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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88화 (288/303)

288화 정말 대단하시다고

오빠 장선동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장혜란은 단말기 버튼을 눌러 무음 처리를 해 놓고 일부러 받지 않았다.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장민규가 자수를 하고, 장민석이 연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였다.

그 자백이 사실이든 아니든 장혜란은 지금 이 순간부터 오빠 장선동뿐 아니라 친정 쪽 사람들과는 아예 담을 쌓을 생각이었다.

끝이다.

정말 끝.

어쩌면 그 관계는 장혜란이 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부터 끊어진 상태였는지 모른다.

하긴, 애초에 그런 관계가 중요하기나 했나.

하지만 장혜란은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힐 재간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내 아들이 지금 저렇게 험한 꼴을 당해서 깨어나지도 못한 채 누워만 있는데, 어떻게 남편 앞에서 여전히 내 체면, 내 입장을 걱정할 수가 있는 거지?

그것도 엄마라는 사람이.

순간 장혜란은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다시 또 걸려 오는 오빠의 전화.

손홍준 회장이 눈치로 누구냐는 듯 물었고, 그에 장혜란은 어쩔 수 없이 중환자실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으려고 할 때였다.

복도 의자에 반쯤 넋을 잃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하늘이가 장혜란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발견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장혜란은 그런 하늘이에게 그저 앉아 있으라는 듯 손짓만 하고 전화를 받으며 중환자실 복도를 벗어났다.

정말 짧은 찰나였지만,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하늘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장혜란은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 아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단 말인가.

애들이 원해서 시작된 결혼 이야기도 아니었고, 아이들은 그저 두 집안의 관계를 위해 자신의 인생 방향을 맞췄을 뿐일 텐데.

자신도 그런 결혼을 선택했으면서, 도대체 자신은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그 결혼을 반대했단 말인가.

부경.

친정 형제들과의 관계 때문 아니었나.

남보다 못한, 아니 짐승보다 못한 친정 형제들 때문에.

그제야 장혜란은 깨달았다.

부경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모든 걸 다 가진 존재로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은 재경과 부경이라는 빈껍데기 이름에만 집착을 한 세련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는 걸.

저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괜찮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재경과 부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이 아닌, 내 삶에 대한 집중을 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 짧은 사이 너무 많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쩌면 이미 진작에 다 알고 있는 후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보세요.”

―혜란아.

오히려 침착해졌다.

오빠, 장선동의 목소리를 들으면 주체하지 못할 화가 올라올 거라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차분하게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느껴진다.

지금 이 양반이 느끼고 있을 공포, 걱정, 그리고 두려움….

―지금 손 서방은 어쩌고 있어?

“…….”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시립병원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거기 맞지?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손 서방한테 그렇게 말 좀 전해라.

“오빠.”

―그래, 그래.

“참 대단해요.”

―뭐가?

“오빠 말이우. 이럴 때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실수를 크게 하셨어. 화학, 통신을 쪼개서 나눠 줄 게 아니라 둘 다 오빠한테 물려주고 지키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대단하시다고. 그런데 참 그 대단도, 어찌 내 눈엔 이제 간당간당해 보여요. 애들은 괜찮냐, 그걸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유?”

―…….

“어떻게 이 상황에서 손 서방이 어쩌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

―나도 지금 정신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사람 참 안 변해. 어쩜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는 거 하나 없이 그대로유?”

―…….

“와서 뭐 하실라고? 왜? 손 서방 직접 만나서 민석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거 말해 줄라 그러우? 참 너무한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해. 그냥 차라리 가만히 계시지. 그랬음 내가 이렇게까지 징그럽단 생각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유.”

―아니다, 혜란아.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어?

“이 상황에서 내가 오빠한테 할 말인가 싶긴 해도, 어지간히 해요, 어지간히. 그쪽 사정 난처한 거 알겠고, 민석이가 이런 일 벌일 정도로 겁 없는 애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애들 아빠도 다 알아. 그런데 오빠, 그런 거 다 떠나서 내가 이 나이 먹어 살아 보니까 말이유. 어떨 땐 내 집에 직접적으로 불을 지른 놈보다 내 집 타는 거 뒷짐 지고 구경만 하다가 그 불똥이 자기 집 쪽으로 튈 거 같으니 그제야 끼어들어 부랴부랴 같이 불 끄겠다고 드는 놈이 더 밉습디다.”

―…….

“내 이제 더는 오빠, 언니, 그리고 선열이하고는 연락을 안 하려고. 이건 뭐 남보다 못한 거 아니유?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우?”

―그래, 내가 눈치 없이 가만히 있어 줘야 할 때도 모르고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너한테 연락을 넣었던 모양이다. 정훈이 정신 들고, 너도 좀 진정되고 하면 전화 한 통 해라.

“거참 끝까지 말하는 사람 말 안 듣고 자기 할 말만 하지. 그래, 이즉 그런 거조차 안 변하는 거 보니 오빠는 참 오래 살겠수. 특별하게 태어나 특별하다 생각하며 살아가다 평범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죽는 게 사람이라는데, 오빠는 여즉 특별하기만 하려 드네. 그것도 이제는 여동생한테 묻어서. 내 남편 말 안 듣고 고집부린 내가 미친년이다, 내가 미친년이야.”

