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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79화 (279/303)

279화 그냥 여기에서 자고 가야겠다

“파파라치 해프닝이 빡! 한 번 휩쓸고 가니까, 이런 건 좋네.”

하늘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피자 박스 하나를 들고.

박스 밑부분은 따뜻하다 못해, 살짝 뜨겁기까지 했다.

내게 그 피자 박스를 떠넘기듯 넘겨 놓고 하늘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가?”

“처음이야. 오빠가 먼저 집으로 오라고 한 게.”

“어중간한 시간에 보자고 하니까 그랬지.”

“그래도 겁은 나나 봐? 저녁 같이 먹자는 거까지 다음으로 미루려고 했던 거 보면.”

“당연히 겁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겁이 안 나면 그게 비정상 아닌가?”

“다행이네.”

“설마하니 내가 그 정도 조심성도 없을 줄 알았어?”

“아니. 그날 입 맞춘 이후부터 내가 각 잡고 들이대는 게 부담스러워서 핑계를 대는 거면 가만히 안 놔두려고 그랬거든.”

“너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 네가 뭐가 부담스러워, 내가? 이거 뭐 어떻게 해? 지금 바로 먹을 거야?”

아일랜드 테이블 위로 피자 박스를 올려놓고, 리본을 풀어야 하는 건지 물어봤다.

그에 하늘이는 화장실도 아닌 싱크 수도로 건성건성 손을 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피자 이걸로 되겠어?”

“이거면 충분하지.”

“집에 맥주는 있지?”

“냉장고 열어 봐.”

“마셔도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또 영감 잔소리 시작되지는 않을까 해서 미리 먼저 물어본 거지.”

“영감 잔소리?”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 또 술 마시고 이번엔 대리 등에 업혀서 나갈 거냐고.”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마실 건데, 피자 사 온 사람한테 넌 운전해야 되니 마시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뭔 맥주도 따기 전에 맥주 가스 빠지는 소리야? 어지간히도 쿨한 척 한다.”

“쿨한 척?”

“딴에는 그러는 게 쿨해 보인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엔 선 긋는 거로밖에 안 보이니까 우리 결혼 무를 거 아님 이제 좀 어지간히 해. 너무 그렇게 선 긋는 거 매력 없다?”

“야, 너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또 괜히 여자가 어쩌고저쩌고하면 저 입이 날 살려나 주겠나.

“너는 뭐?”

“아니다.”

“어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말하다가 끝까지 다 안 하고 끊는 거잖아. 그럴 거면 아예 시작을 하지를 말든지. 너는 뭐?”

“무슨 여자가 너는 창피한 것도 없냐?”

“왜? 어느 정도 내숭은 떨 줄 아는 여자 좋아해? 장르 좀 바꿔 줘?”

하늘이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와 아일랜드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딴 맥주를 가로채듯 자기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난 하는 수 없이 새 맥주를 따서 목을 축였다.

“응? 왜 대답이 없어? 장르 한번 바꿔 봐? 바꿔 봐 줘?”

“아서라. 지금도 충분하니까, 그냥 피자나 먹자.”

“아니, 왜? 장르를 다시 한번 바꿔 보는 것도 나름 신선하고 재밌을 거 같은데? 나만 재밌을 거 같은 건가? 내가 먼저 입 맞추고 좋아한다 고백까지 했어. 그리고 오늘은 직접 피자까지 포장해서 집으로 찾아왔지. 해 보니까 할 만해. 생전 안 해 보던 걸 해서 그런지 어색하긴 해도 아예 못 할 걸 하고 있단 생각도 안 들고. 언제든지 말만 해. 노력 정도는 해 볼 테니까.”

“노력을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하시고, 지금은 피자나 먹읍시다.”

“진짜 알아서 해도 돼?”

“언제는 안 그랬냐?”

“그럼 나 오늘 술 좀 편하게 마시고 여기에서 자고 갈까? 알아서 하라며?”

“…….”

갑자기 푸훕! 하고 혼자 웃음을 터뜨려 놓고 하늘이가 말했다.

“쫄보. 쫄지 마. 자고 가라고 수작 부려도 내일 아침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가 봐야 돼. 근데.”

눈까지 가늘게 끈 채 섭섭하단 표정으로 하늘이가 말했다.

“내가 그런 말 안 해도, 보통 이런 상황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2년이 넘은 남녀 사이에 오고 가야 할 정상적인 대화라면….”

“정상적인 대화라면?”

“빈말이라도 자고 가… 정도가 나와 줘야 하는 게 맞는 거야, 이 인간아. 아님, 조금만 마시고 깨면 가라… 정도나. 참 어지간히도 비싸게 군다.”

“내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충분히 이해하니까. 내가 요즘 오빠 때문에 이해력이 넓어지고 있어. 어지간한 상황 앞에선 당황도 잘 안 해. 워낙 말이 안 되는 사람이랑 자주 같이 있다 보니까, 웬만큼 특이한 사람은 특이해 보이지도 않는달까?"

“이해? 무슨 이해?”

하늘이는 맥주를 캔째 몇 모금 마신 후, 야트막하게 트림을 흘렸다.

