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자수를 하려고요
어느덧 밤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삼성동에 위치해 있는 아란테 리제빌.
주인 없는 호사 별장 시설을 홀로 즐기고 있던 장민규의 폰으로 오지만의 전화가 걸려 온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문제가 쪼메 생긴 거 같습니다.
“무슨 문제요?”
중국엔 잘 도착을 했냐, 지금 어디냐… 하는 식의 인사 따위는 필요가 없는 통화였다.
이미 발신 번호 없이 걸려 온 국제 전화만으로도 장민규는 오지만이 현재 중국에 도착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도 장민규는 한쪽 눈썹이 잠시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작업 중에 엄한 새끼들이 끼어들어가지고 실패를 했답니다.
“그래서 못 죽였어요?”
―…네.
“먹튀한 거네?”
―무슨 말은 또 그렇게 합니까?
“먹튀 맞잖아요. 내 입장에선 문제가 조금만 생긴 게 아닌데? 아예 호구 짓을 한 건데? 돈은 돈대로 다 받아가 놓고, 해 주겠다고 한 일을 제대로 못 했단 말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돈 벌기 참 쉽네. 미안하다 한마디로 미리 받아 간 10억을 퉁치겠다 그런 소리로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죠?”
10억.
지금의 장민규에겐 그저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상황이 크게 일그라진 거 같아요. 우리도 어지간하면 AS를 해 주지. 이 바닥도 신용이 중요하거든. 근데 지금 작업하러 들어간 아들 중에 벌써 두 놈이나 현장에서 붙잡혔어요.
“하하하, 크크크큭….”
―와 웃는교?
오지만의 음성에도 차가운 살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돈만 맞춰 주면 작업 못 할 대상이 없을 거 처럼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네?”
손정태를 죽이지 못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아쉬움이 생긴다.
하지만 장민규에게 손정태는 같이 침몰시키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지, 오로지 손정태만을 침몰시키는 게 진짜 목적은 아니었다.
그리고 손정태가 죽었든, 아직 살아 있든 장민규의 복수는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럼 지금 두 명은 잡혔고, 나머지 사람들은요?”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 확실한데, 일단 조금 더 지켜봐야지요. 손정태 말고, 그 동생 있다 아입니까.
“정훈이요?”
―예. 어찌어찌하다가 작업이 그쪽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순간 장민규는 작업이 그쪽으로 들어갔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졌다.
―작업 중에 갑자기 어디에서 툭 하고 튀어나와서 방해를 했다카네요.
“그래서요?”
―죽자 살자 덤벼들어서 어짤 수 없이 칼침 한 방 줏다카네요. 근데 어디서 또 이상한 놈이 전기 충격기를 들고 설치는 바람에 아 둘은 거기에서 뻗고, 나머지는 잠깐 대치를 하다가 호텔 직원들이 다 튀어나와서 손정태는 작업을 못 하고 그냥 튀었답니다.
“그래서 정훈이는요?”
―한 방이지만, 깊게 먹였다카니까 힘들 깁니다.
사자를 잡아 오라고 시켰는데, 사자 사냥엔 실패를 하고 호랑이를 잡아 왔다?
이건 또 이 나름대로 나쁘지 않는 상황이다.
애초에 장민규에게 반드시 손정태를 죽여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손정태와 손정훈을 양쪽에 놓고 누구를 작업하게 만들지를 고민해 보기도 했었고.
장민규가 손정태를 선택했던 건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부경통신의 노블레스를 직접 빼앗아 갔던 상대가 손정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스너프와 함께 재경통신의 사장을 겸직하며 재경 그룹의 후계로 정훈이보다는 한 발 정도 더 가까워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정태가 아니라 손정훈이 작업을 당했다?
장민규의 입장에선 아쉬운대로 크게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큰아버지네, 장선동 회장과 장민석의 부경화학을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리기엔 충분할 테니까.
“한국 정리하고 중국까지 넘어가셨는데, 어쩝니까?”
―에이, 씨… 어짤 수 있습니까?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안 합니까.
“조금만 신경 써서 했으면 성공 커미션도 받고, 좋았잖아요."
―지금 뭐 누구 놀리요?
장민규는 웃었다.
“앞에 있었음 한 대 맞았겠다. 하긴, 정도의 차이지 돈 앞에서 신사가 어디에 있어요.”
