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82화 (282/303)

282화 야, 이 X친 새끼들아!

한 명, 두 명, 뒷자리에 또 한 명. 혹은 한 명 더.

최소 세 명이다.

검은색 스타렉스 승합 차량.

손정훈 상무를 호텔 로비 앞으로 내려 주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정재현 과장.

빈자리 주차 공간을 찾기 위해 지하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정재현 과장의 눈에 실내등이 꺼져 있음에도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검은색 스타렉스 승합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마침 그 차량 뒤쪽으로 빈자리가 있어서 차를 세워 놓고 대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그리고 실내등이 꺼져 있는 차량이고 그 앞을 스치듯 지나가서 정확하게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뒷자리에도 누군가가 더 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재현 과장은 상무님의 차량을 운전하면서 자신이 그간 너무 예민했고,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일을 너무 크게 키워 손정훈 상무뿐 아니라 회사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게 떠올랐다.

모직 인사부 과장의 결혼식 날이 그랬고, 바로 지난주 대현일보에서 따라붙은 파파라치 차량 사건이 그랬다.

자신의 바로 직속인 강인성 차장은 애써 괜찮다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마음을 쓰지 말라는 말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편함을 덜어 주려 애를 썼지만, 정작 별것도 아닌 일들을 크게 키워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부분에 정재현 과장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부경통신 장선길 회장의 차량을 꽤 오래 운전하면서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많이 접했고, 당해도 봤기에 그에 대한 노이로제 같은 게 생겨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 장선길 회장의 차량 운전대를 잡는 동안 정재현 과장은 영화나 드라마는 결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항시 하고 있었다.

추악하다는 표현보다는 무섭고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이 그나마 가까울 정도로 장선길 회장은 정·재계, 법조계를 자기 손에 넣고 마음껏 주무르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거머쥐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다.

“후우….”

생각이 많아진다.

벌써 10분.

내릴 사람들이었음 진작에 내렸어야 한다.

그럼에도 정재현 과장이 차를 세워 놓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은 지 10분이 지났는데, 검은색 스타렉스 승합 차량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정재현 과장의 양쪽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며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지만, 정재현 과장은 더 이상 자신이 가진 예민함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보다 먼저 주차장에 도착을 해 있었던 차량이다.

손정훈 상무의 이동 경로를 먼저 알고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리는 없다.

정작 정재현 과장마저도 퇴근 직전에 JK 드 누락에서 저녁 약속이 잡혔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 JK 드 누락이 강남점인지, 소공동점인지는 출발 직전 손정훈 상무를 통해 다시 확인을 해서야 확실시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예민함과 지금 느끼고 있는 불길함만 가지고 섣불리 퇴근을 한 강인성 차장에게 연락을 넣는다면, 그래서 다시 또 아무 일도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 버린다면 민폐가 될 수밖에 없다.

실없는 사람, 예민한 사람이라는 소리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예민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그래서 받게 될 비난만큼은 솔직히 두려웠던 정재현 과장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재현 과장은 일전의 파파라치 미행 건 이후로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걸 차량 조수석 수납공간에 넣어 놓고 다녔는데, 그걸 꺼내 충전 상태를 확인하고 바지 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었다.

그래, 아닐 거다.

전기 충격기를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바지 주머니 속으로 챙겨 넣으면서도 정재현 과장은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여긴 호텔 지하 주차장이다.

연말이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행사가 있겠나.

어느 행사에 불려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안 맞아 대기를 하고 있다거나, 혹은 일행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을 돌려 보니 조금은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정재현 과장은 장선길 회장의 상습적인 구타와 욕설을 언론에 고발할 결심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극심한 공황 장애를 얻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그걸 재경식품 사람들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그리고 자신의 이력에 지금의 재경식품보다 더 나은 직장은 구할 수가 없었기에.

