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우린 숨도 쉬지 말까?
이른 아침.
정태는 평소보다 조금 느긋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루 사이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항상 곁에 있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귀해 보이고 당연하지 않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겸손하자,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매사에 진심을 담자….
그렇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저녁, 정체 모를 누군가가 정훈이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겸손과 최선, 그리고 진심에 나의 행복도 포함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제 저녁 아내와 잠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국 어제 하루 정태가 느꼈던 불안과 걱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가진 게 많았다.
가지고 있는 게 이미 많았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 그리고 아내 배 속에 있는 승현이의 동생, 재경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까지….
재경이라는 울타리는 할아버지가 처음 만드시고, 아버지가 지키고 계시지만, 아내와 승현이, 그리고 현재 아내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둘째는 정태 자신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자신은 그 울타리를 지켜낼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작 자신이 만든 울타리도 제대로 못 챙기고 있으면서 할아버지가 만드시고, 아버지가 지키고 계신 울타리에 너무 많은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착이 앞으로도 쭉 자신이 만들어 갈 울타리 안을 소홀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걸 어제 갑자기 깨달았다.
재경을 위해서만 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오로지 재경을 위해서만 산다는 건, 자신의 인생이 아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아쉬운 삶을 대신한다는 건데,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뜻을 위해서만 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말문이 트여서, 뜻도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고 있는 승현이.
그런 승현이와 하루 단 한 시간, 아니 30분이라도 제대로 눈을 맞추고 함께 놀아 줬던 적이 있었던가.
이 사랑스러운 아기의 목욕을 직접 시켜 봤던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이 또래의 아이들 성장 발달이 어느 정도여야 정상인 것인지, 그 정상에 승현이는 어느 정도 부합되고 있는지를 직접 챙겨 보고 확인을 해 봤던 적이 있었던가….
재경보다 더 우선순위에 둬야 할 게 분명 있고, 또 그런 존재가 현재 아내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데, 백 년, 이백 년을 살지도 못하는 한 번뿐인 인생을 오로지 재경만을 위해 산다는 건… 한 번뿐인 인생을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자신에게 너무 큰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해?”
“뭐 하긴, 승현이 밥 먹이잖아.”
“그니까 그걸 당신이 왜 하냐고. 출근 안 할 거야? 씻었음 얼른 옷부터 갈아입어.”
원수경은 잠옷 차림으로 승현이 밥을 먹이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어어? 왜 평소 안 하던 짓을 해? 승현이 이제 혼자서도 잘 먹어. 겨우 혼자 먹는 거 버릇 들여 놨는데, 그걸 왜 먹여 주고 있어? 그만해.”
“오늘만. 내가 뭐 맨날 하나. 생각을 해 보니까, 내가 승현이 분유는 먹여 봤어도 밥을 먹여 본 적은 없는 거 같아.”
“그걸 생각을 해 봐야 아는 거야?”
“내가 그간 말로만 육아를 다 했어, 그지?”
“이제라도 알아주니 성은이 망극하네.”
“근데 이렇게 크게 잘라 줘도 괜찮은 거야? 이거 안 씹고 바로 삼켜서 목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참 걱정도 팔자다. 왜? 그냥 죽만 먹이라고 하지? 알아서 다 잘라 먹고, 씹어 먹고 해.”
바로 그때 식탁 위로 올려뒀던 정태의 폰에 불이 들어오며 식탁 전체로 묵직한 진동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네, 아버지.”
―출근 준비 중이지?
“네, 지금 밥 먹고 있습니다.”
―어제 정훈이 따라붙었던 차량 말이다.
정태는 들고 있던 아기 숟가락을 고무 식판 위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수경은 그런 남편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봤다.
“네.”
―방금 차량 주인 확인했다.
“누굽니까?”
―허, 대현일보 스포츠·연예부 기자 차량이란다.
어제저녁부터 조금 전까지,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알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한순간 발끝 아래로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흘리신 헛웃음만큼이나, 그보다 더 큰 허탈한 감정에 정태도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조 전무 시켜서 그쪽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주의를 주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다.
그 정도로 마무리를 지을 사안이 아니다.
정태는 생각했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이 정체 모를 차량 하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마음이 바빴나.
―왜 대답이 없어?
