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남자네
검정색 운동 가방.
장민규가 차에 옮겨 실은 그 운동 가방 안으로는 100위안짜리 인민폐와 100달러짜리 지폐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든 내용물이 자신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이 묶음들뿐이라는 듯, 아무렇게나 조수석 위로 그 가방을 던져 놓고 장민규는 차를 몰았다.
장민규가 향한 곳은 대림동 차이나타운의 한 낡은 사무실 건물이었다.
1층은 삶은 돼지 귀를 미리 쪄 놓고 말린 다음, 편육처럼 낱개 포장을 해서 팔고 있는 중국식 가게였다.
그리고 2층은 중국 비자와 서류 번역, 공증을 해 주는 공증 인증 사무소였다.
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부터는 미닫이 접이식 철제 셔터가 안에서부터 굳게 잠겨져 있었다.
낡은 건물치고는 꽤 최근에 설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최신식 카메라 한 대가 천장에 붙어 빨간 불빛을 깜빡이고 있다.
철제 셔터 옆으로도 마치 버스에서 볼 수 있을 흰색 하차 벨이 벽에 붙어 있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운동 가방을 들고 그 앞으로 선 장민규의 얼굴엔 피곤함과 무료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지지징….
요란한 소리가 날 것처럼 생긴 벨을 눌렀더니, 예상외로 묵직한 진동만 손끝에 전해질 뿐,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을 하고 있었다.
철제 셔터 사이로 보이는 3층 출입문이 신경질적인 쇠 긁히는 소리를 만들어 내며 바깥으로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
어려 보인다.
많아 봤자 20대 중반.
젊은 남자는 반쯤 정도밖에 열리지 않은 출입문 안에서 밖을 향해 “어찌 왔소?” 하고, 이질적인 조선족 말투로 장민규의 방문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 사장님하고 통화하고 온 거예요.”
“장민규 사장님입니까?”
“네.”
그제야 터벅터벅 몇 계단을 내려와 철제 셔터 앞으로 선 남자는 자물쇠에 걸린 비밀번호를 풀어 셔터를 열었다.
남자가 셔터를 여는 동안 장민규는 눈알만 위아래, 옆으로 돌려 가며 지금 자신이 찾아온 건물의 내부를 훑었다.
“내가 계시는 데로 찾아가도 되는데, 직접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고 그랍니까. 앉으이소.”
창문까지 간판용 시트지로 덮여 있어,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을 켜지 않으면 무척 어두울 것 같은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 안으로는 오지만과 조금 전 철제 셔터를 열어 준 젊은 남자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오지만은 젊은 남자를 나가 있게 만들어 이젠 장민규와 둘만 남게 됐다.
담배 냄새가 고약하게 찌들어 있어, 징역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장민규에게조차 그 공간 안의 공기는 무척 불쾌했다.
오지만은 그런 장민규 앞으로 직접 종이컵에 탄 믹스 커피를 가져다주며 대접을 했고, 곧바로 마주 보고 앉았다.
장민규가 들고 온 검은색 운동 가방이 소파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한국 돈으로 5억 환전했어요. 30만 달러, 나머지는 다 위안으로 환전했어요.”
“5억?”
오지만의 눈썹 끝이 빠르게 꿈틀거렸다.
“작업 사이즈가 클거다 캐서, 내 나오자마자 사무실도 따로 안 구하고 아는 동생 쓰던 작업실 잠깐 빌려 쓰면서 작업 선수들만 섭외하고 있었어요.”
“준비 과정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냥 내가 원하는 결과만 나오면 되는 사람이니까.”
“결과가 좋을라카면, 서로 셈이 맞아야지. 어데 뭐 자식 마누라만 델꼬 이민 갑니까? 작업물이 재경 그룹 관련된 사람이라믄서? 총알받이 한둘이 나 놓고 싹 다 한국 뜰 각오하고 진행해야 되는 작업인데, 이거 가꼬 누구 코에 붙입니까? 뱃삯하고 나면 끝이겠구만.”
오지만은 소파 테이블 위로 올려진 운동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엄지로만 돈뭉치를 살짝 쓸어 올리며 빠르게 확인을 끝냈다.
하지만 장민규는 여유로웠다.
오히려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제가 오 사장님 계좌 번호는 괜히 물어봤겠어요?”
“…….”