크게 한 번 공황 발작이 터진 후, 그 후론 주기적으로 왼쪽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전해졌고, 잠자리에 들 때면 괜히 숨이 가빠지는 호흡 곤란 증상이 일어나거나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크게 부풀려 걱정을 하는 등, 자신의 신변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안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 본다.

추운 바깥 날씨.

차라리 차창을 살짝 내리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데, 혹여나 앞에 세워진 스타렉스 차량이 눈치를 챌까 하는 걱정에 창문을 열기보다는 에어컨을 켜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바람을 피부에 닿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1시간이 더 지났을 때부터 정재현 과장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극심한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저 차 안에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사람이 타고 있는 건 확실한데, 지나칠 정도로, 의도적이라고밖에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보통 차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것도 혼자가 아닌 몇 명이서 함께 기다리고 있다면 최소한 실내등 정도는 켜 놓고 기다리지 않나?

일반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아닌 호텔 주차장.

그렇게까지 환한 공간이 아니다.

심지어 스마트폰 불빛조차 감지되지 않고 있다.

그저 고요할 뿐이다.

마치 사냥감이 다가오길 숨어서 기다리는 맹수처럼.

그리고 다시 30분이 더 지나 8시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정재현 과장은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낀 예민함이 맞았기 때문이다.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현관으로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재현 과장의 폰으로 진동음이 전해졌다.

손정훈 상무의 번호가 뜨고 있다.

눈으로는 저 멀리, 엘리베이터 현관 앞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손정훈 상무의 모습을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자리 다 끝났어요. 지금 주차장 엘리베이터 입구 앞인데, 이쪽으로 와 주면 되겠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정재현 과장이 차에 시동을 거려고 할 때였다.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의 후미등에 불이 들어왔다.

시동을 걸었다는 소리.

분명 시동은 먼저 걸었는데,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은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지 주머니 속으로 챙겨 놓은 전기 충격기를 손으로 더듬어 보며 정재현 과장은 차를 몰아 주차장 엘리베이터 현관으로 향했고, 여전히 모든 감각은 시동만 걸어 놓은 채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스타렉스 차량에 집중시켜 놓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손정훈 상무가 탈 뒷자리 문을 열어 놓고 잠시 고개를 스타렉스 차량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본다.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러는 동안 손정태 스너프 사장의 차량이 뒤로 다가와 섰다.

“그럼 아까 정엽이 형이 말한 거처럼, 크리스마스 연휴 끝나고 다들 바쁜 거 정리되면 날 잡고 가까운 근교라도 같이 한번 나가자.”

“뭘 또 그렇게까지 해? 다들 바쁜데, 그냥 데이비드하고 안나 한국으로 들어오면, 다 같이 식사 한번 하는 걸로 하면 되지.”

“이 자식 이거 또 말 바꾸는 거 봐라. 아까는 그러자며?”

“그럼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하냐? 손정엽이가 말이 좀 많냐고. 아까 그 자리에서 싫다고 했음 오늘 자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수나 있었겠어?”

“너는 인마, 손정엽이가 뭐냐, 손정엽이가.”

“어랍쇼?”

“내 앞이라고 일부러 마음에도 없으면서 정엽이 형 까고 그러지마. 그럴 필요 없다, 이제.”

“아무튼 아까 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왜? 바쁜 거 끝내 놓고 하루 정도 시간 내서 다 같이 바람 쐬고 오는 것도 괜찮지. 데이비드, 안나도 앞으로는 환경이 아예 바뀌는 건데 가족들이 그런 자리 만들어 주고 하면 얼마나 고마워할 거야?”

“추우니까 그러지, 날씨가 추우니까. 형수 그 임신한 상태로 바깥바람 너무 많이 쐬고 하면 안 좋아. 암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차 왔네. 타고 들어가.”

손정훈 상무가 손정태 스너프 사장과 인사를 끝날 때까지 정재현 과장은 스타렉스 차량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척을 하며 수차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손정훈 상무가 차에 올랐을 때부터 속으로 갈등을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확인도 안 해 보고?

