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우리 배운 사람들이잖아
삼성동에 위치해 있는 아란테 리제빌.
초호화 럭셔리 빌라다.
8층, 총 22세대가 들어가 있는 이 럭셔리 빌라는 가장 작은 저층 사이즈가 80평이 넘을 정도로 대형 빌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상류층을 겨냥해 부경건설이 지어 올린 아란테 리제빌.
그 럭셔리 빌라의 펜트하우스는 장민석의 호사 취미 생활을 위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정말 가까운 친구, 지인, 친척 중에서도 장민규 정도만 이곳으로 불러 변태적인 파티를 여는 장민석의 아지트.
장민규를 태운 장민석의 차량은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출소하자마자 외박은 좀 아닐 거 같아서. 오늘 같은 날은 가족하고 같이 보내야지. 그렇다고 네가 나왔는데, 형이 아무것도 안 해 줄 수가 없잖아. 형이랑 빠르게 놀고 회포 좀 풀다가 잠은 집에 가서 자는 걸로 해.”
준비되어 있는 자리가 항상 그래 왔듯, 아가씨들이 준비되어 있는 자리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에 장민규는 피식하고 웃을 뿐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은밀한 이야기가 오고 가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밖에서 하는 거보다는 장민석의 아지트에서 주고받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을 거 같았다.
“형수는 형 이렇게 노는 거 알아?”
“모를 수가 있겠냐?”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을 해? 각자 인생 사는 거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너는 안 그랬냐? 우리가 어디 사람 보고 결혼하냐? 돈, 기회, 배경… 그게 뭐든 최대한 좋은 결과물이 나올 만한 윈윈 상대 찾아 계약서에 도장 찍듯 혼인 신고서에 도장 찍는 거지.”
“하긴….”
“네 형수도 남자 있어.”
“크크큭. 아, 그래?”
“근데 나도 터치 안 하잖아. 이 관계라는 게 말이야, 서로 존중해 줄 건 존중을 하고, 양보를 할 건 양보를 해야 오래 지속되는 거야. 자존심 조금 상한다고 그런 걸로 막 서로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러냐느니, 신파 찍고 앉아 있으면 그게 되겠어? 그런 건 이제 그게 중요하고 자기 인생에 전부인 사람들이나 그렇게 갑갑하게 사는 거고, 우린 그런 게 아니잖아.”
“형수한테 남자 있는 걸로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
“나야 고맙지. 어후, X발. 그런 것도 안 만들고 집에서 나만 기다린다고 생각해 봐라. 그거 어떻게 숨 막혀서 같이 사냐?”
“참 형도 쓰레기야. 자기 냄새 덮겠다고 형수한테 냄새 묻길 응원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 나는 한참 멀었네.”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거 자체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크크큭… 미친.”
“뭐 다 그런 거지. 너 재필이 형 알지?”
“여기에서 재필이 형 이야기가 왜 나와?”
“그 형 취미가 차 사는 거잖아. 맨날 사. 계속 사. 그 형, 형수랑 같이 사는 집 말고 별장에도 몇 대씩 세워 놓고 있어. 그래서 하루는 내가 물어봤어. 왜 타지도 않을 차를 계속 그렇게 사서 모으냐고. 이런 돈지랄만큼 촌스러운 게 없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형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아냐?”
“뭐라는데?”
“진지하게 그러는 거야. 진짜 진심이었어. 좋은 차가 계속 새로 나오는데 어떻게 안 사냐는 거지. 어리고 예쁜 애들이 좀 많냐? 어떻게 애 엄마하고만 같이 살아. 그나마 내가 밖에서 이런 취미 생활이라도 하니까, 조금이라도 가정에 성의를 보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하여간 궤변은….”
* * *
한 층을 통으로 다 쓰는 아란테 리제빌 8층 펜트하우스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
누를 수 있는 층수 버튼도 딱 세 개뿐이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 그리고 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곧바로 거실이 눈앞으로 펼쳐지는 그곳 펜트하우스 안으로 장민규와 장민석이 올라왔다.
이미 장민석의 아지트 안으로는 늘씬하게 빠진 미모의 여자 셋이서 거실 소파에 앉아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 이년아. 오빠가 왔음 하던 거 멈추고 달려와 안겨야 할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모의 여자들이 각자의 몸매를 뽐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 셋 중 한 명은 이 공간이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고, 다른 두 명은 살짝 긴장을 한 상태로 고개까지 꾸벅 숙여 가며 인사를 건넸다.
“오, 뉴 페이스! 괜찮네. 야, 너네 춥냐?”
“아니?”
장민석과의 인연이 제법 되는 듯, 여자 한 명이 다가와 장민규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덥다는 시늉을 했다.
