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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83화 (283/303)

283화 애비 없이 컸던 건 정엽이 하나로 족하다

상황을 이해할 틈이라는 게 없었다.

주차장 출구를 바로 앞에 두고 정 과장이 평소엔 잘 하지도 않던 운전 실수를 했다.

기분 좋게 취한 상태에서 내려와 내가 정태, 정엽이와 시간을 가지는 동안 저녁도 안 챙겨 먹고 계속 대기만 하고 있었다는 말에 살짝 짜증이 올라와 있던 중이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여기에서 더 뭐라고 하면 잔소리가 될 거 같아 불편한 마음을 애써 삼키고 있는데, 갑자기 쾅! 하고 사고가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재현이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거였다.

운전석 목받이 부분에 얼굴이 부딪칠 정도로 앉은 상태에서 몸이 급하게 앞으로 쏠렸다.

분명 쾅! 하는 소리가 먼저 났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정 과장이 사고를 낸 건가 하고 앞을 쳐다봤는데, 앞 차와의 거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정태가 타고 있는 차에 사고가 난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 봤더니 정태를 의전하는 기사 친구가 목덜미를 잡으며 내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동시에 사고를 낸 승합 차량에서 건장한 남자 넷이, 그것도 동시에 차에 달린 모든 문을 열어 재끼며 일제히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냥 내린 게 아니라, 튀어나왔다.

“……!”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걷던 걸음을 멈춰 세울 정도로 놈들이 가진 기운엔 살기가 가득했는데, 난 이게 사고에 대한 수습을 자기들 쪽으로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살기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정태를 의전하고 있는 친구에게 멈추라고, 얼른 뒤로 가라고 말을 하려는데 한발 늦었다.

승합차 운전석에서 내린 녀석이 아주 능숙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시퍼런 뭔가를 꺼내고는 끌어안듯 기사 친구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평소엔 쉽게 맡기도 힘든 지독한 메탄올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기분.

얼른 경찰에 신고하라고 정 과장에게 말을 했지만, 이 친구는 내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털썩! 하고 기사 친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친구의 흰 셔츠 아랫배 쪽은 이미 검붉은 피가 번져 있었고, 입술만 달달 떨어 댈 뿐 아무런 소리도 못 내는 상태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피가 곧 바닥에 고일 것 같았다.

이건 작정을 한 것이다.

단순 접촉 사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낸 접촉 사고가 분명했다.

건장한 놈들이 흉기로 정태가 타고 있는 차 뒷문 창을 사정없이 가격하기 시작했다.

내리지 마, 기다려! 문 꼭 잠근 채 기다려!

난 속으로 정태에게 소리치며 얼른 그곳으로 뛰어갔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있는 힘껏 뛰어가, 달리던 속도만 믿고 놈들 중 한 명을 끌어안았다.

한 놈을 정태가 타고 있는 차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데 성공을 한 뒤, 얼른 소리쳤다.

“정 과장! 야, 정 과장!”

“…네, 네!”

“야, 이 씨! 정 과장! 뭐 하고 있어! 얼른 경찰에 신고해!”

“네!”

나와 함께 뒹굴었던 녀석이 씩씩거리며 일어섰고, 다른 한 놈도 합세해 시퍼런 흉기를 위협하듯 흔들어 대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오로지 녀석들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깨진 차창 사이로 쉬지 않고 흉기를 찔러 넣고 있는 어느 한 놈.

그리고 그 위협을 피하기 위해 차 안에서 발버둥 치며 저항을 하는 정태.

반대쪽 차창까지 깨지며, 그 안으로 손을 넣은 어느 한 놈이 차 문을 여는 데 성공을 했다.

결국 난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하는 놈을 향해 다시 한번 몸을 던졌다.

가까스로 녀석을 차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데는 성공을 했다.

하지만….

“뭐이가? 죽고 싶네?”

마치 죽은 사마귀에 꼬이는 개미 떼처럼, 그 한 놈을 제외한 나머지 세 놈이 정태가 타고 있는 차 안으로 엉겨 붙기 시작했고, 결국 정태는 녀석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꺼내졌다.

녀석들이 잡고 있는 흉기를 막아 낼 마땅한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난 다시 운전석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서 녀석들로부터 정태를 지켜 내기 위해 몸을 던졌다.

놈들이 휘저은 흉기질에 여기저기 피해를 보긴 한 거 같은데, 다행히도 아직 치명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정태는 죽자 살자 온몸을 흔들어 대며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놈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온몸이 굳은 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정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야, 정 과장! 야, 이 새끼야아아아!”

“…….”

“정신 차리라고! 경찰에 신고했어?”

정 과장을 혼내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1분.

아니, 1초가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평소보다는 술을 아꼈고, 그래서 정태가 맨정신인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저렇게 날뛰는 상대를 어떻게 제압하는지를 잘 아는 놈들이 분명했다.

당황하지 않고 동시에 한 발씩, 그것도 상대의 저항을 공포로 제압하려는 듯 정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놈들에게 난 안중에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정 과장이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고 있다는 거였다.

내린 차 앞에 서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정 과장이 조금씩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한 손엔 이상한 무전기 같은 걸 들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아. 미쳤어? 지금 사람을 찔렀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기 직원을 쳐다보며, 하지만 눈앞의 상대들 때문에 그 직원을 챙기지도 못한 채 정태는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피 묻은 칼날을 혓바닥으로 스윽 핥아 놓고 한 놈이 정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때 난 망설일 틈도 없이,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뭐이네, 이 썅것! 진짜 아까부터 드릅게 귀찮게 구네. 죽이 주간? 니부터 죽이 주?”

몸싸움이라는 걸 내가 해 봤어야 말이지.