아무래도 저 스타렉스 차량이 손정훈 상무를 따라붙은 차량인지 아닌지 정도는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정재현 과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백미러를 통해 손정훈 상무의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뭐 얼마 마시지도 않았어요.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생각이 없어서요.”

“뭐야? 그럼 아까부터 저녁도 안 먹고 계속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바로 그때였다.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뒤엔 손정태 스너프 사장을 태운 차량이 따라오고 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의 특성상 어느덧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그사이 스타렉스 차량은 완전히 주차 공간을 벗어나 손정태 사장이 타고 있는 차량 뒤로 붙어 있었다.

“왜 그래 미련하나. 그러지 말라니까. 정 과장이 이러면 내가 어디 마음 편하게 약속을 잡을 수나 있겠어?”

“죄송합니다.”

영혼 없는 대답.

귀로와 입으로는 손 상무와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정재현 과장의 두 눈은 쉬지 않고 백미러로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정재현 과장은 조금씩 차의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주차장 출구를 돌아 핸들을 꺾었을 땐 뒤에 앉은 손정훈 상무가 “뭐 하는 거예요. 출구 여기잖아.”라며 답답한 투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출구로 빠지지 않은 건 정재현 과장의 고의였다.

크게 돌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하중 기둥 두 개 정도만 돌면 스타렉스 차량 뒤로 붙어서 주차장 출구를 빠져나갈 수 있다.

지금 저 차량이 손정훈 상무를 따라붙은 건지, 아님 손정태 스너프 사장을 따라붙은 건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손정태 스너프 사장이 타고 있는 차량을 따라 주차장을 빠져나간다면, 그리고 저 차를 따라가지 않고 함께 하중 기둥을 따라 돈다면 모든 게 명확해지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쿵!

하중 기둥을 돌아 스타렉스 차량 뒤로 붙었을 때였다.

앞서 달리는 손정태 스너프 사장 차량과 속도를 맞춰 달리던 스타렉스 차량이 갑자기 급발진을 시도, 순식간에 지하 주차장 안으로 큰 굉음을 만들어 내며 손정태 사장 차량의 뒤 범퍼를 박아 버리는 거였다.

고의였다.

누가 봐도 고의였다.

하지만 그 고의를 눈치채고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정재현 과장뿐이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시작되기도 전에 손정태 스너프 사장이 타고 있는 차량 운전석에서 기사가 뒷목을 잡으며 내렸고, 그와 동시에 스타렉스 차량에선 건장한 남자 네 명이 동시에 운전석과 조수석, 그리고 뒷문을 통해 우르르 내리고 있었다.

“뭐, 뭐예요? 박은 거야?”

미처 정재현 과장이 내리지 말고 가만히 계시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뒷문을 열고 한쪽 다리를 뺀 손정훈 상무.

그리고 그때부터 정재현 과장의 눈앞에선 도무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보세요! 무슨 운전을… 커헉!”

가장 앞선 차량의 운전기사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스타렉스 차량 운전대를 잡았던 남자 앞으로 다가가 섰을 때였다.

마주 보고 선 스타렉스 차량 운전자의 한쪽 어깨 위로 턱을 받친 채 미동도 없는 남자.

곧바로 다른 거구들은 손정태 사장이 타고 있는 차량의 문을 열려고 몇 차례 시도를 하다 들고 있던 흉기와 팔꿈치를 동시에 이용해 차창을 깨뜨리려 시도했다.

정재현 과장의 시간은 슬로 모션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장면이 환상인 듯, 꿈을 꾸고 있는 듯 어지럽기까지 했다.

지하 주차장을 울리게 만들었던 굉음이 터지고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이 정재현 과장에겐 1분, 2분, 10분에 걸쳐 장황하게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스스로 뒷좌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손정훈 상무가 “야, 이 미친 새끼들아!”라는 고함과 함께 맨손으로 앞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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