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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86화 (286/303)

286화 이거 맞아?

다시 또 이곳이다.

손중길로 생을 마감한 후 눈을 감고 처음 경험해 봤던 공간.

공간이라는 개념이 맞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차원.

방향도 시간도, 이것이 실체인지도 알 수 없는 요상한 세상.

오로지 밝음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나는 시간의 개념도 망각한 채 이것이 순간인지, 아님 영원인지조차 모를 상황에 놓여 버렸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건 과연 내가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불안함뿐이다.

모든 걸 놓게 됐다.

살아 있는 순간 해 왔던 모든 근심과 걱정, 그리고 각오 따위는 이 공간 속에선 거대한 자연 앞에 놓인 한낱 미천한 감정일 뿐이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누구?

하늘인가?

하늘이의 목소리인가?

“입술까지 맞췄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늘이다.

하늘이의 목소리가 맞는다.

그런데….

이거 일전에 하늘이가 내게 했던 말이잖아?

“직원들을 생각하는 건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조동희 전무?

“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고.”

시간이 뒤로 가고 있는 건가?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거기에 조 전무의 음성이 조금 더 또렷할 뿐이고.

“앞으로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될 겁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결국 그렇게 되면 기업은 성장을 추구하지만, 직원들은 분배에 더 많은 욕심과 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돈이라는 건 사람의 그릇만큼 담기는 겁니다.”

이번엔 내 목소리.

아니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몸을 빌려, 빼앗아 쓰고 있던 정훈이의 목소리다.

정훈이의 목소리가 이랬던가?

이질적이네….

“너는 이 새끼야.”

정태다.

화가 단단히 난 정태의 목소리.

“여기에 할아버지 술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아. 이깟 술 한 병 가지고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이 새끼야. 이걸 하늘이하고 둘이 와서 분위기를 내겠다고 뜯는 것도 아니고, 누굴 부를 거였음 그게 나여야 맞는 거냐, 아님 손정엽이어야 맞는 거냐?”

왜 이러지?

왜 시간이 계속 뒤로 흐르는 거지?

이건 분명 정엽이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아직 정엽이와 정태의 관계가 불편할 때 나눴던 대화인데?

“이러니까 내가 그간 해 왔던 의심에 확신이 생기는 거야. 너 누구냐? 너 누구냐고. 누군데 내 동생인 척하냐? 너 정훈이 아니잖아.”

마치 거대한 강풍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있는 기분이다.

그 강풍에 형체 없는 내 몸, 내 영혼, 내 정신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있는 기분!

“지금은 이래도 전에 다니던 회사는 큰 회사였어. 이젠 정엽이라는 이름이 어색해. 그래, 앞으로는 서로 자주 연락 자주 하자.”

정엽이다.

이건 파리에서 다 큰 정엽이를 처음 봤을 때 나눴던 이야기 같은데?

“언제부터였어?”

홍준이다.

“언제부터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기고 있었냐고.”

언제 나눴던 대화였지?

분명 익숙한 대화인데…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모든 대화는 내가 경험을 한 대화인데….

“애비 앞에서까지 그런 감쪽같은 연기를 해 왔을 정도라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실은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이 시간에 전화를 건 거다. 뭐가 널 욕심 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욕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내가 든든해지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아!

장민규의 결혼식 날 내가 장민수의 옷에 와인을 쏟고 난 후 있었던 대화였구나.

그래, 이런 대화가 있었지.

“내가 따로 네 형한테도 전화를 걸어서 말을 했는데, 오늘 일은 참 잘했다. 아주 오랜만에 너희 형제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날 아주 많이 생각해 보게 만든 대화였지.

홍준이 놈이 사업은 키우지 못했지만, 자식들만큼은 사랑으로 잘 키우고 있다는 걸 느꼈던 순간이었다.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내 하나뿐인 사위, 남 사장.

“날 우습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고작 입사 6개월 차밖에 안 되는 너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야? 명색이 네가 회장님 아들인데, 그 체면을 내가 깎이게 만들어서야 되겠어?”