“돈은 돈대로 쓰고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못 얻어 내면 그것만큼 모자란 놈이 어디에 있겠냐고.”
그에 오 사장은 기가 찬다는 식으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선수금이다?”
“내가 이런 의뢰는 처음이지만, 무슨 거래든 물건도 안 받고 값부터 치르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보통은 인자 선수금, 착수금 개념으로 50퍼센트는 먼저 받아야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거는 뭐 단가가 워낙 크나 놓으니까….”
“그러면 다섯 장 정도는 오늘 중으로 오 사장님 계좌로 보내 주고요.”
“그라믄 내야 고맙지요. 우리가 큰 파이프가 있는 것도 아이고, 여기서 받은 돈 중국 보내고 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거든요.”
“그럼 이거까지 포함해서 선수금 열 장에 작업 끝나면 성공 보수로 열 장 더 챙겨 드리는 걸로 하면 되겠습니까?”
“확실히 큰 사업을 하시던 분이 돼서 그라는가, 시원시원하시네. 스무 장짜리다 이 말이네. 그라지요?”
“그 정도면 자식, 마누라 데리고 이민 가서 자리 잡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직 장가도 안 갔구만, 자식이 어디에 있고 마누라가 어디에 있다고 그랍니까. 하하. 내 뭐 하나만 물어보입시다.”
“물어보세요.”
무척 좋은 의뢰임엔 틀림이 없다.
20억.
사람 하나 작업하는 데 20억.
한국 돈 3천만 원만 쥐여 준다고 해도 지금 당장 배 타고 넘어오겠다고 할 영혼 없는 조선족 선수들은 널리고 널려 있는 게 이 바닥이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더 믿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한 경우엔 1억 정도를 써야 된다.
그 1억이면 서로 안면이 있는 현지 선수 섭외가 가능하고, 작업 후 잠시 중국이나 필리핀에 보내 놓고 용돈만 챙겨 줘도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게 이 바닥이고.
그런데 구체적인 단가를 맞춰 보기도 전에 선수금이랍시고 환전된 5억을 가방에 담아서 가지고 온 상대.
거기에 오늘 당장 추가 선수금으로 5억을 더 송금해 주겠다고 한다.
이쪽 바닥에서 오지만은 바닥 뼈대가 굵은 인물이었다.
뼈대가 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험한 꼴을 당했고, 뒤통수를 맞았으며, 또 남의 뒤통수를 때리며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오지만 본인에게 크게 위험한 의뢰는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하게 돈으로도 납득이 잘 안 되는 의뢰였다.
인간의 바닥과 끝장 사이에 끼어 줄타기를 하는 삶.
무서울 게 뭐가 있으랴.
지옥이 평균값인 삶을 살고 있는 오지만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도 그려 보지만, 아무리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해도 오지만은 한국 땅을 밟는 게 예전에 비해 무척 까다롭고 번거로워질 거라는 것 외에는 더 나빠질 게 없었다.
그런 수고만 감수를 한다면 5년 정도는 너끈히 충족한 삶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생기고.
하지만 이런 의뢰를 물고 온 상대가 한때 대한민국 안에서는 손에 꼽혔던 부경통신의 장민규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떵떵거리며 먹고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왜 그토록 잃을 게 아직은 많이 남아 있을 것이고, 얼마든지 남부러운 삶을 살 수 있는 이런 인물이 자기 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인지 오지만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작업이야 선수들이 하는 거고, 덮어쓰는 거야 총알받이 꼬마이들이 덮어쓰는 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 뭐 어디 가서 뒤져도 표도 안 나는 사람들 말인 거고, 아직 정확하게 말을 안 해 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경 그룹 관련된 인물이면 그 정도로 덮이지는 않을 거 아니오. 후비파겠지. 안 그렇겠어요?”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 아니, 뭐 당연사 다 알고 있다 그 말 아인교, 지금.”
“네.”
“그걸 알고도 지금 이걸 하겠다고? 나는 상관이 없어요. 판 짜지는 거 보고 선수들 섭외까지만 확인하고 작업 들어가기 전에 한국 뜨면 되는 거니까. 최악의 경우 나는 뭐 잡힌다 캐도 한국 법이 참말로 친절해 가꼬 두 바퀴 이상 나는 돌지를 않아. 나는 직접 교사가 아니잖아요. 일종의 에이전트, 뭐 아니믄 선수들 섭외, 딱 그 정도가 끝이라고. 근데 사장님은 직접 교사 아인교. 와 이래 내만치 바닥 인생 사는 놈들 흉내를 낼라캅니까?”
