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77화 (277/303)

277화 저는 못 이기겠습니다

교도소 면회실 아크릴 판을 사이에 두고 장선길, 장민규 부자가 마주 보고 앉았다.

못 뵌 지난 8개월 사이에 아버지의 머리 위로는 흰 서리가 가득 내려와 앉아 있었다.

원래부터 흰머리 새치가 많으신 분이다.

항상 염색으로 그 흰머리 새치를 숨기셔서 그렇지.

정돈되지 못한 아버지의 수염들까지 장민규를 열받게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정, 자식의 도리?

아니, 그런 감정들과는 달리 자신의 부경통신과 부경건설을 공중분해시켜 놓고, 세상에 다시 나온 자신에게 더 이상 몸 둘 곳이 없도록 만들어 버린 재경가와 큰아버지, 그리고 장민석에 대한 증오심이 장민규를 불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 나온 녀석이 곧바로 여기부터 와?”

수감복 차림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민규의 두 눈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집에 계셨음 당연히 집으로 갔겠죠.”

“그동안 고생 많았다. 당분간은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쉬면서 몸 관리해.”

“아버지는 어떠세요? 지내시는 데 불편한 거 없으세요?”

“바깥만 하겠어?”

장민규는 아버지의 말씀 앞에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차라리 감옥이 났지, 바깥은 지옥인데….

안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든 할 수 있는 바깥은 장민규에서 출감 두 시간 만에 벌써부터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목표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건 안 키우면서 살아왔던 장민규였다.

그런 장민규에게 목표라는 게 생겼다.

그리고 그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완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하루라도 빨리 목표물들에게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지옥의 맛을 공유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어땠냐. 지낼 만했냐?”

“바깥만 했겠어요?”

아버지가 웃으신다.

저 안에서 저런 옷을 입고, 저런 모습으로 웃고 계신다.

장민규는 아버지의 웃음이 저렇게까지 편안한 건 처음 봤다.

항상 정장 바지 주름만큼이나 날이 빳빳하게 서 계셨던 분이 아니었나.

부경가의 차남으로, 큰아버지보다 더 부경을 위해 한 일들이 많으셨고, 우유부단한 큰아버지를 대신해 위험도 더 많이 감수하셨던 게 아버지셨다.

집안의 대소사에 관한 결정들도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정해지는 게 훨씬 더 많았을 정도로, 아버지는 부경 2세대의 중심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무너지기 전까지의 부경을 지탱하고 발전시켰던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잘라 냈다고?

그것도 무능하기 그지없는 큰아버지가?

장민규는 속이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조만간 네 큰아버지한테서 연락이 갈 거다. 그 전에 네가 먼저 연락을 드려.”

“큰아버지요?”

“지난주에 면회를 왔었다. 네 이야기를 묻더라. 출소할 때 다 됐지 않냐고. 지금 네 큰아버지 쪽도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지만, 조카 하나 못 거둘 정도는 아닐 거다. 다시 자리 잡을 때까지 큰아버지 밑에 있어.”

“다시 자리를 잡아요? 무슨 수로요?”

“…….”

“끝난 거예요, 아버지.”

“급하게 뭘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쉬어. 마음 가라앉고, 네 속에 있는 화가 어느 정도 다스려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디 외국에 나가서 바람을 쐬든 친구들 만나 회포를 풀 든, 그것들이 무료해질 때까지 너 스스로를 가만히 놔둬. 그래도 먼저 연락 오기 전에 네가 먼저 연락을 넣어 드리고.”

의미 없는 말만 길어질 거 같아, 장민규는 그러겠다고 속에 없는 말로 대답을 했다.

“넘어졌을 땐 무리하게 곧바로 일어서려고 하는 거보다, 잠시 넘어진 그대로 가만히 있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넘어지는 건 잘못이 아니야. 사람이 살다 보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남의 발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다 그러는 법이다. 하지만 한 번 넘어졌다고 다시 일어서 볼 생각을 못 하는 건 잘못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 테니까, 아버지는 바깥 걱정하지 마시고, 안에서 아버지 몸이나 잘 챙기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민규야. 급할 거 없어. 잠시 넘어져 있던 동안 남들이 저만치 멀리 가고 있다고 해서, 그 거리를 원래 네가 있어야 하는 거리라고 생각할 필요 없는 거야. 힘들겠지만 좋게 생각해라.”

“그러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죠?”

“…….”

“아버지 입에서 그런 도인 같은 말이 나오는 건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또 저만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요.”

“민규야….”

“며칠 있다가 다시 찾아뵐게요.”

“뭘 또 와, 오긴. 자주 오지 마라. 내가 지금 네 앞이라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서 그렇지, 자식한테 이런 꼴 보이고 싶은 부모가 몇이나 되겠어?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달에 한 번씩… 그것도 네 시간 되면 찾아와.”