―…….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 오 사장님이 느끼고 있는 감정, 내가 먼저 다 느껴 봤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잖아, 안 그래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고. 크크큭. 근데 인생 포기했다고 죽고 싶다 말한 적은 없어요. 오 사장님 하는 일, 성격을 내가 잘 아는데 내가 왜 굳이 오 사장님을 도발하겠어요? 아까 낮에 보내 준 계좌 있잖아요.”
―무슨 계좌요?
“한국에 환치기하는 친구들이 있다면서, 성공 커미션은 그 계좌로 보내 달라면서요?”
―……?
“깔끔하게 성공을 시킨 건 아니니까 한 번에 10억을 다 보내는 건 좀 그렇고, 2억부터 보내 놓을게요.”
―그게 무슨 말인데요?
“이번 일을 오 사장님한테 의뢰한 건 나지만, 사주는 부경화학의 장민석 부사장이 한 거예요.”
―그기… 뭔 소린교?
“그냥 그렇게 가자고.”
―설마 내 지금 사장님이 깔아 놓은 쥐약을 먹은 거예요?
“오 사장님은 직접 교사가 아니라서 잡혀 본들 길어 봤자 두 바퀴라며? 20억. 1년에 10억씩.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디 가서 이런 알바를 구해요? 어차피 오 사장님은 내가 사주를 했든 장민석이가 사주를 했든 달라질 입장이 없잖아. 안 그래요? 내가 지금 바로 전화 끊고 낮에 보내 준 계좌로 2억 보내 놓을게. 그리고 나머지 8억은 아직 안 잡힌 사람들 입에서 장민석이 이름이 나오게끔 만들어요. 그럼 그때 마저 넣어 줄 테니까.”
―이거 지금… 제대로 작업을 했어도, 성공 커미션은 장민석이를 물고 가야 받을 수 있는 거였어요?
“부탁 정도는 할려고 했어요. 뭐 사실 오 사장님이 안 도와줘도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아니고. 어차피 내가 지금 오 사장님한테 주는 돈도 다 장민석이한테서 나온 돈이거든.”
* * *
그 시각 부경화학 장민석 부사장 쪽으로는 초비상사태가 걸렸다.
서울시립병원 쪽으로 재경가와 재경 그룹 전사단이 모두 집결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JK 드 누락 소공동 점에서 정태와 정훈이가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재경 그룹 전략기획실에서 모든 언론을 통제하고 있기에 아직 그렇다 할 뉴스 기사가 나온 건 아니었지만, 현재 부경화학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재경 그룹이 외부 접촉을 일제히 차단시켜 놓고 비상사태에 돌입했기에 그 소식은 장민석 쪽으로 바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조금 전 아버지인 장선동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미 장선동 회장은 정태와 정훈이를 습격한 괴한들의 정체를 장민규와 연관 짓고 계셨다.
장민규가 출소를 하고 일주일 만에 터진 일이다.
누구라도 정태와 정훈이를 습격한 괴한의 정체를 장민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에 장선동 회장은 혹여나 이번 사태로 부경화학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단속을 시켰는데, 그 전화를 받으며 장민석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바로 지난주 장민규가 요구하는 돈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본능은 자신이 이미 장민규의 덫에 걸렸음을 직감하면서도 장민석은 애써 정태와 정훈이를 습격한 괴한의 정체가 장민규와는 연관이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겠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도망갈 구멍 정도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
장민석은 요동치는 심장을 한참 동안 진정시켜 놓은 뒤, 거실을 초조하게 걸어 다니며 장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신호음 끝에 장민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침착한 음성.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장민석은 잠시였지만 안도를 했다.
그럼에도 장민석은 통화 중 녹음 버튼을 잊지 않고 눌렀다.
“뭐 하냐?”
장민석은 장난기를 섞어, 평소 사촌 동생을 대하던 자신의 방법을 떠올리며 통화를 시작했다.
―그냥 있어. 술 한잔하면서.
“혼자?”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같이 있겠어? 인생 X망한 인간한테 누구 하나 같이 술 한잔 마셔 주겠다고 할 사람이 있겠어?
평소와 다르지 않다.
그에 장민석이 시달리고 있었던 불안감이 잠시였지만 눈 녹듯 녹는 기분이었다.
