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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70화 (270/303)

270화 남의 편

하늘이는 개를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직접 키우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13살짜리 진돗개 흑구가 노화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걸 보고 난 뒤로, 이별이라는 감정을 경험했고 그 감정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다는 걸 알아 버렸기에 더는 개를 키울 수가 없었다.

강아지뿐 아니라 새, 거북이, 심지어 관상용 잉어까지도 하늘이는 자신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애완동물은 집에 들이지를 못했다.

같이 있으면 너무 즐겁다.

같이 있는 순간은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게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건 하늘이에게 너무 큰 아픔이고 또 스트레스였다.

그게 하늘이가 사람까지도 쉽게 사귀지 못하는 이유였다.

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줘 버리는 게 바로 하늘이었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줘 버린 사람이라면 상처를 받을 걸 알면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다 줘야만 하는 사람.

그게 장하늘이었다.

속 시원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나니 이제야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백미러를 통해 번져 버린 화장을 보고 있자니 팬더 곰이 따로 없다.

얼른 파우치에서 화장 솜을 꺼내 휴대용 스킨으로 번진 화장을 지워 내고 얼굴에 미스트를 뿌렸다.

산뜻한 라벤더 향이 서러웠던 감정을 조금은 누그러뜨려 주는 기분이다.

11시.

이 상태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집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씨… 쉬는 날 아침부터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스마트폰을 열어 연락처 스크롤을 내려 보지만 이 시간에 마땅히 연락을 해서 보자고 할 사람이 없었다.

정훈이의 연락처가 잠시 눈에 들어왔지만, 이 기분에 만날 만큼 편한 상대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걸 이제 알았다.

결혼 이야기가 몇 년째 오고 가는 중이지만, 이럴 때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못할 정도로 아직 하늘이에게 정훈이는 어렵고 거리가 있는 존재였다.

“나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 거야아…. 어떻게 된 게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히이잉… 흐아아앙….”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조수석 시트에 툭 하고 던져 놓고 하늘이는 다시 한번 억지로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울어야만 시원할 수 있는 기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일부러, 억지로 울음을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창을 살짝 열어 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지 왜 평소엔 알지 못했을까.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열기를 조금 식혀 주니, 그나마 숨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다 계신 자리에서 굳이 자신에게 묫자리를 예약하고 오라고 한 할아버지의 생각이 조금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고 있었다.

백미러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못생겨 보였다.

“개못생겼어, 씨이….”

조수석 시트에 널브러져 있는 폰을 다시 들어 하늘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놀러 갈 거야.”

―알아서 해라?

“나 거기 다시 안 간다고. 나 기다리지 말라고.”

―알아. 아무도 너 안 기다리고 있어.

“엄마까지 나한테 그러지 마라, 좀.”

―점심은 알아서 할 거고, 저녁도 먹고 들어와라. 지금 막 양평에 있는 오리백숙집으로 가기로 했어. 아마 거기서 점심, 저녁 다 먹고 들어갈 거 같아.

“…백숙? 통나무집?”

―어.

“단호박 백숙?”

―어. 네 작은아버지가 예약을 다 해 놓은 모양이야.

“씨이… 뛰쳐나오기 전에 미리 좀 말을 해 주지….”

―올 거면 오고. 어딘지 알잖아.

“안 가. 안 갈 거야. 나도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 오늘은 무조건 늦게 들어갈 거야. 기다리지 마.”

―안 기다려. 걱정하지 말고 놀아.

“우와, 씨….”

다시 돌아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랬음 못 이긴 척, 다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었다.

결국 하늘이는 다시 스마트폰 연락처 스크롤을 내리며, 자신의 연락이 불편하지 않을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ㅅ, ㅇ, ㅈ….

스크롤은 계속해서 끝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 시간에 연락을 해서 만남을 만들어 볼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ㅊ’까지 스크롤이 내려갔을 때….

채서린.

채서린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도 용기를 내어야만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대였다.

―언니!

“서린아.”

―응응, 쉬는 주말에 무슨 일이야?

“너도 쉬어?”

―응?

“너 스케줄 없냐고.”

―오늘은 없어. 나도 하루는 쉬어야지. 내일 새벽에 인터뷰 하나, 아침에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대본 리딩이 주말 스케줄 끝.

“무슨 대본 리딩을 일요일 아침에 해?”

―그거 언니네 회사가 투자한 기획 미니시리즈거든?

“그럼 해야지.”

―푸흡. 그런데 진짜 어쩐 일이야, 쉬는 주말에?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서린아.”

―왜요. 왜? 뭔데? 무슨 일 있어요?