“내가 내 돈 주고 물건을 사면서 그 물건을 어디에다 쓸 거라는 거까지 다 설명을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이해가 안 가서. 그렇다 아인교. 뭐 담그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누구라도 진짜 니 죽고 내 죽자 하고 싶은 인간이 있을 순 있어. 그걸 인자 생각에서 안 그치고 실행에 옮기야겠다 싶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우리 같은 놈들이 하는 일이고. 근데 사장님 정도 되면 이래 직접 안 찾아와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 시키가 한 다리 정도는 숨을 자리를 만들 수도 있는 거 아입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조금 이따가 나머지 5억 붙여 드리면 작업은 언제 시작할 수 있는 겁니까?”
자기가 묻는 말은 아예 무시를 하고 본론에만 집착을 하는 상대.
오지만은 그간의 경험으로 더는 묻지 않았다.
“작업이야 착수금 들어오면 24시간 안에 선수를 뽑아서 그림 작업 시작하믄 되는 거니까 암만 늦어도 48시간 안에는 작업 들어가겠다 소리가 나올 겁니다.”
“최대한 빨리했음 싶은데.”
“나온 지 얼마 안 된다 아이요. 이거 방아쇠 이래 빨리 땡길 이유 있는교? 한 며칠 편한 마음으로 만날 사람들도 만나 보고, 좋은 술도 좀 마시고 그래 시작을 하는 게 안 낫겠어요?”
“딴 데 갑니까? 그냥 다른 사람 찾아봐요.”
“아입니다, 아입니다. 어데예. 그라믄 이라입시다, 사장님. 나도 한국에서 정리라는 걸 좀 해야 될 거 아인교. 나는 이래 급한 건 줄 몰랐지. 이래 나오자마자 바로 작업해 달라칼 줄 알았음 나오시기 전에 미리 좀 준비를 해 놓을 걸 그랬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어떻게요?”
“오늘 마저 보내 주겠다고 한 5억. 사장님 준비 다 끝나시면 연락 주세요. 바로 보내 드릴게.”
“아따 성격 급하다.”
“사장님 하시는 거 보니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입으로만 일을 하는 스타일일 거 같아 살짝 걱정이 돼서 그래.”
“하, 하하, 하하하… 터프하시네. 딴에는 사장님 생각해서 해 준 말이구만. 알았습니다. 실제로도 정리할 게 좀 있기도 하고. 금방 정리 끝날 거니까 그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자, 그라믄 작업 대상이 누군지 함 보입시다. 누군데요?”
싸구려 믹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고서 혀 전체를 적셔 놓고 장민규가 말했다.
“손정태 스너프 사장.”
“아따 마, 설마설마했드만, 진짜 거물 작업해 보게 생깄네.”
“얼굴은 알지요? 모르면 인터넷에 그 이름 쳐 보면 많이 나올 거니까 알아서 확인을 해 보시고.”
“어데예. 내 안 그래도 재경 그룹 관련된 사람들 얼굴은 진작에 다 확인을 했다 아입니까. 빵 안에서부터 받은 의뢰인데, 나오자마자 인터넷 싹 다 뒤져가 재경가 사람들 얼굴을 싹 다 알아 놨어요.”
“그럼 이만 일어나 볼게요.”
“사장님.”
“네.”
장민규가 용건을 다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혹시 뭐 밖에 따로 나가 있을 겁니까?”
“뭘요?”
“작업하기 전에 말입니다. 혹시라도 작업시키 놓고, 밖에 나가 계실 거면 내가 좀 도와줄라고. 배편은 우리가 좀 잡고 있는 편이거든. 여권도 새로 하나 만들어 드릴 수 있고. 이마이 큰 건을 맡기 주는데, 그 정도는 내가 돈 안 받고 서비스로 해 줄 수 있어요. 그럴 계획이면 괜히 딴 데 가서 눈탱이 맞지 말고 내한테 말하라고. 내가 그냥 준비해 줄 테니까.”
그에 장민규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놓고 차갑게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아따 마, 남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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