장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끄덕이는 고개와는 달리, 자리를 일어서며 아버지에게 남긴 말은 “며칠 뒤에 뵐게요.”였다.

면회장을 빠져나온 장민규는 면회 신청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장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왔어? 야, 인마. 너 언제 나왔어?

세상 반가운 목소리다.

―숙모님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무슨 이야기?”

―내가 너 나오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 달라고, 어제 숙모님한테 전화로 부탁까지 했었어.

“그랬어?”

―숙모님 또 깜빡하셨나 보네. 안 그래도 어제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숙모님이 뭐 하러 그러냐고 혼자 가시겠다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아니다, 같이 가겠다 했는데, 한사코 혼자 가겠다고 하셔서 그럼 너 나오는 대로 나한테 전화 달라고 그렇게 말 좀 전해 달라고 했거든.

“고맙네. 감동이야. 역시 형밖에 없다, 나 챙겨 주는 사람은.”

―그걸 이제 알았냐, 이 자식아? 그래서 지금 어딘데?

“아버지 잠깐 뵙고 나오는 길이야.”

―아침부터 뭘 많이 했네. 야, 너 형한테 와라, 지금.

장민규는 비록 통화만 하는 거지만, 장민석의 표정이 눈앞에 생생히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뱀 같은 새끼.

박쥐 같은 놈….

“형한테라면 뭐 형네 회사로 오란 말이야?”

―형이 세팅 다 끝내 놨어.

“나 같은 전과자가 회사로 막 찾아가고 그래도 괜찮은 거야?”

―자식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앉아 있어, 형 섭섭하게. 개소리 작작하고 얼른 와.

“가더라도 어머니는 집에 모셔다드리고 가야지.”

―아, 숙모님하고 같이 있지, 지금? 숙모님 모셔다드리고 얼른 와. 나 안 그래도 오늘 너 출소 날이라고 오후 일정 다 비워 놨다. 그동안 날도 추운데, 마땅히 품을 것도 없이 혼자 지낸다고 많이 적적했지? 그동안 묶여 있던 거 풀어 줘야 할 거 아냐.

“조금 이따가 봐, 그럼.”

* * *

“대현일보 쪽에 붙인 광고를 다 내린다 했다고?”

“네.”

재경 그룹 본사 회장실.

출근을 아예 그룹 본사로 한 정태가 아버지 손홍준 회장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조동희 전무도 함께 있었다.

한층 더 단단해져 있는 정태의 모습에 조동희 전무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쪽에서도 기자 단독 행동이었지, 위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던 거 같은데. 그냥 적당하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해 주는 선에서 끝을 내지 그랬어?”

“소문 좀 나라고요.”

“소문?”

손 회장과 조 전무는 잠시 서로를 쳐다본 뒤, 동시에 그 시선을 손정태 사장 쪽으로 돌렸다.

“대현일보 정도 되면, 우리가 광고를 다 내리는 순간 그쪽 바닥엔 소문이 다 깔릴 겁니다. 우리가 왜 일방적으로 우호 언론사인 대현일보 쪽으로 광고를 다 뺀 건지. 기자들 입이 좀 가볍습니까.”

조동희 전무는 눈알만 살짝 옆으로 돌려 손정태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손 회장의 모습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우호 언론사를 상대로도 그런 강수를 두는데, 다른 언론사 상대로는 더한 것도 할 거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잡힐 겁니다. 승현이 엄마는 일부러 SNS 같은 것도 안 합니다, 아버지. 승현이 얼굴 팔리는 게 무서워서요.”

“흐음….”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막겠냐만, 최소한 이런 일이 다시 또 일어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은 대중 앞에 상품으로만 모습을 보이면 되는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상품이 곧 기업이고, 기업 가치라고. 그런데 그걸 방해하면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하는지 정도는 보여 줘야지요.”

“그래,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대현일보는 우리 쪽으로 도움을 많이 준 파트너 개념 아니냐. 너무 매몰차게 끊어 내는 것도 태영유통 보기에 안 좋을 수가 있어.”

“그 줄이 끊어지고 안 끊어지고는 어디까지나 대현일보의 다음 행보에 달린 거죠.”

손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 전무는 속으로 놀람을 감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간 안 본 사이에 부쩍 성장을 해 있는 손정태 사장.

이젠 전체 판을 읽는 눈이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예리해져 있다.

거기에 순간 판단력 또한 크게 성장을 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본인이 대현일보 심 주필을 상대로 그런 강수를 두기 전, 강수를 둬도 되는지 확인부터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됐든, 회장님이 됐든 과한 대응이라는 입장을 보이면, 그 입장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자신의 판단을 무마시켰겠지.

