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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72화 (272/303)

272화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거 같아서요

내 목을 감싸고 있던 하늘이의 손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풀려 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잠깐이었지만 당황을 했던 건 하늘이가 내게 입술을 맞춰서가 아니었다.

그것도 당황스럽긴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늘이의 입술이 아닌, 하늘이의 감정이 내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란 말은 내가 한 거였고, 그에 기대를 하듯 날 쳐다보며 “뭐가?”라고 물은 건 하늘이었다.

“대낮부터 술을 떡이 될 때까지 마신 이유. 할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알아서 마음을 잘 정리하고 있네.”

“또 이렇게 빠져나가는 거야?”

“내가 왜 빠져나가? 빠져나갈 이유가 나한테 있나? 우리 관계, 내가 붙잡고 있는 거야, 네가 아니라.”

“그럼 대답을 해.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문 다 열어 놓고, 코로 나오는 숨에서까지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여자랑 입술을 맞췄는데.”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낮잠치고는 꽤 많이 잤어. 샤워라도 한번 해라. 나는 밑에 내려가서 꿀물 타서 올려 주라고 할 테니까.”

“…갈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할아버지 얼굴은 보고 가야지. 다들 저녁은 먹고 오는 거야?”

“아마도.”

“씻어. 술 좀 깨. 나는 할아버지한테 전화나 한번 해 볼 테니까.”

그렇게 말해 놓고 방을 나서려고 몸을 돌렸는데, 내 뒤통수에 대고 하늘이가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제대로 시작해 보려고.”

다시 몸을 돌려 하늘이를 쳐다봤다.

“그동안은 나도 내 감정에 긴가민가한 게 많았어. 그리고 그런 게 없었더라도 오빠 사정, 오빠네 사정을 어쩔 수 없이 봐줄 수밖에 없었고.”

“……?”

“이 나이 먹고 나도 애절, 간절, 구구절절… 그런 연애는 별로야. 하지만 감정까지 비즈니스이고 싶지는 않아. 그럴 거면 내가 오빠랑 결혼을 왜 해? 그런 거 안 해도 이미 우리 미래금융과 재경은 떨어지기 힘든 관계가 됐는데.”

하늘이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화장대가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저럴 줄 알았다.

걸을 수 있으면서….

화장대에서 고무밴드 같은 걸 하나 챙기더니,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쓸어 넘겨 단단하게 묶는 하늘이었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네, 그것도 꽤 많이. 이쯤 되면 내가 다 먼저 한 거지? 키스, 고백. 근데 자존심이 안 상해. 그냥 재밌어. 내 감정, 그리고 오빠 반응. 내가 안 하면 안 했지, 한 번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거든? 제대로 해 봐야겠어. 그래 보고 싶어졌어. 아직 저녁 전이지? 먹고 가라.”

여전히 취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해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내가 있는 곳을 지나 방문 앞까지 걸어간 하늘이는 실내 계단 난관에 몸을 기댄 채, 아래층을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네, 아가씨.”

“저희가 저녁을 아직 못 먹었어요. 나는 속이 조금 부대끼고. 콩나물국 같은 거 지금 준비할 수 있어요?”

“오징어 넣고 시원하게 끓여 볼게요.”

“나 금방 샤워만 하고 내려갈게요. 부탁 좀 해요.”

“네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하늘이가 내게 말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쳐다봐? 나 샤워할 거라니까?”

어느새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있었다.

“내려가 있어.”

* * *

태산이한테 전화를 걸어 봤다.

오늘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지금 하늘이를 데리고 집에 와 있는데, 언제쯤 도착할 거 같냐고 물어봤다.

그에 태산이는 하늘이가 술을 많이 마셨더냐며, 한심한 손녀딸의 행동에 혀 차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 정신에 술은 마셔야겠고, 밖에서 마실 엄두는 안 나니 아는 동생 집에 가서 얌전히 취했잖아요.”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편을 들어 줄 걸 들어 줘라, 이 사람아. 우리도 여기 식사 얼추 다 끝났어. 금방 출발할 거다.”

“천천히 오세요. 저는 여기서 저녁 좀 얻어먹고 그러고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30분 정도를 주인 없는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투벅투벅….

폭삭해 보이는 수면 잠옷 차림으로 샤워를 끝낸 하늘이가 실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술이 많이 깬 듯해 보였다.

“뭘 그렇게 쳐다봐? 쌩얼이 화장했을 때보다 예쁜 여자 처음 봐?”

“푸하하하… 야, 너 진짜 꼴통이다.”

“꼴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뭘?”

“나는 오늘부터 진짜 제대로 해 볼 거라고. 혹시라도 내가 취해서 그냥 막 던진 소리라고 흘려들을까 봐, 다시 확인시켜 주는 거야. 나는 막 누구처럼 이리저리 간 보고, 밀고 당기고 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

“그 누구가 혹시 난가?”