그리고 트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인지, 싱긋이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빠라도 그럴 거 같긴 해.”

“그니까 뭐가?”

“기억이 아직 안 나잖아, 하나도. 기억이 다 있는 나도 감정이 지금처럼 올라오고, 또 이 감정을 스스로 확신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 중간에 비즈니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우리 관계에서 오빠까지 나처럼 감정을 만들어 내는 건 쉽지 않겠더라고.”

“…….”

“그때 말했잖아.”

“그때?”

“우리 집 내 방, 침대 위에서. 난 안 하면 안 했지,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건 어설프게 안 한다고. 오빠 지금 감정 충분히 이해, 존중하고 동시에 내 감정도 이해, 존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니까 이거 말고는 없는 거야.”

“피자?”

“내가 조금 더 과감해지는 거. 그리고 오빠를 안심시켜 주는 거.”

“과감까지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는데, 거기에 안심을 시킨다는 건 또 무슨 말이냐?"

“원래 우리 둘 사이. 결혼 이야기랑 상관없이 나름 괜찮았어. 꼭 오빠랑만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었고, 정태 오빠랑도 사이가 괜찮았어. 나쁘지 않았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까? 어쨌든 어른들 문제, 우리까지 가져가지 말자… 했던 거지, 우리끼리.”

그랬구나.

그래, 잘했네.

“대학에서 다시 만나고, 오빠랑 나 사이에 요란다가 끼어서 불편한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친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

“야… 너 이거 지금 내가 기억 안 돌아온다고 막 갖다 붙이는 건 아니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건 내가 아니라 오빠 같은데? 내가 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억지로 만들어 갖다 붙여?”

“하긴.”

“그리고… 음… 솔직히 이제 와 고백하는 건데, 요란다 문제의 50퍼센트 정도는 내가 빌미를 제공했던 거 같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중간에서 오빠랑 요란다를 이어 주려고 요란다 부탁을 많이 들어줬거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부탁들을 들어주면서… 질투 아닌 질투를 많이 했어.”

“질투?”

“나도 왜 그랬나 몰라. 너무 어렸잖아. 그게 벌써 8년 전, 9년 전 일이야. 오빠 덕에 이 나이 먹고 그 시절 풋풋했던 감정을 다 들춰 보게 되네. 나는 오빠가 요란다 감정을 거절해 주길 바랐어.”

마치 내 앞에서 지금부터는 모든 걸 다 오픈시키겠다는 듯, 하늘이는 명쾌해진 표정만큼이나 시원하게 맥주캔을 비워 나갔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요란다는 룸메 생활 같이하면서 1년 사이에 부쩍 친해진 친구. 오빠는 우리가 요만할 때부터 가족들끼리 친척처럼 지냈던 시절이 있었던 오빠. 오빠보다는 요란다한테 더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거 같아. 그래서 내키지 않았던 걸 도와주면서 그게 진심인 척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오빠를 많이 귀찮게 했었어, 내가.”

“그랬을 거 같다.”

“어딜 봐서.”

“그냥 딱 봐도 그랬을 거 같아.”

“오빠가 요란다 물 먹였을 때, 내가 오빠한테 잔인한 소리를 많이 했던 건 사실인데, 나 사실 속으로는 무지 좋았다? 그때부터 오빠를 좋아했다, 아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 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었고, 오빠도 알아.”

“그랬냐?”

“그 유학이라는 특수한 환경, 학교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그 안에서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오빠와의 관계를 요란다와 함께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거였을 거야. 그게 오빠가 요란다 마음을 거절했을 때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 안심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던 이유였던 거 같아.”

“그랬으면서 내가 요란다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다시 만나서까지 왜 나한테 요란다 이름을 그렇게 들먹였던 거야?”

“그냥 오빠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나 보지. 나도 한 번씩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는데, 난 누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거, 그 감정을 느낄 때 묘한 희열 같은 걸 느끼는 거 같애. 아마도 그렇게 하면 내게 미안해하는 상대에게 관심을 받는다고 착각을 했나 봐.”

“변태 맞네.”

“그게 뭐든. 지금은 오빠가 기억을 못 하겠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다거나 하면 내가 무진장 쪽팔릴 소릴 내 무덤 스스로 파는 거처럼 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오빠 안심하라고.”

“…….”

“그저 기억을 잃은 거지, 손정훈이라는 사람의 기본 인간성 자체를 잃은 건 아닐 거 아니야. 기억이 없어졌다고 해서 사람이 바뀐 건 아닐 거 아냐. 누구보다 노는 거 좋아하고, 연애라는 감정에 솔직했던 사람이야, 내가 아는 손정훈이라는 사람은.”

노는 걸 좋아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만, 연애라는 감정에 솔직해 본 적은 없었다.

우린 그럴 수 있는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고, 사실 연애라는 감정 자체가 정확하게 어떤 건지 알아볼 만큼 팔자 좋은 인생이 아니었다.