“나 지금 수목장지에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다?”

―수목장지? 그게 뭔데?

“수목장. 봉분 말고, 나무 심는 거.”

―아….

“할아버지가 수목장으로 해 달래. 그러면서 나한테 자리 예약을 하라고 하시잖아.”

―언니가 장손주잖아. 후계자이기도 하고.

“아는데… 그 말 듣는 순간 미칠 거 같은 거야. 그래서… 그냥 뛰쳐나왔어.”

―하여간 이럴 때 보면 진짜 아기라니까, 아기. 일 할 땐 세상 똑똑한 척, 똑 부러지는 척 다 하면서… 언니랑 안 친한 사람들은 언니 실제 모습이 이렇다는 거 말해 주면 웃지도 않을 거야. 나도 처음엔 이 언니가 날 앞에 앉혀 놓고 연기자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니까? 그래서 지금 혼자 있는 거예요?

“집이야?”

―집이지.

“놀러 가도 돼?”

―그러겠다고 전화한 거 아냐? 와. 와요. 점심은? 아직 전이지?

“어.”

―잘됐네. 안 그래도 점심으로 뭘 먹어야 할지 그거 고민 중이었는데.

“뭐 먹을 건데? 내 거도 같이 시켜. 술은 내가 가져갈게.”

* * *

하늘이 번호로 뜬 채서린의 전화를 받은 건 오후 5시가 다 되어 갈 때쯤이었다.

사업 관련해서 생각거리도 많고 해서 오랜만에 붓을 손에 잡았다.

먹을 직접 가는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에.

먹을 갈고 화선지 한 편에 적당한 농도의 먹물을 찍어 봤다.

몽글하게 뭉친 먹물이 화선지 속으로 제법 멋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게 하늘이의 전화라서 속으로 참 눈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딴 거 할 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 좀 집중을 해 볼까 하던 차에 걸려 온 전화이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속에 담가 놓고 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그런데 하늘이 목소리가 아닌 거다.

발신자 번호는 분명 하늘이의 이름으로 떴는데, 목소리는 전혀 다른 목소리.

그런데 날 오빠라고 하네?

“누구세요?”

―나야, 서린이.

채서린?

―다행이야. 내가 오빠 번호를 지우긴 했는데, 그래도 오빠 번호 뒷자리는 아직 기억을 하고 있네. 이상한 이름으로 저장이 되어 있어서 오빠 뒷자리 몰랐음 번호도 못 찾을 뻔했어.

“무슨 소리야? 그리고 하늘이 전화로 왜 네가 전화를 해?”

―하늘이 언니 지금 완전 뻗었어.

“뻗어? 뭐 술 마셨어?”

―어.

“언제부터 뭘 얼마나 마셨길래, 아직 5시도 안 됐는데 술에 뻗었다는 말이 나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언니를 좀 데리고 가 줘야 돼. 내일 스케줄만 없으면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겠는데, 내가 내일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지만, 내가 없을 때 내 집에 누군가가 있는 건 하늘이 언니라도 아직은 불편하고. 그리고 내일 대본 리딩이 있어서 자기 전에 그거 준비를 좀 해야 돼. 오빠가 좀 와서 하늘이 언니 데리고 가.

“집이 어딘데? 어딘지를 알아야 데리러 갈 거 아냐.”

―언니 톡으로 주소 찍어 줄게.

참 가지가지 한다, 진짜….

사내놈이었음 그냥 차에 태워서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주라고 하거나, 아님 미래금융 쪽 수행원 일 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걸어 보라고 했을 텐데, 그러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결국 먹만 갈아 놓고, 그 먹물은 써 보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서서 차에 올라야 했다.

“…….”

어떻게, 어떻게 찍어 준 주소를 내비에 옮겨 채서린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들어서서 거실 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실 소파에 대자로 누워 곯아떨어진 하늘이.

채서린이 가진 힘으로 하늘이를 침대로 옮길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이불을 덮어 줬던 거 같은데 그 이불마저 소파 아래 바닥에 뱀 허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술을 어떻게 마시면 사람이 저렇게 곰처럼 퍼져 있을 수가 있지?”

그것보다 분명 같이 마셨을 건데 어떻게 하늘이는 인사불성이 되어 있고, 채서린만 술 한 잔 안 마신 사람처럼 멀쩡할 수 있는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그냥 안 취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술 한 방울 입에도 안 댄 사람처럼 채서린은 멀쩡했다.

“넌 안 마시고, 하늘이 혼자 저렇게 마신 거야?”