남 사장이 내게 저렇게 날을 세우던 때가 있었지.

“아까 과장님 댁에서 받은 돈입니다.”

정현수 과장?

“과장님 댁에서 돈을 받을 때도, 제가 잠시 미쳤던 거 같습니다. 천만 원이라는 돈에 제가 제 양심과 자존심을 너무 쉽게 팔아 버린 거 같습니다. 오늘처럼 과장님께서 제게 뭘 물어보시거나,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시면 최선을 다해 알려 드리고 또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건 이 돈과는 상관없이 제가 인사부 소속이기 때문이고, 과장님은 저의 부서 상사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회사 직원들의 개인적인 사정, 비밀, 가족 관계 및 금전적인 문제에 관한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는 건 바로 인사부의 책임이고 또 인사부의 역할입니다. 저는 그 책임과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과장님도 회장님 아드님이신 걸 떠나 이젠 재경모직의 직원이시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마구잡이로 들려오던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한 게….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정훈이의 몸에서 보내온 시간들이었기에.

알 수 없는 흐름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공간의 개념이 없는 이곳에 흐름이 생긴다?

익숙하다.

정훈이의 몸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이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럼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끝인 건가?

이젠 정말 끝이 맞는 것인가?

충분하다.

어질러 놓은 것들을 주워 담지 못한 것도, 이 공간 안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항상 오늘이 마지막 순간인 듯, 그렇게 손주의 몸을 빌려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봤으니까.

손중길로 눈을 감기 전 그렇게나 간절했던 태화장의 육개장도 질리도록 다시 먹어 봤고, 항상 궁금했던 미래 속에서 살아도 봤으니.

더 이상 미련 같은 건 두지 않아야겠다.

나는 그저 손중길의 삶에 약간의 보너스를 받았을 뿐이고, 이젠 남은 녀석들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걸 다 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아쉽다는 생각.

조금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미련이 또 다른 내 속에서 꿈틀거리려고 하는 걸 간신히 죽이고 있을 때였는데, 저 멀리에서 점 같은 물체가 나타났다.

점.

맞다.

저 점이 이 미지의 영역에서 마지막 관문이었다.

저 점을 기점으로 이 미지의 영역에 방향이라는 것과 시간이라는 게 생겼었지.

어?

어?

이거 맞아?

다시 또 이렇게 되어도 괜찮은 거야?

처음 이 경험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한번 그 방향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잠시 조용해졌던 사방에서 태산이, 홍준이, 장혜란이, 정태, 원수경이… 사람들의 음성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달리 내 기억 속엔 없는 대화들.

점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그때도 이랬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내가 저 점과 가까워지고, 저 점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영역의 문처럼 보이기 시작한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을 때 난 다시 한번 정훈이의 몸에서 눈을 떴었다.

“뭐?”

“다 들어 놓고 사람 쪽팔리게 뭘 다시 묻냐?”

“이제 연예인 생활 그만하고, 오빠랑 같이 살자고.”

여전히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느 한 눈동자가 보였고, 그 눈동자 속에 든 나의 모습, 정훈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서린.

나는 지금 채서린의 눈동자를 보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아니다.

이건 내가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정훈이가 보고 있는 거다.

정훈이의 기억인가?

“그냥 하는 말 아냐. 언제든 지금 하고 있는 연예인 생활이 힘들고 더는 할 자신이 없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너 데리고 살아 줄게.”

내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채서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그간 막혀 있던 갑갑한 벽이 한 번에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정훈이의 모든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 이거 진심이야.”

“정말 그럴까? 이참에 더는 퇴물 소리 그만 듣고 은퇴나 해 버릴까?”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소리 몰라? 지금 은퇴하면 넌 레전드가 되는 거야. 그런데 여기에서 더 끌면 지금껏 힘들게 쌓아 온 이미지만 갉아먹는 거고.”

