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아무렇지도 않냐?
멋 부리다가 얼어 죽겠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옷을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지?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어지간했으면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을 거다.
이 시간에 술이 떡이 되어서 남자한테 업혀 있는 여자를 혹여나 다른 사람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서 보기라도 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채서린이 사는 집 층수가 너무 어중간했던 거지.
13층.
이걸 혼자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다 큰 여자를 등에 업고 내려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결국 바로 눈앞에 보이는 비상계단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열린 엘리베이터 안엔 이미 사람이 타 있었다.
그것도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 한 명과 누가 봐도 그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이런 우라질….
내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서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안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어린애가 보고 있는데 술이 떡이 된 여자를 등에 업고 저 안으로 들어가자니 그것도 그 부모 보기에 미안하고….
“…….”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안으로 더 들어가 주며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이런 친절은 정말 필요 없는 친절인데….
어쩔 수 있나, 탔지.
그런데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잠시 다시 멈췄고, 거기에서 강아지를 각각 품에 안고 있는 젊은 여자 둘이 더 탔다.
당연히 다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하늘이를 업고 있는 날 힐긋거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들의 힐긋거림은 굳이 엘리베이터 안 거울이 아니었더라도 내게 다 전달이 되고 있었다.
잘하는 짓이다.
얼굴이나 안 팔린 놈이라면 내가 말을 안 하겠는데, 여기저기 얼굴이란 얼굴은 다 팔린 놈이 이 시간에 술이 떡이 되어서 남자한테 업혀 있는 꼴이라니.
거기다 나는 또 얼굴이 좀 많이 팔려 있냐고.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1층에서 내렸다는 거고, 그때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는 거다.
“너는 진짜 씨이… 일단 술만 깨라. 내가 진짜 가만히 안 있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조수석에 하늘이를 태우는 데 성공을 했다.
하늘이는 완전 기절을 해 있는 상태였다.
취했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곯아떨어진 상태.
입고 있던 내 외투를 벗어 스커트 아래로 나와 있는 민다리를 덮어 줘 놓고 안전밸트까지 채워 준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게 뭐라고 땀까지 나고 있었다.
* * *
한강을 건너고 있을 때였는데, 저 멀리 63빌딩이 저녁 노을을 맞아서 건물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응?”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부시시한 눈으로 날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 하늘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떠서 이게 뭐냐는 듯 내게 물었다.
“어? 손정훈이다?”
“너는 진짜, 하아….”
“어? 진짜 손정훈이다.”
“그럼 가짜 손정훈이겠냐?”
“오빠가 여기에 왜 있어?”
잠만 깼다뿐이지, 횡설수설하는 게 술까지 깬 건 아니었다.
“이거 내 차다. 내 차에 네가 있는 거야.”
“그럼 내 차는?”
“너 그냥 다시 자면 안 되냐? 너 지금 입에서 술 냄새 장난 아니게 나거든? 이 냄새에 나까지 취하겠다. 집까지 20분 남았어. 가는 동안 다시 좀 자라.”
“우와, 대박 신기. 우와… 오빠도 이런 기분이었어?”
“뭐라는 거야?”
“기억 상실. 갑자기 눈을 떴는데, 내가 원래 있어야 되는 자리가 아닌 엄한 곳에 와 있고, 내 옆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없었던 사람이 같이 있고. 우와, 대박 신기.”
“자라, 자. 그냥 좀 자라.”
“지금 몇 시야?”
이 녀석 이것도 주사가 있네….
손으로 좌석 시트 옆 부분을 더듬더니, 최대한 뒤로 눕혀 놓았던 좌석 시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에게? 이제 6시 반이야?”
“보통은 이런 상황에선 나 보기가 민망해야 정상 아니냐?”
“내가 왜?”
“대단하네. 멋지다. 맞아. 민망할 게 뭐 있어.”
“아, 목말라. 물 있어?”
여전히 횡설수설, 자기가 직접 생수병을 찾아서 따 마시고는 그 생수병을 품에 안고서 눈을 감는 하늘이었다.
“아, 죽겠다. 머리 깨질 거 같아….”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미련하게 마시냐? 어이, 곰. 진짜 내가 마늘 좀 사 줘?”
“마늘 말고 해장국. 속 쓰려 죽을 거 같아.”
“해장국 같은 소리 하고 있다. 간만에 글자 좀 써 보겠다고 먹까지 다 갈아 놨는데 너 때문에 인마, 그 먹물 써 보지도 못하고 달려온 거야. 집에 가서 해장해.”
“해장국, 해장국… 태화장 육개장….”
고민을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었다.
헤롱헤롱거리긴 해도, 일단 잠이 깬 건 확실하고 나도 나온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하늘이는 그냥 잠만 깬 거지, 여전히 술에 절여져 있는 상태였다.
얘를 데리고 뭘 먹으러 식당 같은 곳을 찾아간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해장국, 해장국 노래를 부르는 하늘이의 말을 싹 무시하고 중간중간 알았다며, 해장국 잘하는 집으로 간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하늘이의 집까지 차를 몰았다.
“어? 뭐야? 우리 집 근처에 해장국 잘하는 집 있다며? 거기로 간다며?”
“이 집이 해장 맛집이야. 내려.”
앉아 있는 것만 봐서는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놓고 혼자서 내리게끔 해 봤는데,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비틀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
“이야… 너 오늘 어른들한테 좀 혼나겠는데?”
“내가 어른인데?”
“내가 진짜 널 어떻게 해야 되냐? 아, 쫌 정신 좀 차려 봐. 못 일어서겠어? 다리에 힘 좀 넣어 봐.”
