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받기 편한 계좌 번호 하나 찍어 줘요
폰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이 전화를 받고 끊으면 다른 전화가 오고, 전화를 받는 도중에 다른 전화가 또 걸려 오고….
첫 전화는 하늘이었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를 건 거였다.
원래라면 마치고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거든.
서로 정확하게 마치는 시간을 모르니까, 마칠 때쯤 통화로 약속을 잡자고 했었는데 그걸 내가 잊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 가서 쉬어야지.
회사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팔자 좋게 밖에서 밥이나 먹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을 하겠나.
“별일 아니니까 괜히 또 집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걱정하시게 만들지 말고, 그냥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 하는 정도로 너만 알고 있어.”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냐? 듣기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인데. 일단 알았어. 통화 길게 할 분위기도 아니겠네. 나중에 집에 가서 내가 다시 전화하든지 할 테니까, 퇴근 조심해서 하고.
그렇게 하늘이와 통화를 끝내 놓고, 강인성 차장, 그리고 정재현 과장과 함께 미리 잡혀 있던 내일 외부 일정을 다시 조율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엔 홍준이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바로 식품 쪽으로 본사 경호팀 직원 두 명이 넘어갈 거다.
“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근 같이하고. 상주까지는 힘들겠지만, CCTV에 찍힌 차량 확인될 때까지는 귀찮더라도 그 친구들 경호 받으면서 출퇴근하도록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고.
“그렇게 해야죠. 저는 알아서 할 테니까, 회장님도 신경 써서… 그렇게 계세요.”
―나야, 항시 경호하는 친구들이 같이 다니고, 집에도 사람들이 많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혼자 있는 네가 걱정이다. 어떻게 오늘 본가로 올래? 와서 같이 애비랑 술 한잔하고 자고 가도 괜찮고.
“이거 때문에 내일 일정을 바꿔야 할 거 같아요. 외부 유통판 시찰을 많이 잡아 놓고 있었는데, 차량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별일이야 있겠냐만 그래도 조심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 봐야 할 내용이 좀 생겼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네 말대로 별일이야 있겠냐만 의심되는 걸 봤으면 조심을 해야 돼.
“그렇죠.”
―항상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살아도, 사업이라는 걸 하면서 어떻게 척지는 상대 하나 안 만들어질 수 있겠어? 하물며 지난 몇 년간 부경 상대로 우리가 한 게 있는데.
그랬다.
모두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회색의 구형 제네시스 차량을 부경 쪽과 연관 지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가능성.
만약 이게 집안 내부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외부의 소행이라면, 그리고 만약 뭔가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해코지를 하겠다고 미행이 붙은 거라면 부경만큼 현재 우리 재경 쪽으로 감정이 크게 실려 있는 상대도 없는 게 사실이다.
“당연히 당분간 조심은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거 때문에 움츠릴 이유는 없습니다, 회장님.”
내가 보낸 영상 하나로 그룹 본사 전체를 움직여 내 쪽으로 경호원들을 붙이는 것만 봐도, 이런 잔소리는 홍준이에게 의미가 없는 거였다.
그럼에도….
“우리 재경의 움직임에 따라 자기네 주가가 왔다 갔다 하는 장선동 회장 쪽에서 장난을 쳤을 리는 만무하고, 장선열 회장 쪽, 장혜선 전 부경호텔 대표 쪽 역시 어쨌거나 지켜야 할 게 아직은 많은 사람입니다. 그게 뭐든 우리 재경을 상대로 의미 없는 도발을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죠. 장선길 회장 쪽도 아직까지는 그 집 부자가 다 징역살이 중이지 않습니까.”
―금방 확인해 보니까 민규 출소일이 내일이더라.”
“그쪽으로 연관을 시킬 내용은 아니고요. 손발 다 잘린 상태로 그 안에서 뭘 할 수 있다고요.”
―알고 있으라고.
알고 있다.
“부경 쪽이랑 연관시켜서 괜한 걱정을 더 키우지는 마세요. 진짜 별일 아닐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통화 중인데, 정태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는 거였다.
“지금 손정태 사장한테서 전화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래, 나도 전할 말 다 전했으니까 전화 끊고 형이랑 통화해라.
“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퇴근하세요.”
―그래.