“근데 왜 다들 껴입고 있어? 벗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장민석과 함께 있던 여자가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 둘도 함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기 시작하는 건 장민석도 마찬가지였다.
“넌 뭐 해?”
“…….”
“하긴. 넌 맨정신으로는 여기 처음 와 보지? 넌 나한테 여기 오자고 할 때마다 주로 만땅으로 취해 있었어. 야, 야, 거기.”
“저요?”
“너든, 너든, 아님 둘 다 같이 오든. 와서 얘 벗겨 줘.”
영혼이 없는 눈빛.
그런 눈빛으로 소파 근처에서 옷을 벗고 있던 여자 둘은 마치 일을 하듯 다가와 장민규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한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장민규가 말했다.
“가.”
“…네?”
“가라고.”
“그게 무슨….”
신나게 옷을 벗고 있던 장민석이 옷을 벗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장민규를 쳐다봤다.
“형. 얘네들 보내.”
“뭐라고?”
“얘네들 보내라고.”
“너 설마 지금 얘네들 앞에서 부끄럼 타냐?”
“…….”
“미친놈. 장난감 앞에서 부끄럼 타는 얼탱이가 어디에 있냐, 이 미친놈아. 사람 아니야. 장난감이야. 그냥 네 꼴리는 대로 다 하면 돼.”
“보내라고. 나랑 해야 하는 이야기 있지 않아?”
“할 이야기야 많지. 그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하자고 부른 애들 아냐.”
“딱히 형 입장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거 같은데?”
그제야 장민석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야, 인마. 오늘은 그냥 놀아.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간 묶여 있던 거나 시원하게 풀라고. 형이라고 왜 너랑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없겠냐. 많아. 많은데, 앞으로 시간도 많아. 예열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게 뭐든. 나온 지 하루 만에 달리면, 몸살 난다. 뭐 해, 이년들아. 옷을 왜 벗다 말아? 얼른 다 벗어. 시작 안 할 거야?”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나는 나오기 전에 감방 안에서 이미 예열을 다 해 놓고 나왔어.”
“……?”
“내가 대학 다닐 때 한국 들어와서 쳤던 음주 운전 뺑소니 말이야. 언제 적 일인데, 그게 이제 와서 터졌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가 안 돼. 사건은 이미 다 끝났고, 그걸 들춰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딸려 들어갔지?”
올라왔던 흥이 갑자기 식어 버린 장민석.
특히나 자리에 있는 여자들의 귀가 걱정스러웠다.
장민석은 벗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바지를 입으며 눈치만 살피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다들 나가.”라고 짧게 말했다.
그에 여자들 역시 벗어 놨던 옷들을 급하게 챙겨 입고서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테이블 위로는 여자들이 사용했던 샴페인 잔과 손도 대지 않은 몇몇 음식들, 그리고 샴페인 병이 올려져 있었다.
립스틱이 필터에 묻은 담배꽁초들이 담긴 재떨이도 눈에 들어왔다.
장민규는 그 소파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누군가가 흘리고 간 담뱃갑에서 가는 에세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빼도 박도 못하겠더라고. 너무 정확해서. 꼭 당시 그 일을 잘 아는 누군가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서 검찰이든, 아님 재경 X발 X끼들이든… 그쪽으로 넘겼다고밖에는 이해가 안 될 정도였어. 그리고 난 그 누군가가 무조건 형일 거 같거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잖아. 내가 그때 그 일을 술 먹고 다 털어놓은 상대가 한국엔 형 말곤 없거든.”
“……!”
“형이 날 잘 몰라서 했던 실수였던 거 같아? 나는 형처럼 입이 가볍지가 않아. 한국엔 정말 우리 가족, 형 말고는 그때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아, 담당 변호사는 대충 알겠네. 근데 그 양반이 이제 와 나 X 돼 보라고 뻘짓을 했을 리는 없잖아. 내 변호하면서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안 그래?”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 장민규는 자체 바가 꾸며져 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 취향에 맞는 위스키 병을 들어 돌려 땄다.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이거 마셔도 되는 거지? 땄어, 이미.”
그리고는 잔도 없이 병째 한 모금을 하고 나서 얼어 있는 장민석에게 와서 앉아 보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장민석을 맞은편에 앉혀 놓고 장민규가 말했다.
“형은 한잔 안 해도 돼?”
“뭔가 네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오해는 무슨. 쫄지 마. 뭘 쫄고 그래? 지금 내가 형이 내 뒤통수 갈긴 거 가지고 뭘 할 수 있다고.”
샴페인 잔 하나를 들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그 안으로 들고 있던 위스키 병의 내용물을 가득 담아, 그걸 장민석 앞으로 내려놨다.
그리고 장민규가 말했다.