“본인만 알겠지. 아님 내가 그동안 그렇게 오해를 한 걸 수도 있고. 쌩얼에 내 잠옷 취향까지 다 보여 준 남자, 가족들 말고는 오빠가 처음이다?”

“영광이네?”

“무슨 또 영광씩이나. 내가 일방적인 건 못 참거든. 그것도 나한테 불리하게 돌아가는 일방적인 그림은 못참아. 오늘은 내가 먼저 보여 줬으니까, 다음은 오빠 차례여야 한다는 것만 안 까먹고 있으면 돼. 배 많이 고프지? 들어가자. 밥 먹자. 속 좀 풀어야겠어.”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었다.

반찬 가짓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쉽게 손이 가는 찬들이었다.

나와 하늘이가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했던데, 하늘이는 가족들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이 집 최고 어른인 태산이가 앉는 자리로 자기 밥그릇과 국그릇을 직접 옮겨서 최대한 내 옆으로 앉았다.

“채서린한테 전화 한 통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괜찮다고. 걱정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에 하늘이는 내 밥그릇 속으로 너비아니 한 점을 올려놓고 말했다.

“샤워하기 전에 톡 주고받았어.”

“반찬은 내가 알아서 먹고 싶은 거 먹으면 안 될까?”

“애도 아니고 밥상 앞에서 투정이야, 투정은. 먹어.”

“너 이거 지금 상당히 과한 거 알지?”

“그렇게 말하는 게 상당히 매너 없는 건 알아?”

그러더니 마치 자기 편을 모으듯, 식사를 도와주고 있는 아줌마에게 하늘이가 물었다.

“아주머니.”

“네, 아가씨.”

“결혼할 사람 밥그릇에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하나 올려 주는 게 과한 거예요?”

“아뇨? 그게 왜 과해요? 너무 보기 좋은 모습이지?”

“그죠? 보기 좋죠?”

“그럼요.”

“들었지? 보기 좋다잖아. 결혼 이야기 나오고 2년 동안 한 번도 이래 봤던 적이 없었던 게 비정상인 거야. 지가 먼저 판 다 짜 놓고, 철벽 치는 누구 때문에 그렇게 내 아까운 시간만 흘려보냈던 거고.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만큼 내가 끌려가 준 것도 내 입장에선 기적이야.”

“그랬어?”

나도 너비아니 한 점을 집어 하늘이의 밥그릇 속으로 담아 주었다.

“나는 또 네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앞으로는 나도 같이 신경을 쓸게. 말을 하지, 이런 거 좋아한다고.”

다시 내 밥그릇 속으로 너비아니 한 점이 새로 올라왔다.

먼저 올라왔던 너비아니 위로 새 너비아니를 포개어 올려놓고 하늘이가 말했다.

“그렇게 한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냐, 이제 더 이상. 내가 말했잖아.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

“나 지금 이거 진심이거든? 그러니까 치사하게 뒤로 빠질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오빠가 아무리 대단해도 내가 미친 듯이 전력 질주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백 스텝으로 내 속도를 감당하긴 힘들 거야.”

“너는 그런 말을 다른 사람들 다 듣는데 꼭 그렇게 해야겠냐?”

“그동안 다른 사람들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썼더라고. 내가 서린이도 아니고, 내 연애, 내 결혼 문제에 다른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쓸 이유가 어디에 있어? 결혼 이야기가 안 나왔던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우리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둘뿐이었더라고. 내일 마치고 뭐 해?”

“내일?”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게 아니면, 나랑 같이 저녁 먹어. 분위기 좋은 데서 와인도 한잔하고.”

“그러자.”

“오빠랑 같이 사진도 찍을 거야. 셀카. 인스타 업데이트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어.”

“말 나온 김에 지금 한 장 찍을까? 쌩얼에 잠옷 차림. 반응 엄청 올라올 거 같은데?”

“나는 예쁜데, 오빠가 못생겼어, 오늘은.”

“고맙네.”

“여행도 가자. 한 2박 3일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해 놓고 국을 한 숟갈 뜨고 있었다.

그 국이 입에 담긴 채 기침을 하느라 사레가 걸렸다.

“커헉, 컥컥….”

“너무 멀리는 말고, 주말 이용해서 강원도 쪽으로 스키 타러 가는 건 어때?”

“밥 먹고 천천히 둘이 있을 때 이야기를 맞춰 보자.”

“아주머니들 앞이라서 부끄러운 거야? 그래, 알았어. 밥 먹어. 으음… 귀엽네? 손정훈이도 당황이라는 걸 하는구나. 이런 표정일 줄 알았음 진작에 장난을 좀 많이 쳐 볼 걸 그랬다.”

내가 지금… 당황을 했네. 하하, 참….

역시 제법이구나, 하늘이.

날 긴장을 시켜?

이런 식으로라도 날 긴장을 시킬 수 있다는 게 기특하네.

암.

그래야지.

