밥을 먹으러 내려와도 다들 그런 느낌으로 날 한 번 스윽 쳐다보는 게 끝.
딱히 날 조심하는 사람도, 날 어려워하는 사람도 임원급 밑으로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구내식당을 이용해 보면서 알았다.
내친김에 조 전무도 같이 있겠다, 또 다른 용기를 내어 본다.
“식사 끝나면 제 방으로 다시 올라가지 말고 구내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시죠?”
“구내 카페요?”
“제가 아직 거기까지는 안 해 봤어요. 밥은 혼자 내려와서도 얼마든지 먹겠는데, 혼자서 커피 시켜 놓고 앉아 있는 건 아직 영 자신이 없네요. 하하.”
“느낌만 달라지신 게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준비 중이신 거 같네요.”
난 인정하며 대답했다.
“제가 진짜 게으른 사람이거든요.”
“본부장님이요? 제 앞에서는 모르겠지만,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사람들 욕합니다. 본부장님이 게으르면 세상에 부지런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뇨, 저 진짜 게으릅니다.”
나는 몸이 바쁜 일은 몇 날 며칟날을 새어야 하는 일이라도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시작하고, 밤늦게까지 사람을 만난다거나, 밀린 업무를 해결한다든가 하는 건 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난 생각과 마음이 바쁜 건 딱 질색이다.
당연히 고민을 붙잡고 있는 건 최악이고.
아마도 그게 내가 요즘처럼 컴퓨터, 인터넷 같은 게 없었던 시절부터 회사 직원들을 시켜 내가 원하는 결과물들을 효과적으로 뽑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거다.
“생각 자체가 게으르다 보니 일 외의 것들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거죠. 저는 그걸 선택과 집중이라고 했고,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했는데, 이젠 알겠네요. 선택과 집중도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시대라는걸.”
“……?”
그렇게 해도 충분한 시절이 있었다.
선택과 집중.
그게 당연하고, 가능했던 게 내가 재경을 이끌었던 시절이다.
나의 생각과 감각이 무조건 정답이었던 시절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역시 그동안 제가 게을렀더라고요. 항상 해 오던 방법이 있으니까, 자신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대로만 하면 될 거란 생각, 고집 같은 게 대단했어요. 그런데 확실히 한계가 있네요. 직원들이 하고 있는 생각, 직원들이 회사를 통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거…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선 제가 변해야겠는 거예요.”
“무섭네요. 이미 완성형이란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다시 성장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모습. 대단하다 못해 무섭게까지 느껴집니다.”
우린 함께 식사를 하면서 편 사장이 그룹 본사로 올린 식품의 겸업 금지 조항 삭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조직의 인사를 다루는 부분이었기에 그룹 본사에서는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식품의 독립적인 시도를 존중해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알아서 해 보라는 거다.
그와 함께 식품 전체에서 외식사업부 JKF 분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범태 전무의 사장 승진과 독립된 외식사업부의 조직도를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직접 식품 본사를 방문한 것이라고….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옮긴 구내 카페에서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점심 식사 시간대라 너무 많은 직원이 들낙날락거렸고, 무엇보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구내식당과는 달리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직원들이 나와 조 전무를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제 방으로 옮기실까요?”
“아뇨, 아닙니다. 온 김에 얼굴 봤고, 같이 식사하고 커피까지 한잔했음 됐지 뭘 또 같이 올라갑니까. 저도 본사 복귀해서 제 업무 봐야죠.”
우린 지하 주차장으로 함께 내려갔다.
분명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구내 카페의 분위기상 할 말을 다 못 꺼낸 눈치가 분명했다.
“회장님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하고 계십니다.”
조 전무는 운전석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자신의 기사를 향해 차에 들어가 있으라는 눈짓을 한 뒤 내게 말했다.
“조직의 인사 조항이라는 건 결국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추가, 삭제가 되는 거죠. 특히 겸업 금지 조항의 경우는 최소한 아직 대한민국 안에서만큼은 어느 대기업도 건드리지 않았던 일종의 약속 같은 겁니다.”
“요즘은 어디 가서 쉽게 구하기도 힘든 책갈피 같은 거기도 하죠.”
“책갈피요?”
“그거 없다고 책을 못 보지는 않습니다. 읽었던 페이지 한쪽 귀퉁이를 살짝 접어 놓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거만 해도 충분하죠. 그런데 문제는 요즘은 종이책을 보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다는 겁니다. 잘 쓰지도 않는 책갈피. 그거 없어도 책 읽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거 없이도 읽을 사람은 읽지 말라고 해도 읽을 것이고, 안 읽을 사람은 제발 좀 읽으라고 해도 안 읽을 겁니다.”
“…….”
“겸업. 그거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투잡, 쓰리잡을 뛰는 사람 중,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사는 걸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죠. 그게 오로지 생계를 위한 것이든, 아님 자신의 가치 실현을 위한 것이든… 그걸 회사가 100퍼센트 충족을 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면, 최소한 못 하게 막지는 말아야죠.”
“직원들을 생각하는 건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고.”
“저도 그 영화 재미있게 봤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될 겁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결국 그렇게 되면 기업은 성장을 추구하지만, 직원들은 분배에 더 많은 욕심과 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돈이라는 건 사람의 그릇만큼 담기는 겁니다.”
내 말에 조 전무는 실눈을 뜨며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냈다.
“직원들이 가질 욕심을 걱정하기보다는 우리 재경의 그릇을 넓히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겸업 금지 조항 삭제. 저는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려서 우리 재경의 그릇을 더 크게 만들어 보자고 하는 거지, 직원들에게 명분 없는 호의만을 베풀자는 게 아닙니다.”
조 전무를 배웅해 주고 지하 엘리베이터 현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별생각 없이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회색의 구형 아반떼 한 대가 볼품없이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QC팀 도성훈 과장의 차량.
대기업 과장.
그것도 식품업계에서는 나름 괜찮은 연봉 테이블로 잡히는 QC팀 과장의 차량이라고 하기엔 너무 낡았다.
궁금해졌다.
누가 봐도 최소 연식이 10년, 그 이상은 되는 모델이다.
그런 모델을 아직까지 타고 다는 사람이, 과연 대학 시절부터 차를 몰고 다녔을까 하는 근본적인 궁금함이 생겨나고 있었다.
부모님이 타시던 차를 물려받았거나, 아님 중고차를 구입해서 타고 다니는 거 아니겠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난 저장된 번호로 QC팀에 전화를 걸었다.
“운영 본부장입니다.”
―네, 본부장님!
처음 들어 보는 음성.
젊음이 느껴지는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도성훈 과장님 자리에 계십니까?”
―아뇨, 점심을 1시에 나가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점심을 늦게 나갔구나.”
―급한 일이시면 개인 번호로 연락을 해 보시죠. 제가 도 과장님 연락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고… 나중에 점심 복귀하고 사무실 돌아오면, 제가 잠시 보자고 한다고, 제 방으로 좀 올라오라고 말이나 전해 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