“서로 다 알 만한 사람끼리, 괜히 입 아프게 돌아가지 말자. 기분은 X나 나쁜데, 진짜 성질 같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형 배딴지에 구멍 몇 개 내주고 싶은데… 사실 복수라는 게 그렇잖아. 그게 어디 억울하다고 다 할 수 있는 거야? 억울한 놈은 평생 억울한 거고, 복수는 힘이 있는 놈들이나 하는 건데, 지금 난 형한테 뭘 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사람 아냐.”
“그렇게 말하면 형이 좀 섭섭해지려고 한다.”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
“좋아.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자료 정리해서 넘겼어. 그런데 그걸로 네가 억울해하면 안 되는 거야.”
“크크큭… 역시, 역시는 역시야, 그지?”
“내가 그걸 왜 넘겼는데? 왜 넘길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건 작은아버지야. 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려서 일을 키우신 거 아냐. 그때 그거 때문에 우리 쪽으로 얼마나 피해가 컸는지 알아? 정확한 액수로 피해 손실액을 따져 봤더니, 10년이 날아갔어. 왜? 작은아버지가 재경이랑 미래금융을 건드려서. 내가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 화학, 물산은 너네 통신, 건설 꼴이 안 날 수가 있었다고.”
네 말이 다 맞는다는 식으로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인 장민규가 다시 한 모금 병째 위스키를 마셔 놓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속으로 형을 참 많이 무시했거든? 형뿐만이 아니라 큰아버지도 무시를 했어, 내가. 도대체 왜 저렇게 사나, 새가슴 주제에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고… 우습지도 않은 거야. 그런데 이번에 이 일 통해서 깨달았잖아. 아, 이래서 바퀴벌레가 아직까지 생존을 하는 거구나.”
“뭐?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존경심까지 들더라. 그렇게 하니까, 살아남는구나. 그래, 저게 실력이지. 리스펙.”
“선은 넘지 말자.”
“넘지 말아야 될 선을 그어 봐, 그럼 어디 한번. 내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선명하게, 크게 잘 그어야 할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진짜 형처럼 못 할 거 같거든. 내가 만약 형이었다면, 나랑 마주치는 거 자체가 불편할 거 같아. 불편한 게 뭐야? 무서울 거 같은데?”
“…….”
“근데도 형은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긴 했지만, 면회를 세 번이나 왔어. 다른 사촌들 다 한 번을 올까 말까 하는데, 형 혼자 세 번을 왔어. 그때 내가 확신을 했어. 내가 하고 있는 의심이 맞는구나. 형이 사촌들을 이용은 해도 챙기는 인간은 아니잖아. 이유 없이, 목적 없이 그러는 사람이 아닌 걸 내가 다 아는데, 세 번이나 찾아오는 걸 보고 확신을 안 가질 수가 없잖아.”
“…….”
“내가 형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날이 다 올지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어?”
다시 한 모금.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장민규의 흥분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부탁?”
“형. 나 돈 좀 해 주라.”
“…….”
“콱 그냥 뒤져 버렸으면 모르겠는데, 살아 있잖아. 살아 있으니 앞으로도 살아야지, 어쩔 거야?”
“돈?”
“응.”
“얼마나?”
“뭐 한 세 장 정도?”
“세 장? 삼십 억?”
“에이 씨, 왜 그러냐, 진짜? 누굴 거지로 알아?”
“삼백 억?”
“얼굴 그렇게 다 팔려 놓고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 한국에서 뭘 시작해 볼 수나 있겠어? 있다고 해도 안 하고 싶어. 형도 나 불편할 거 아냐. 가능하면 안 보고 싶을 거 아니냐고.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걸 형도 알게 된 이상.”
“그 큰돈을 내가 어떻게 구해?”
“앞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살 수 있는데, 형한테 그 정도가 돈이야? 나도 그 정도 총알은 있어야, 이 나라 포기하고 딴 데 가서 자리를 잡아 볼 엄두라도 내 볼 거 아니냐고. 형.”
잠시였지만, 아주 깊숙하게 장민석의 얼굴을 뜯어본 뒤 장민규가 입을 열었다.
“나라고 형이 가진 약점을 모를까.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화학에서 큰아버지 허락하에 형이 만든 비자금부터 시작해서, 여기 이 공간도 그렇고, 또 다른 형 사생활 관련된… 돈도 건강이랑 똑같아, 형. 내 손에 들어와 있을 때 지키는 거야.”
“…….”
“나는 이제 잃을 게 없잖아. 혼자 죽고 싶겠냐고. 누구 하나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지. 꼭 누구 하나를 정하라고 하면 내 뒤통수 때린 형도 유력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다 같이 죽을 순 없는 거고, 가급적이면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우리 배운 사람들이잖아. 형이 좀 도와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