가지고 싶은 게 생겼으면, 덤벼야지 누가 손에 쥐여 줄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서야 쓰나.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가지고 싶은 게 나렸다?

거참 기분이 묘하네.

태산이는 8시가 훌쩍 넘어도 집에 도착을 했다.

오는 길에 차가 많이 막혔다고 한다.

해는 이미 식사를 하기도 전에 뚝 떨어져 있었고, 거실 전체창 밖 정원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태산이 얼굴을 보겠다고 기다리긴 했지만, 시간 너무 늦었고 태산이도, 영석이도 많이 피곤한 기색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일어나 줘야, 태산이도 그렇고, 영석이, 영석이 처가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다 싶어 평소 태산이가 낮잠을 자기 전 반드시 마시는 오미자차 한 잔만 얻어먹고 가겠다고 했다.

태산이의 방 안이었다.

“낮에 하늘이 데리고 수목장지를 가셨다고요?”

“오랜만에 소풍 가듯 바깥바람도 좀 쐬고 싶고, 온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길 때, 내가 누울 자리는 직접 골라 놓고 싶어서.”

“요즘은 자주….”

“왔다 갔다 해. 오늘도 아까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애들 앞에서 하늘이 할애미는 어딨냐고, 죽은 그 사람을 찾았단다.”

“…….”

“참 지저분한 병이야, 이게. 애들 앞에서 실수를 했단 소릴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해. 그냥 어디 한 군데 고장이 나서 아픈 거면 모르겠는데, 계속 안 해도 될 실수를 해서 사람이 추해지니까, 그걸 내가 못 견디겠어.”

“온정신으로도 추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걸로 자존심까지 상하고 그러세요? 좀 약해지셔도 괜찮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그래서 하늘이는 이제 좀 괜찮아?”

“원채 씩씩하니까요. 똑똑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 번쯤 진탕 취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어떻게든 풀어야지,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스타일이 못 되어서 그런 거 같으니까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네가 하늘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쉬세요.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제가 조만간에 다시 찾아올게요.”

* * *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하늘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평일 점심에도 같이 점심을 먹자고 회사로 찾아올 정도로, 하늘이는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늘이의 모습에서 나는 꼭 자신의 감정만이 아닌, 자기 할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금 하늘이가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나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 자기 할아버지에게 보내 주기도 했고, 어떨 땐 나와 데이트를 하느라 오늘은 늦게 들어갈 거란 소릴 자기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비드 아이스크림 론칭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쁘띠 기뿔리부터 시작해서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의 성공적인 론칭과 빠른 성장세로 고비드 아이스크림의 론칭은 벌써부터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브랜드 론칭 당일 함께 오픈을 할 몇몇 지점들을 정재현 과장과 함께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오픈 준비가 잘되고 있는지, 인테리어 마무리 상태는 어떤지를 시찰해 보기 위해 스너프 쪽 오프라인 매장들과 태영백화점 쪽 푸드 코트 몇 군데를 직접 찾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정해진 일정 자체는 없었지만, 서울, 수도권 안에만 24군데 매장이 브랜드 론칭 당일 다 같이 오픈을 하기 때문에 매장 상태를 직접 확인하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고 있었다.

태영백화점의 인계점 확인을 끝내고 스너프 백화점 수원점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정재현 과장이 “본부장님.” 하고 날 부르는 거였다.

“네.”

“지금 잠시 유턴 좀 하겠습니다.”

“유턴? 여기서? 왜요?”

“잠시만요.”

“아니, 여기서 유턴이 돼요? 여기서 유턴하면 불법이야.”

“죄송합니다. 유턴하겠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내비로도 10분밖에 안 남아 있었고, 지금 가고 있는 길 말고는 지름길도 없다.

유턴을 하면 아예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가야 하는 건데, 옳은 길로 가고 있으면서 왜 갑자기 유턴을 하겠다는 거지? 그것도 유턴이 안 되는 차선에서….

결국 정 과장은 자기 고집대로 엉뚱한 차선에서 유턴을 강행했고, 평소 나를 태우고 이렇게까지 험하게 운전을 한 적이 없었던 정 과장이었기에 나는 화를 내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기분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하지만 정 과장은 내가 짜증까지 섞어서 묻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기보다는 백미러로 어딘가를 한참 동안 주시하며, 다시 전방을 확인해 가며 운전을 이어 나갔다.

한 번도 이런 돌발 행동을 내 앞에서 보인 적이 없는 친구였기에, 이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는 친구였기에 그때부터는 나도 더는 대답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1분 정도? 그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다.

말없이 계속 백미러로는 후방을,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번갈아 확인하며 운전을 이어 가던 정 과장이 한숨을 길게 빼어 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상한 차 한 대가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거 같아서요.”

“따라와?”

“아까 인계점 들어갈 때부터 느낌이 조금 이상했거든요. 그런데 기분 탓인지, 인계점 들어가기 전부터 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나중에 블랙박스로 확인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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