“그런 손정훈이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2년이나 지난 상대, 특히 먼저 고백까지 한 상대를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연애 고자처럼 몸을 사리고 있는데, 내가 좀 더 과감해지고, 오빠를 안심시켜 주는 거 말곤 다른 방법이 없겠는 거야.”

“…….”

“좋아해.”

그 순간 하늘이의 두 눈에 담겨 있는 장난기는 오히려 자신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막 같았다.

“앞으로는 지금처럼 내가 종종 말로도 표현할 거야. 이 나이 먹고 스무 살, 스물한 살 애들이나 할 법한 이런 멘트를 치고 있는 나도 이게 맞는 건가 싶긴 한데, 생각해 보면 스무 살, 스물한 살 때도 난 이런 멘트를 쳐 본 적이 없는 거야. 그래서 요즘 내가 참 예상치 못한 핀트에서 오빠와의 관계 때문에 재미를 느끼고 있어.”

아무리 맛이 있는 피자라도 난 두 조각을 못 넘기겠다.

한 조각에 벌써부터 속이 부대끼는 기분이다.

하지만 맥주가 있으니까.

맥주 한 모금에 느끼한 기분을 식도 밑으로 씻어 내려놓고, 다시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을 때였다.

“근데 손에 그건 뭐야?”

“맥주?”

“아니, 손등.”

손등?

뭔가 싶어서 돌려서 손등을 봤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먹물이 좀 튀었던 모양이다.

“에헤이, 이거 참… 아까 먹 갈다가 먹물이 좀 튀었나 보네.”

“푸훕.”

“허파에 바람 들었냐? 아까부터 딱히 웃을 일도 없는 거 같구만 뭘 그렇게 쿡쿡거려?”

“이러니 내가 영감이라고 하는 거야. 에헤이가 뭐야, 에헤이가. 그냥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빠가 그런 추임새 넣을 때 보면 진짜 찐이야.”

“…….”

난 얼른 옷에는 먹물이 안 튀었는지 확인을 해 보겠다고 이리저리 살폈고, 그런 날 쳐다보며 하늘이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런데 먹물? 먹을 왜 갈아?”

“먹을 왜 갈겠냐?”

“뭐 설마 집에서 붓글씨 쓰는 거야?”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뭐래? 지금 나 웃기려고 농담한 거지?”

“…….”

“실화야? 아니, 진짜 혼자 집에서 붓글씨를 쓴다고? 그것도 손정훈이? 진짜 다양한 방면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참는 모습을 보이더니,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꺼내듯 하늘이가 물었다.

“구경 좀 해도 돼?”

“남한테 보여 줄 정도까지는 아니고….”

“남? 오… 나 지금까지 벽 보고 혼자 떠들었네. 안 되겠다. 나 오늘 그냥 여기에서 자고 가야겠다.”

“위층에 있어. 보고 싶으면 올라가서 보든지. 지금 바로 가게? 이거 마저 안 먹고?”

승현이 동생 이름을 골라 보고 있었다.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 아직 그거까지는 알 방법이 없어서 승 자 돌림에 어감이 뜻과 어우러져 어색하지 않고, 입에 감길 만한 한자를 몇 개 찾아 그게 내 손에도 잘 붙을는지 그걸 확인해 보고 있던 중이었다.

애들 때야 항렬이라는 게 중요하다 보니 사내 애들만 돌림자를 쓰고 여자애들은 쓴다고 해도 마지막 이름 자리에 돌림자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젠 시대도 많이 바뀌었고 더군다나 정엽이 아들이 영어 이름을 쓰는데 꼭 거기에 맞출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승현이한테 여동생이 생긴다고 해도 승 자 돌림으로 같이 쓸 수 있게 혼자서 이름 몇 개를 지어 봤던 거다.

본인들이 싫다고 하면 몰라도, 이상하게 승현이 동생 이름은 내가 신경을 써서 지어 주고 싶다는 생각.

“이거 뭐야? 사람 이름 아냐?”

한자를 제법 읽을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건 또 의외였다.

“승혜, 승애, 승미, 이건 또 남자 이름이네? 승호, 승후, 승민, 이건 뭐라고 읽는 거야?”

“승주.”

“승주? 정태 오빠네 둘째 이름 적어 보고 있었던 거야?”

“어.”

“어렵네. 진짜 어렵다. 이젠 진짜 헷갈리는 걸 넘어서 어지럽기까지 해. 이쯤 되니까 아는 정신과 의사 찾아가서 오빠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어지네.”

“뭐가 또?”

“1년 넘게 대학 생활을 같이했어. 내가 유럽 애들, 미국 애들보다 더 악필인 한국인은 오빠 말고 본 적이 없거든? 근데 지금 이건 진짜 좀 아니지 않나? 나는 서예를 안 배웠겠어? 이 정도를, 그것도 한문을 이 정도로 쓰려면 아무리 못 써도 10년은 넘게 썼어야 정상이야. 10년이 뭐야? 어지간한 서예 강사도 이 정도로는 못 쓸걸? 못 써. 힘들지. 이건 딱 본인만의 필체가 잡힌 거잖아.”

“…….”

“손정훈. 도대체 오빠 뭐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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