“말했잖아. 난 내일 새벽부터 스케줄 있다고. 그냥 같이 잔만 받아 놓고 이야기 들어 주는 역할만 했어. 술은 언니 혼자 다 마셨어.”

“얼마나 마셨는데?”

“와인 한 병 조금 더 마셨어.”

“와인 한 병 조금 더 마시고 저렇게 된다고?”

“설마 술이 다일까. 그동안 회사 일로 얼마나 피곤했을 거야? 그럴 때 있잖아. 주량 상관없이 체력적으로 취하는 날. 취기에 좀 더 취해 보고 싶은 날. 딱 그런 날이었던 거 같아.”

“아무튼, 술 상대 해 준다고 네가 수고가 많았다. 뭐 안 좋은 일 있었대? 왜 저렇게 마신 거야? 그것도 대낮부터.”

채서린을 통해 오늘 태산이가 자식들을 다 데리고 자신이 평생 잠들 장소를 직접 보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가 어째서 대낮부터 맛도 제대로 모르는 와인에 저렇게까지 절여지게 되었는지도.

명색이 대한민국 금융업계의 선두에 있는 미래금융을 짊어지고 나갈 놈이 고작 그런 걸로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이나 보이고….

저렇게 약해 빠진 놈을 어디에다 쓸까, 한심하단 생각과 함께 그래도 태산이 놈이 시꺼먼 사내놈이 아닌 하늘이같이 감정 표현이 다양한 장손녀를 항시 곁에 두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내가 내일 스케줄만 아니었음 오빠한테 전화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괜히 미안하네.”

“아냐, 잠은 집에서 자야지. 잘했어.”

“전화번호를 다 이상하게 저장을 해 놨어, 이 언니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볼 거야. 항상 같이 다니는 이 비서님 있잖아.”

“어.”

“그분 번호를 아무리 찾아봐도, 어떻게 저장을 해 놨는지 알 방법이 있어야지. 나는 뭐라고 저장을 해 놨는지 알아?”

“뭐라고 해 놨던데?”

“최애캐지아.”

“최애캐지아?”

“푸훕. 미래기획이랑 처음 같이했던 작품이 프레지아 꽃향기였거든. 거기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이 지아라는 캐릭터였고. 그걸로 저장을 해 놨더라. 진짜 엉뚱해.”

엉뚱이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저 생물체를 업어서 이 집을 나서야 한다는 소리잖아.

간만에 무거운 운동 하게 생겼네.

“오빠는 뭐라고 저장을 해 놨는지 알아?”

“나쁜 놈이라고만 안 되어 있음 다행이겠다.”

“남의 편.”

“남의 편?”

“차마 벌써부터 남편이라고는 저장을 못 하겠던 모양이지.”

“전혀 다른 의미 아닌가?”

“어쨌든 남편을 다들 남의 편이라고들 하니까. 오늘이 처음이야.”

“뭐가?”

식탁 위로 올려져 있던 하늘이의 가방을 챙겨서 내게 건네며 채서린이 말했다.

“나랑 술 마시면서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안 꺼낸 게.”

“…….”

“그렇잖아. 이 언니가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오빠라는 이유 말고는 없다고 봐야지. 일 때문에 보자고 하든, 아님 내 생일이라 선물을 주겠다고 만나자고 하든… 만나는 이유는 그때그때 다 달랐지만, 항상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은 다 오빠 이야기로 끝이 나. 기승전 손정훈. 그런데 오늘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느라, 오빠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안 물어보네.”

“나에 대해 물어봐?”

“항상 물어보지. 오빠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빠의 연애사, 오빠 연애 취향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언니 주위엔 없을 테니까.”

“…….”

“나 이거 선 씨게 넘고 있다는 거 아는데, 언니한테 좀 잘 해 줘. 내가 요즘 언니가 나한테 물어보는 오빠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다시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따뜻했던 사람이었는지, 보기하고 달리, 소문하고 달리 괜찮았던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돼.”

“…….”

“어쨌든 내 입장에선 언니랑 친해진 건 참 좋지만, 언니한테 내 지난 연애를 꺼내 보여 줘야 하는 건 불편하거든. 언니는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괜찮지가 않아. 괜히 잘못한 것도 없이 언니한테 미안하고, 또 내가 왜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야. 다른 거 다 잘하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왜 자기 좋아해 주는 여자 마음 하나 제대로 몰라줘? 언니가 오빠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좀 잘해 줘.”

난 하늘이의 가방을 다시 채서린에게 건네 놓고 하늘이를 둘러업었다.

그리고 다시 가방을 넘겨받아 채서린의 집을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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