내가 불러서 기다리고 있는 강 차장과 정 과장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내일 일정 조율 때문에 불러 놓고 혼자 통화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우선은 두 사람에게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해 놓고 정태의 전화를 받았다.
―야, 인마. 너는 무슨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냐?
걱정이 잔뜩 끼어 있는 목소리였다.
“회장님하고 통화 중이었어.”
―그랬냐?
“내가 단톡방에 올린 영상 봤지?”
―그거 때문에 내가 지금 네 형수랑 통화로 싸우기까지 했다.
“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안 받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집안일 봐주시는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승현이 데리고 수영장엘 갔다잖아. 겨우 승현이 보모한테 전화해서 통화했네.
“그러면 당연히 전화를 못 받지.”
―아무튼, 십년감수했네. 이 씨… 그나저나 뭐냐, 이거?
"나도 몰라. 나는 미행이 붙었는지도 몰랐어.”
―어떤 미친놈이야? 벌건 백주 대낮에, 그것도 감히 우리 재경가를 미행해? 일단 아버지가 그룹 전략기획실한테 다이렉트로 최대한 빨리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렸다니까 금방 찾을 거야.
통화를 하면서 드는 생각.
역시 정태는 아니었다.
그렇지.
정태가 나한테 사람을 붙일 이유가 없다.
그나마 집안 내부에서 의심을 해 보자면 홍준이나 원수경에 비해 조금은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였지, 그마저도 의미 없는 의심이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잡히기만 잡히면 내가 진짜 가만히 안 둔다.
“오버 좀 하지마.”
―너는 이 자식아, 형이 지금 오버하는 걸로 보여? 사람이 붙었어, 그것도 너한테. 지금 대한민국에 너 모르는 사람이 있냐? 나는 몰라도 너는 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게 지금 얼마나 우리 재경을 우습게 본다는 거야?
실은 나도 지금 그게 상당히 신경이 쓰이고 거슬린다.
누굴까?
누가, 왜? 뭐 때문에 날 따라붙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숨겨 놓고 정태에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지금 형수랑 승현이는 괜찮은 거지?”
―지금 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어. 아버지가 집사람하고 승현이한테도 경호 인력을 붙이셨다고 하고.
“잘하셨네. 형수만 집으로 가라고 하지 말고, 빨리 퇴근하고 집에 가서 같이 있어 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근데 아버지가 본사에서 경호팀 사람들 보냈다고, 같이 움직이라고 하시잖아.
“당분간은 좀 귀찮고 하더라도 알아서 조심을 하는 수밖에. 차라리 잘됐어.”
―잘돼? 뭐 약 먹었냐? 잘되긴 뭐가 잘돼?
“이참에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조심을 싣는 버릇을 몸에 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생각해 보면 진작에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용감했어.”
―도대체 그런 무한 긍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
“생각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이만한 일로 주눅 들어서 몸에 긴장을 넣고 살 수는 없잖아. 누가 보나 그런 모습은 좀 아니지.”
―곧 죽어도 입만 살아서는… 네 말대로 좀 귀찮더라도, 괜히 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고 당분간은 조심을 좀 해.
“밤늦게 혼자 다닐 일도 없네요.”
―그래, 알았다. 통화 끊고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 한번 해 봐야겠다. 아, 맞다. 야, 인마.
“왜?”
―단톡방에 어머니가 이게 뭐냐고 묻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줘? 대답을 안 해 줄 거면 거기에 그런 영상을 올리지를 말든가. 그런 영상 올려서 사람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 왜 그러냐?
“전화할 거라며. 전화해서 대신 말씀드려.”
―하, 이 새끼 진짜 요즘 하는 거 보면… 아무튼, 알았다. 잔소리는 다음에 만나서 할 테니까, 지금은 네가 이것저것 알아서 잘 챙겨라.
“형수 홀몸도 아닌데, 괜히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되게 잘 챙겨.”
* * *
다음 날 새벽.
서울 남부 교도소 앞.
어둠이 채 다 걷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그 앞으로는 출감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다.
12월의 새벽 찬바람에 발까지 동동 구르며,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가족, 형제, 친구를 빨리 만나겠다고 많은 사람이 그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끼익… 하는 쇳소리가 적막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생겨났고, 곧이어 당일 출감자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도소 길은 새벽 정적을 깨뜨리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출감자, 그들의 가족들로 인해 잠시 어수선해졌다가 이내 본래의 새벽으로 돌아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교도소 철문 밖으로 나온 장민규.