“은퇴 정도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내일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거지만, 내가 오빠를 어떻게 믿고?”

“왜 날 못 믿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정작 오빠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푸하! 뭐래?”

“그 잘난 오빠 집안에서 날 잘도 받아 주겠다.”

“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우리 집에선 나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어. 그런 내가 때 안 놓치고 장가를 가겠다는데, 그것도 천하의 채서린이랑 결혼을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그런가?”

“당연하지. 아마 너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우리 집안 사람들이 너 찾아가서 절을 할걸? 우리 집안 골칫거리 데리고 간다는 게 사실이냐면서,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면서 말이야.”

“푸히히히.”

“내가 잘할게. 그니까 우리 이제 이렇게 호텔에서 숨어서 만나는 거 그만하고, 정식으로 한번 만나 보자.”

“일단 킵. 오빠가 한 제안, 바로 버리긴 좀 아깝고 일단 지금 하고 있는 작품까지만 해 보고 진지하게 고민을 좀 해 볼게.”

“진짜야? 진짜지?”

“그나마 오빠가 제일 만만해. 만약 하고 있는 생활 정리하고 다른 삶을 산다면, 내 옆에 오빠가 있음 좋긴 하겠어.”

정훈이는… 채서린에게 진심이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채서린 역시 삐딱한 성격 탓에 정훈이 앞에서 뾰족하게는 굴어도 정훈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고 있었다는 걸.

정훈이 역시 그걸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난 이 짧은 대화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이건 단지 지금 내게 정훈이의 기억들이 덮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정훈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이, 내가 몰랐던, 직접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던 정훈이의 지난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고 있는 거였다.

그 감정과 함께, 그 감정을 느꼈던 당시의 기억들이 모두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원수경.

이건 내가 지금 정훈이의 지난 기억들을 읽어 내고 있는 건가?

감정까지 전달받으면서?

원수경을 떠올리는 순간 눈앞으로 원수경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기죽지 마, 도련님. 아버님 저러시는 거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에요? 다 도련님을 걱정하고, 사랑하시니까 저러시는 거야.”

“…….”

“근데 이번엔 내가 봐도 좀 심했다. 왜 근무 시간에 거길 갔어요?”

“나도 알아. 그니까 나도 아까 아무 말도 못 했던 거 아니겠냐고.”

“근데 진짜 그 시간에 거긴 왜 간 거예요?”

“…….”

“도련님 혹시 지금 만나는 여자 있어요?”

“여자는 무슨.”

“여자가 없는데 그 시간에 호텔방에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아, 그냥 좀 넘어가자, 쫌… 쪽팔리게 형수까지 이럴 거야?”

“형이 요즘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많아요. 내가 도련님한테 싫은 소릴 하겠다는 건 아니고, 도련님이 하는 모든 걸 다 응원은 하는데, 그래도 요즘처럼 회사 어렵고 할 때는 도련님도 알아서 좀… 왜 그런 거 있잖아.”

“안다고, 안다고. 오케이. 딱 거기까지. 그래서 형은 뭐래요?”

“나한테 물어보라고 하지. 그나마 도련님이 나한테는 이거저거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털어놓으니까. 형이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라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라고 하는 거예요. 요즘 도련님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는지.”

“…….”

“어머님이 중매 자리 알아보고 계신 것도 도련님이 입에 거품까지 물어 가며 못 하게 만들었잖아. 그러니까 형 입장에선 혹시나 도련님이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는데,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저러는 건가 싶은 거지.”

“후우….”

“왜? 누군데? 보니까 분명히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다음에. 다음에 내가… 좀 확신이 생기면 말해 줄 테니까, 당분간은 형수도 형한테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 좀 해 줘요.”

“콜! 대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기다?”

“콜.”

역시 원수경과는 가까웠다.

그리고 가까워진 모든 상황, 이유, 계기들이 마치 내가 직접 경험을 했던 것처럼 주마등처럼 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 기억 속에 낙인이 찍히듯 새겨져 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 이러는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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