“어이가 없어서요. 어이가 없어서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네요.”
―큰 사업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는 거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직접 상대하고 신경 쓰고… 그러면 제풀에 지치는 거야. 기분 나빠도 어쩌겠어?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문제라고 하니까,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어라.
“아버지.”
―그래.
“제가 출근길에 대현일보 잠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심 주필하고는 서로 안면도 있고요. 그냥 넘어가 줘도 되는, 고만고만한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면 그렇게 해. 그래, 조 전무보다 네가 직접 찾아가서 한소리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아침부터 너무 우악을 지르지는 말고, 두 번 다시 그런 일 안 생기도록, 강하게 주의를 주는 정도로만 정리를 해.
“네. 아버지는 식사하셨습니까?”
―나도 하는 중에 전화 받았다.
“정훈이한테는 전화 주셨습니까?”
―아직. 네가 좀 주든지.
“네, 그렇게 할게요. 정훈이한테는 제가 전화해서 상황 설명해 줄 테니까,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식사하세요.”
원수경은 통화를 끝낸 남편에게 바짝 다가가 뭐라더냐며 물었다.
“아버님이야?”
“어.”
“뭐라셔? 찾았대?”
“대현일보 스포츠·연예부 기자 차량이래.”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는 원수경.
그런데 갑자기 왼쪽 가슴 부위에 손을 올리며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왜?”
“몰라, 갑자기 심장이 좀 조이는 기분이네. 어제, 오늘 그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많이 썼던 모양이야.”
“괜찮아?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더니, 갑자기 그래?”
“어쩜 사람들이 그래?”
“…….”
“기자라면 뭐 정훈이, 아니 서방님… 하아, 이건 진짜 선 넘은 거 아냐?”
“걔네한테 선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그래서 아버님은 뭐라셔? 뭐 어떻게 하시겠다거나, 당신한테 어떻게 하라는 말씀 같은 건 있으셨어?”
“하여튼 펜쟁이 새끼들….”
“쓰읍!”
원수경은 승현이 앞에서 왜 그런 말을 쓰냐며 인상을 썼고, 정태는 애써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쏘리.”
“그럼 어제 경호 왔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거야?”
“오늘은 어제 이야기한 거처럼 승현이 어린이집 보내지 말고 같이 있어. 별일 아닌 게 맞더라도, 그룹 본사에서 보낸 사람들 철수하기 전까지는 가급적 집에 있어 줘.”
* * *
대현일보 사옥 지하 주차장.
정태는 CCTV에 잡혔던 회색의 구형 제네시스 차량을 발견하고 번호판까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켜 보지만, 막상 여기까지 찾아와서 해당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니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대현일보 심현철 주필과 통화를 했고, 그와 약속을 잡았다.
대략적인 내용은 통화로 다 설명을 했고, 해당 내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심 주필로부터 사과까지 받은 후였다.
대현일보는 현재 재경의 가장 가까운 우군 중 한 곳인 태영유통의 사돈이기도 했다.
미래금융과 함께 부경통신을 잡을 때, 언론 중에선 가장 앞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어 줬던 고마운 곳이기도 했기에 이번 내용이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정태였다.
심현철 주필의 사무실엔 이미 제네시스 차량의 주인으로 보이는 기자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심 주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마도 아침 일찍 정태의 전화를 받은 심현철 주필이 해당 기자를 직접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정황을 따져 묻고 심하게 혼을 낸 모양이었다.
정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심 주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해당 기자는 힘겹게 고개를 숙이며 어려운 인사를 건넸다.
정태는 그 기자와 짧게 성의 없는 눈빛 교환만 한 뒤, 심 주필이 권하는 소파 자리로 앉았다.
“참 이게… 뭐라 변명을 하기도 민망한 실수를 저희 쪽에서 한 거 같습니다.”
심 주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기자는 아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정태가 말했다.
“어제 오후 5시가 거의 됐을 때였어요. 저희 회장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
“저희 회장님은 평소 어지간한 걸로는 화를 잘 안 내시기로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럼요. 잘 알죠.”
“통화를 하면서 저한테 몇 번이나 큰소리를 치시는 겁니다. 그만큼 해당 내용에 많이 놀라셨고, 또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다는 증거 아니었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손정훈 상무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
“기자님?”