더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듯,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집어 던져 놓고 장민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장 먼저 나올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가장 늦게 나온 장민규였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건 딱 질색이다.
특히나 이런 몰골, 이런 교도소 앞에서는 조용히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담배 한 모금을 빨며,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주위를 쳐다보고 있던 장민규 눈에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머니.
다행히 춥게 입고 계시진 않았다.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오시면서도 치장을 포기하지도 않으셨고.
하지만 멀리에서도 그간 훌쩍 늙어 버린 어머니의 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민규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모금 담배를 빨아 연기를 내뱉은 후, 아직 탈 부분이 많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구둣발로 두어 번 짓누른 뒤 어머니가 다가오고 계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부.
두부를 챙겨 오셨다.
그것도 직접.
더는 어머니를 수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이른 새벽부터 직접 차를 운전해 여기까지 찾아오신 어머니와, 어머니가 들고 계신 두부를 보는데 왈칵하고 뜨거운 감정이 목울대를 때리기 시작했다.
“먹어.”
먹지 않을 생각이다.
이딴 미신 따위!
“먹으라니까.”
“두부 안 먹는 거 알잖아요. 날도 추운데 뭘 이런 걸 챙겨 왔어요? 차 키나 줘요.”
검은색 벤츠 차량.
장민규는 터벅터벅 그 차량 앞으로 다가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아버지 계신 데는 어떻게 면회 신청을 미리 해야 되나?”
“바로 가 보게?”
“가 봐야죠.”
“뭘 그렇게 급하게 해? 며칠 전에 엄마가 가서 들여다봤어.”
“그거하고 같아요, 이게?”
“평일 아침 면회는 딱히 신청을 안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금방 빠지더라.”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장민규는 숨이 안 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 2년 만에 이혼을 당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신경 쓸 사람이 그만큼 줄은 거니까.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징역을 살게 되고, 부경통신과 건설이 공중분해되는 순간 어머니 쪽 외가 인간들은 자기 살길을 찾느라 어머니와의 줄을 끊어 버렸다.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사람, 곁에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장민규는 재경가와 큰집, 장민석에 대한 복수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차에 시동을 걸기 전 교도소 안에서 챙겨 나온 종이 쪽지 한 장을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장민규.
곧바로 그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폰으로 옮겨 찍은 후 차창을 열어 밖으로 그 쪽지를 버렸다.
두 번, 세 번… 신호음은 일곱 번째 이어지고 있었고, 폰을 귀에 붙인 채로 장민규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침내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무척 짜증스러운 음성이었다.
“여보세요?”
강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
장민규보다 일주일 먼저 출감했던 오지만이었다.
“오 사장님.”
―누고?
“장민귭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뭐고? 그냥 하는 말인줄 알고 혹시나 해서 번호를 남기긴 했는데, 진짜로 전화를 줄 줄은 내 몰랐네. 뭔교? 나온 거예요?
“네, 지금 막 나왔습니다.”
―맞네. 그렇겠네. 아이고, 벌써 날짜가 이래 됐네. 아이고야, 안에서는 하루가 일 년 같아도 밖에 나오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르거든.
“이 번호로 오 사장님이 받기 편한 계좌 번호 하나 찍어 줘요.”
―뭐고? 뭔데 이래 급하노? 금방 나온 사람이 좋은 것도 좀 챙기 묵고, 좋은 데도 찬찬히 돌아보고 해야지, 나오자마자 시동부터 거는 법이 어딨어요?
“길게 통화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나중에 따로 한번 만나더라도 계좌 번호부터 하나 찍어서 보내요.”
―그라입시다.
“나중에 또 통화합시다.”
오지만과의 통화를 끝낸 아들을 쳐다보며 어머니가 물었다.
“누군데 나오자마자 계좌 번호를 보내라고 그래?”
“있어. 말해도 엄마는 몰라요.”
“…….”
“아버지 계신 데 근처에는 아침 식사 할 만한 데 있나? 식사 안 하고 나오셨지?”
“입맛도 없다.”
“누군 지금 그게 있어서 먹자고 하는 거겠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