“일어설 수 있어. 자, 봐… 안 되잖아.”
“우와, 미치겠네, 진짜. 일단 너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꼼짝 마,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다시 다리를 차 안으로 넣어 줘 놓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대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집에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집안일해 주는 사람들 말고, 하늘이 가족들.
태산이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고, 영석이나 그 처가 집에 있을 줄 알았지.
“접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철컥하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를 확인한 뒤, 그 문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안으로 최대한 열어 놓고 차에서 하늘이를 꺼내 업었다.
“오올… 비실인 줄 알았는데, 힘 쫌 쓰네?”
“너 이 시키… 술 깼지?”
“안 깼는데?”
“걸을 수 있지?”
“못 걷는데?”
“와, 너 진짜… 좋다. 일단 들어가자. 내가 네 할아버지, 엄마, 아빠한테 싹 다 일러 줄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그런데 집에 사람이 없는 거였다.
집안일을 해 주는 사람들 몇 명 말고는 집안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안일을 해 주는 사람들은 내가 하늘이를 들쳐 업고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며 얼른 하늘이의 가방과 옷가지를 건네받았는데, 그런 한 아줌마한테 집안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다.
“다들 오늘 저녁 먹고 온댔지롱.”
내 등에 업혀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거리며 하늘이가 말했다.
거실 소파에 하늘이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늘이가 어차피 업고 있는데 자기 방까지만 좀 더 힘을 써 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 옆에서 하늘이의 짐을 대신 받아 준 아줌마도 그게 더 좋을 거 같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고.
이 집 정원이 좀 넓냐고.
대문부터 시작해서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까지 온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다시 또 계단을 오르라고?
그걸 또 내가 하고 있네.
스물세 계단.
내가 이 집 실내 계단 수를 세어 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그리고 나는 계단을 다 올라갈 때까지 내 뒤로 집안일을 해 주는 아줌마가 같이 따라 올라오고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하늘이 가방하고 외투를 그 아줌마가 받아서 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계단을 다 올라서 얼른 하늘이 방문을 좀 열어 보라고 할 요량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네?
계단 빈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다른 할 일을 하러 간 모양이다.
사람을 이렇게 업고 있는데, 업는 건 내가 하더라도 같이 따라와서 문이라도 열어 줘야 할 거 아닌가.
진짜 하는 짓들 하고는….
결국 한 손으로 하늘이가 안 떨어지게 받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침대 위로 하늘이를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
하늘이 이놈이 내 목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게 아닌가.
“아, 뭐 하는데? 놔.”
“싫은데?”
“너, 이 씨… 진짜 좀 놔. 힘들다.”
“싫은데, 싫은데, 안 놓을 건데?”
“분명히 놓으라고 했다?”
“난 싫다고 했다?”
별수 있나.
같이 뒤로 눕는 수밖에.
깔리는 놈만 아픈 거지.
난 하늘이를 업은 채,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졌다.
“아야!”
“그러게 놓으랄 때 놓지, 뭐 한다고 버티냐? 버티길. 이러니 내가 너한테 곰이라고 하는 거야.”
“나쁜 놈.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주냐?”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이다. 허리 다 나가겠다, 너 때문에.”
대충 눕혔으니까 일어나야겠다고 할 때였는데, 하늘이 이놈이 여전히 내 목에 두른 팔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였다.
“아, 진짜 뭐 하냐? 힘들다, 좀 놔라.”
“으흐흐흐… 싫은데.”
“와, 너 진짜 주사 장난 아니다.”
“주사 아닌데, 주사 아닌데.”
“그래, 알았다. 주사 아니다. 주사 아니니까 일단 좀 놓자.”
“싫은데, 싫은데. 으흐흐흐.”
딱 그런 기분이었다.
하는 짓은 어이가 없는데, 요상한 웃음 소리 때문에 기가 막혀서 함께 웃음이 나와 버린 상황.
그 상황 때문에 힘이 빠지는 기분.
어이가 없어서 하늘이를 깔고 뒤로 누워 있는 상태에서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그 상태로 잠시 꼼짝도 못 한 채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러다 이젠 진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억지로 몸을 일으키면, 같이 딸려 올라올 만큼, 하늘이는 내 목에 두른 팔에 힘을 단단히 넣고 있었다.
진짜 이런 주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봤다.
하늘이가 흘리고 있는 요상한 웃음소리가 멈춘 뒤, 힘으로 내 목을 감싸고 있는 하늘이의 팔을 풀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팔을 끝까지 풀지 않겠다는 듯, 하늘이는 더 힘을 주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해 봤다.
그러던 차였는데….
볼 뒤쪽, 귀 언저리로 하늘이 녀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흡사 자신의 볼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봤는데, 생글거리며 웃는 녀석의 눈이 바로 눈앞에 붙어 있었다.
웃는다?
설마 이거… 일부러 장난을 친 건가?
“뭐 하냐?”
“뭐가?”
“안 놓냐?”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이렇게 나랑 같이 누워 있는데, 내가 끌어안고 있는데, 볼까지 비벼 봤는데…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냐?”
난 말없이 하늘이를 빤히 쳐다봤다.
“좀 놔라, 힘들다.”
“왜?”
“왜? 왜는 뭐가 왜야?”
“내가 이걸 왜 놔?”
“와, 너는 진짜 앞으로 술 마시지 마라.”
“싫은데? 계속 마실 건데?”
“그래, 네 마음대로 하고, 일단 이건 좀 놓자.”
“싫은데?”
“이거 뭐야, 진짜,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아니?”
“그럼 놔. 불편….”
불편하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이가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붙여 버리네.
그리고 다시 내게 물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입술까지 맞췄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