정태는 아주 차갑게 해당 기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네.”
“애 있으세요?”
“…네.”
“그럼 진짜 못된 건데? 너무 나쁜 거잖아, 이거.”
“…….”
“누가 기자님을 몰래 따라다니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아니구나. 오히려 그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네. 평소 하시는 일이 그런 일인데, 똑같이 당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거잖아.”
“…….”
“기자님 말고, 기자님 가족 중 한 사람한테 누군가가 따라다니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기자님 애한테 누가 따라다니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자고. 그런데 그 누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기자님은 몰라. 그냥 누가 계속 몰래 따라만 다니는 거야. 따라다니면서 뭘 하는지도 몰라.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따라다니는 건지, 뭘 캐내겠다고 따라다니는 건지 모른다고.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요즘 세상이 좀 무섭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기. 분. 이 어떨 거 같냐고!”
“……!”
“왜? 우린 다를 줄 알았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누가 몰래 따라다니고, 몰래 사진 찍고…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긴, 맞아. 우린 당신들하고 달라. 가진 게 많잖아. 가진 게 많아서 지켜야 할 것도 많은 사람이라고. 그 와중에 우린 법까지 지켜야 하네? 그런데 당신들은 그런 최소한, 기본까지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야? 그래 놓고 기자랍시고 다른 사람들 치부는 적나라하게 캐내지? 당신들이 말하는 그 도덕적 잣대,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만 들고 있어야 되는 거잖아. 그렇지?”
“…….”
“어제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당신 때문에 재경 그룹 본사가 초비상사태에 들어가 있었어. 온 가족한테 경호팀이 다 붙었고, 우리 애는 오늘 어린이집도 못 보냈어. 몇 명이 당신 취재 욕심, 특종 욕심 때문에 밤잠 설쳐 가며 대기하고 긴장을 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그렇지. 죄송하지. 우린 또 그런 사과 한마디에 통 큰 척, 대인배인 척 그냥 넘어가 줘야 되는 사람들이고. 안 그럼 안 되잖아. 고작 이만한 일로 문제 삼으면 재벌 갑질 소리가 나오는 거 아냐? 안 그래요?”
“…….”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이건 진짜 짐승들도 안 할 짓 아닌가? 아무리 당신들 하는 일이 그런 거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는 안 줘야 할 거 아냐. 주필님.”
“네, 사장님.”
“저희 회장님은 아침부터 서로 큰소리 내지 말고,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강하게 어필만 하는 선에서 정리를 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안 될 거 같네요. 이 사람 지금 제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고 있잖아. 제 동생 따라다니면서 미행을 한 거에 명분이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란 소리 아니에요? 그냥 호기심, 뭔가 흥밋거리를 잡아 보겠다고 따라다녔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거잖아, 이거.”
그제야 기자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에 배우 채서린 씨가 사는 집에서 술 취한 여자를 업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는 제보가 있었….”
“그게 죄냐고! 술 취한 여자. 업을 만하니까 업었겠지. 채서린이도 만날 만하니까 만났을 거고. 그 집도 갈 만했으니까 갔을 거 아니냐고. 당신이 뭔데 그런 남의 사생활까지 다 알아야 하나? 당신이 뭔데? 왜? 우린 사생활도 즐기면 안 돼? 우린 사람 아냐? 우린 숨도 쉬지 말까?”
그제야 심 주필은 왜 쓸데없는 핑계를 대서 사람 열을 더 올리느냐는 식으로 해당 기자를 강하게 쏘아봤다.
“내 어떻게 생긴 인간인지 직접 얼굴이라도 봐야 할 거 같아서 온 거예요. 당신 하나 때문에 어제, 오늘 우리 재경 그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곤했고, 수고를 했는지도 직접 말해 줘야 할 거 같기도 하고.”
더는 볼 게 없다는 듯 정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정태를 심 주필이 얼른 붙잡으며 말했다.
“벌써 일어나시게요? 금방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지….”
심 주필의 얼굴엔 이마 위로 맺혔던 땀방울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필님이 저 같으면 지금 여기에서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
“오늘 이 시간부로 대현일보로 잡아 준 재경의 모든 광고는 다 내립니다.”
“사, 사장님!”
“아침부터 큰소리 만들어서 미안해요. 가 보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