“외국 나갈 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야?”
―끝났어. 내일 아침 비행기로 나갈 거야.
“내일 아침?”
―내가 하루라도 빨리 한국 땅을 떠나 줘야 그때부터 형도 두 다리 쭉 뻗고 살수 있는 거잖아.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어?”
―옆에 누구 있어?
“옆에? 아니? 왜?”
―말을 꽤나 조심해서 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꼭 누가 옆에 있는 거처럼. 아님 지금 이 통화를 녹음 중인 거처럼.
“……!”
―아 참, 형. 방금 오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정태 새끼 작업하는 건 실패를 했다네?
순간 장민석은 뒤통수가 땡땡하게 조여 오는 기분을 느꼈다.
―미안해. 실수 없이 처리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서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면서 믿고 있었는데, 역시 삼류는 뭘 해도 삼류야.
“무슨 소리야?”
―중간에 정훈이 새끼가 겁도 없이 끼어들었나 봐. 몸까지 던져서 막은 모양이야. 대신 정훈이를 담갔다는데, 어떻게 해? 한국 뜨기 전에 다시 사람 써서 정태 새끼마저 작업하라고 할까? 아직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 있으니까, 그 정도 의뢰는 할 여유가 있어.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옆에 누구 있지?
“뭐?”
―설마 지금 이거 나 꼬리 자르는 거?
“야, 인마, 민규야!”
―이 새끼도 역시나 X나 양아치네? 설마 지금 나한테 다 덤탱이 씌우고 꼬리 자르겠다고 전화한 거야?
“마!”
―제발 좀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왜 이렇게 인간이 안 변하냐? 혹시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 그래서 나 빵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계속 면회 와서 물밑 작업 했던 거야?
“너, 너….”
―하긴, 나야 이미 조진 인생, 형이라도 살아야지. 근데 이건 좀 아픈데? 뒤통수가 너무 얼얼해. 뭐, 좋아. 어쨌든 난 형한테 받을 돈 다 받았고, 그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일단 형이 보내 준 돈에서 10억은 오 사장한테 작업 선수금으로 줬어.
“너 진짜 뭐 하냐, 지금?”
―그게 그쪽 룰이래. 선수금 50퍼센트. 정태 새끼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정훈이 새끼는 담갔다고 하니까, 형이 보내 준 돈 다시 돌려 달라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너 지금 어디야?”
―여기? 삼성동.
“삼성동 어디!”
―네가 만든 아방궁.
“네가 왜 거기에 있어!”
―이 새끼 진짜 X나 양아치네? 네가 쓰라고 했잖아, 한국 뜨기 전까지는 여기가 제일 안전할 거라면서. 너 지금 이거 판 새로 짜는 거지? 설마 지금 이거 녹음 중이야?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이거 지금 녹음 중이야. 너 또 나중에 가서 딴소리할 거 같았거든. 역시는 역시야.
* * *
―너 거기 꼼짝 말고, 밖에도 나가지 말고 그대로 있어.
장민규는 다급해하는 장민석의 음성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직접 오든, 아님 다른 사람을 보내든 아무리 빨라 봤자, 이 나라 경찰들보다 빨리 도착할까.
장민석과의 통화를 끝낸 장민규는 마시고 있던 위스키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고, 다시 한 잔을 가득 채웠다.
담배 한 개비.
다시 시간이 멈춰 있는 그곳 세상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하지만 그곳이 이곳보다는 더 편할 거라는 확신.
차라리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곳이 없는 희망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 이곳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확신으로 장민규는 다시 한번 단번에 술잔을 비워 버렸다.
그리고 112로 전화를 걸었다.
“자수를 하려고요.”
―여보세요? 어디십니까?
“오늘 저녁에 JK 드 누락 소공동점에서 흉기 난동이 있었을 겁니다.”
―누구십니까? 천천히 말씀을 해 보세요.
“천천히 말하고 있잖아요. 저 장민규입니다. 전 부경통신의 장민규. 오늘 JK 드 누락 소공동점에서 있었던 흉기 난동. 제가 의뢰한 겁니다. 해 놓고 보니까 겁이 나서… 자수를 하려고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지금 계시는 곳이 어디십니까?”
“삼성동에 있는 아란테 리제빌 801호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