전쟁 통에 한국으로 내려오며, 살기 위해, 먹기 위해 매질을 받으며 이 악물고 버텨 본 경험은 많지만 누군가를 때리고, 제압을 하고… 나는 그런 몸싸움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내 손주, 정태는 반드시 지켜 내야 한다는 생각.

애 아빠다.

그리고 또 곧 둘째까지 태어난다.

한 집안의 가장.

내 새끼들….

애비 없이 컸던 건 정엽이 하나로 족하다.

그걸 승현이, 원수경이 배 속에 든 아이까지 하게 만들 순 없다.

그냥 그 생각뿐이었던 거 같다.

날 던져서라도 내 손주 정태만은 지켜 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놈이 들고 위협을 하고 있던 흉기 따윈 두렵지가 않았다.

“야아아아아!”

두 눈을 질끈 감고 정태를 에워싸고 있는 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잡힌 뒷덜미로 인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선 상태로 몸이 빙그르르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서걱,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서걱….

“정훈아아아아!”

입고 있는 옷을 찢고 맨살을 가르며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박힌 날카로운 뭔가의 움직임은 서걱… 하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마치 적당히 녹은 냉동육을 칼로 자를 때 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고통은 안 느껴졌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이 꿇혀지자, 뒤늦게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는데 외마디 비명도 입 안으로 모여지지가 않았다.

딱 가슴 정도에서 소리가 막혀 더는 위로 뚫고 못 올라가는 기분.

“정훈아, 정훈아. 야, 야 인마!”

머리맡에서 정태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

“썅것이 바빠 죽겠는데, 날파리처럼 계속 앵앵대네? 뭐이가. 다들 뭐 하네? 야가 아이라. 서둘러라.”

“네!”

얼른 도망가라고, 가만히 있지 말고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 보라고 정태에게 소리치고 싶었는데… 잠이 왔다.

이렇게 지독한 수마는 처음이다.

그리고 항문에 힘이 풀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설사가 샐 것 같은 느낌.

흉기가 들어왔다 나온 부분에서 전해지는 고통은 오히려 지금 느끼는 한기에 비해선 참을 만했다.

한기와 수마.

그리고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되는 항문….

“하아아아. 하아아아….”

피 맛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뛰고 달려서 느껴지는 피 맛의 착각 같은 게 아니라, 진짜 피 맛이 느껴졌다.

꿀렁하고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부 장기들이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식도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입 밖으로 쏟아지는 기분.

달짝한 맛이, 진짜 피를 토한 모양이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눈이 감기기 바로 전이었는데, 지지지직! 하는 생소한 전기 마찰음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 또 어느 누군가의 억척같은 욕지거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추위와 수마, 그리고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 * *

“마음이 쓰여서요. 걱정도 됐고.”

어느 날 뜬금없이 재경식품 전략기획실이라면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었다.

재경의 차남이 자신을 직접 만나 보고 싶어 한다면서.

그 자리에 나가는 거 자체도 어떻게 보면 정재현의 입장에선 큰 용기를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나간 그 자리에서 손정훈이라는 젊은 남자는 자신이 처한 처지에 진심으로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게 손정훈에 대한 정재현의 첫인상이었다.

부경통신에서 받았던 대우보다 더 높은 대우를 약속하며 입사 지원서를 내미는 손정훈에게 정재현은 이렇게 물었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전 이미 제가 가지고 있었던 장선길 회장의 모든 치부를 다 검찰 쪽으로 전달을 한 상태인데요?”

더는 장선길 회장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자신에게 손정훈은 “마음이 쓰여서요. 걱정도 됐고.”라며 말을 마친 뒤 아랫입술까지 깨물어 가며 한숨을 참았다.

부경통신 안에서 당신 만들어 왔던 목표와 해 왔던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린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안타깝고, 또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정재현이 느끼고 있었던 본인과 가족에 대한 부경통신 쪽의 물리적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알고 있다고 했다.

자기 옆에 있어 보지 않겠냐고 했다.

자기가 보호막이 되어 주겠다면서.

“저는 그 상대가 누구라도 우리 재경을 위협하는 존재는 절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제게 재경은 우리 재경의 직원들입니다. 급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을 해 보시고 결정하면 됩니다.”

당시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남겼던 손정훈의 마지막 말이 마치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정재현의 기억 속에서 재생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그동안 재경식품에서 손정훈이 자신을 배려해 줬던 모든 일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 하고, 주눅이 들어 있던 자신에게 가족들 다 같이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배려를 해 주고, 그 여행 동안 몸에 묶여 있는 긴장감을 다 털어 내라고 했던 일.

아침 의전길에 준비한 커피를 보며 내일부터는 당신 커피도 함께 준비를 하라며 기분 좋게 웃어 보이던 모습.

지나친 예민함으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의기소침해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정 과장 덕에 내가 안심하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며 그 예민함을 도리어 칭찬으로 바꿔 주었던 섬세함까지….

정재현에게 손정훈 상무는 비록 자신보다 나이는 어릴지언정, 무의식적으로 의지를 하고 싶은 어른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진정으로 자신의 가족을 걱정하고 챙겨 줬던 손정훈 상무.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괴한들로 하여금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분노심이 정재현 과장의 얼어붙어 있던 몸을 녹여 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손정훈 상무와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손정태 스너프 사장.

정재현 과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꺼내 들었다.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손정훈 상무.

정재현 과장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손정태 사장을 함께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지지직!

“아악!”

정재현 과장은 자신을 등지고 서 있던 괴한 한 명의 목에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대고 버튼을 눌렀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진 괴한.

그가 들고 있던 흉기를 얼른 빼앗아 들고 정재현 과장은 다른 괴한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뛰어들었다.

“우워어어아아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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