하지만 지금의 손정태 사장은 더는 그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칼같았으며, 그 칼은 잘라야 하는 부분과 잠시 도려내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대놓고 섭섭함을 표현하면 완전히 끊어지는 거고, 어떻게든 관계 회복을 해 보겠다고 애를 쓰면 얼마든지 다시 붙을 수 있는 끈입니다. 그 애를 우리가 쓸 이유는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린 명분을 가지고 있고, 그 명분으로 우리 재경을 대하는 대현일보의 자세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현일보의 반응에 따라 언론판 전체는 우리 재경이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알아서 전달받겠죠.”

“…….”

“우리가 생산해 내는 상품 앞에 서지 마라, 상품보다 더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라, 우리의 행동이 상품의 품질을 깎아 먹는 짓은 하지 마라. 할아버지께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강조하셨던 말씀이었다면서요.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그때랑은 많이 다르죠. 지금은 조심만 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철학은 여전히 맞는 거고. 그렇다면 그 철학이 계속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가 다른 방법, 행보를 걸어야죠.”

조 전무는 속으로 소름을 느끼고 있었다.

손정훈 상무를 상대로 종종 느껴오던 소름.

그와 비슷한 느낌의 소름이 손정태 사장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 조동희 전무를 싱긋이 웃는 얼굴로 쳐다보며 손 회장이 말했다.

“지금 바로 전 계열사에 연락 넣어서 대현일보로 잡아 준 광고들 다 내리라고 하지?”

“네, 회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지금 나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리고 점심 약속은 취소를 하는 걸로 하지. 정태도 왔는데, 그냥 보낼 수 있나. 점심은 먹여서 보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조 전무가 손 회장과 손정태 사장에게 각각 짤막한 고개인사를 건네고 회장실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정훈이한테도 전화를 한번 해 봐라.”

손 회장이 말했다.

“나도 이제 늙었는지, 어제 그 이야기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늙으신 게 아니라, 당연한 거죠. 저도 어제 아버지한테 그 이야기 듣고 머릿속으로 승현이 얼굴밖에 안 떠올랐습니다.”

“허허, 그래, 그렇지. 그래야 정상이지.”

“정훈이한테 전화해서 본사로 들어오라고 해. 점심 같이하게.”

“네.”

정태는 곧바로 폰을 꺼내 정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신호음.

외부 잡음이 많이 섞여드는 걸로 봐서 회사 안은 아닌 거 같았다.

“어디야, 지금?”

―나 지금 안양 내려가는 길인데?

“안양?”

―어, 지금 차 안이야.

“거긴 왜?”

―이 시간에 전화해서 거길 왜 가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 당연히 일하러 가지.

정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룹 본사에 초비상사태가 걸릴 정도로 큰일이 있었고, 그 일의 중심에 정훈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해프닝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외부로 돌고 있다고?

“내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오늘은 가급적 외부 활동은 삼가라고 했잖아.”

―그러겠단 말은 안 했는데?

“야, 인마.”

―알아. 근데 괜찮아. 지금 우리 브랜드 론칭이 바로 코앞인데, 별일 아닌 거 확인됐으면 다시 나가야지, 뭐 한다고 안에 꽁꽁 숨어 있어?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우와, 진짜 이 자식 이걸 내가 어떻게 하지? 야, 인마. 너는 가족들 걱정은 안 하냐?

―우리 가족 중에 나보다 약한 사람이 있나?

“…….”

―근데 론칭 준비 현장은 아니거든. 나보다 강한 사람이 없어. 내가 하는 한마디, 내 일정 하나에 몇십, 몇백 명이 대기를 타고, 기다려야 해. 별일 아닌 걸 알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어? 그중엔 우리 회사 직원 말고도 자기 돈 투자해서 매장 오픈하겠다고 하는 가맹점주들도 있는데.

“졌다. 유 윈이다, 이 자식아.”

―근데 왜 전화했어?

“나 지금 아버지랑 같이 있어. 아버지가 같이 점심하자고 너도 부르라고 해서.”

―죄송해서 어떻게 하지? 나는 아무리 빨리 올라가도 3시는 되어야 서울에 올라갈 거 같은데?

“나도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알거든? 하아, 미친놈 진짜. 일단 알았어. 정훈아.”

―어.

“그래도 항시 조심해라. 그동안 우리가 너무 긴장감이 없었어. 그래서 어제 같은 그런 일도 벌어진 거고.”

아들의 통화 내용을 옆에서 다 듣고 있었던 손 회장.

통화를 끝낸 정태에게 손 회장이 물었다.

“왜? 지금 밖이라냐?”

“안양 내려가는 길이랍니다. 고비드 그거 오픈 준비 중인 매장 둘러보겠다고.”

“아침에 네 전화 받고 바로 일정을 바꾼 모양이네.”

“징글징글하네요, 정훈이 자식. 저는 못 이기겠습니다, 하하.”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