―…….

“이러니 평생을 수발해 놓고도 별거나 당하고 앉아 있지. 내 무덤 내가 판 거야, 누굴 탓해? 오빠. 우리 이제 남 합시다, 남. 더는 얼굴 볼 일, 목소리 들을 일 없었음 해요. 이번 일 관련해선 손 서방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손 서방이 무슨 결정을 내리더라도 오빠네에 담겨 있는 내 지분, 모두 손 서방한테 쓰라고 줄 거유. 그렇게 알고 전화 끊어요.”

통화를 끝내고 중환자실 복도로 들어선 장혜란의 눈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리에 없었던 정엽이의 모습이 보였다.

복도 의자에 하늘이와 나란히 앉아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숙모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장혜란을 발견한 정엽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고, 하늘이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통화할 일이 잠시 있어서. 요 앞에. 받으러 간다던 건 받아 왔어?”

“네, 금방 조 전무님한테 호텔 지하 주차장 CCTV 영상 전달해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둘은 그만 들어가지. 우리가 이 병원 전세를 낸 것도 아니고, 우리 사람들이 너무 많다. 둘 다 내일 출근해야 될 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저는 지금 다시 호텔로 들어가 보려고요.”

“그래, 벌써 뉴스 타고 세상 시끄럽게 생겼는데 얼른 들어가서 수습할 거 있음 수습을 해야지. 안에 작은아버지한테 인사는 드리고 그렇게 들어가.”

“네.”

정엽이가 중환자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장혜란은 하늘이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바로 조금 전 정엽이가 앉아 있던 자리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한숨을 토해 내듯, 힘 빠진 모습으로 자리에 앉는 장혜란의 모습에 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히 그 옆자리에 앉았다.

장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이 역시 장혜란의 눈치만 살필 뿐, 그 어떤 말도 먼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중환자실로 들어갔던 정엽이가 다시 나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엘리베이터 복도로 사라질 때까지도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닫혀 있는 중환자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아까 수술실 앞에서 의사가 하는 말 들었잖아.”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장혜란이 입을 열었다.

“언제 깨어날지 의사도 모르겠다는데, 벌써부터 힘 뺄 필요 있겠어? 하늘이 너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오늘은 이쯤 하고 들어가서 쉬어. 보니까 퇴근하고 바로 온 거 같은데.”

출근.

하늘이는 순간 자신이 비정상인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까부터 계속 출근에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시는 걸까?

그게 지금 중요한 부분인가?

그러다 길게 한숨을 빼어 낸 장혜란이 어느새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불어 넣고서 또 한 번 코로만 숨을 길게 내 쉬는 걸 보고는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 없는 남 걱정으로라도 지금 이 상황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보려 하시는 거구나….

“상황 봐서 그렇게 하든지 할게요. 그보다 많이 놀라셨죠?”

“이제 좀 살이 떨리네.”

“괜찮을 거예요.”

“그래야지.”

하늘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듣던 대로 정말 일반적인 분은 아니시구나… 하고.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의 엄마를 떠올려 본다.

만약 하늘이 본인이나, 아님 태양이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엄마는 진작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을 거다.

“혹시 내가 안에 있어서 못 들어오고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그럼 저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해?”

중환자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을 눈짓하며 묻는 그 말에 하늘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오빠 힘들게 누워 있는 거 보면 화가 날 거 같아서요.”

“……?”

“회장님, 사모님도 이렇게 참고 계시는데, 제가 화를 낼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괜히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거 봐 버리면 오빠를 저렇게 만든 사람… 후우….”

그 순간 장혜란의 한 손이 하늘이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간 두 사람의 결혼 문제에 불편한 존재를 자처했던 걸 후회하는 마음으로, 사과하는 마음으로 장혜란이 용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의 허벅지 위로 올린 손을 지렛대 삼아 장혜란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집안 어르신들 걱정하시겠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잠시라도 눈 붙였다가 일어나서 출근해.”

“…….”

“괜찮을 거다. 깨어날 거야. 정훈이 깨어나면 내가 바로 전화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 계세요.”

모두를 악몽 속으로 빠뜨렸던 잔인한 밤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병실 밖으로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아들의 곁을 지켰던 장혜란.

그녀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손홍준 회장이 병실을 나설 채비 중이었다.

“벌써 가시게요?”

“집에 들러서 좀 씻고, 그렇게 가야지. 점심 전에 급한 것들만 확인해 주고 퇴근할 거니까, 그때까지 당신이 옆에서 잘 좀 지켜보고 있어.”

정태 내외는 전날 밤늦게 집으로 보냈다.

원수경의 친정어머니가 승현이를 대신 봐주고 계시기는 해도 원수경은 임신을 한 상태.

이런 큰일이 있는 바로 직후인데, 원수경만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장혜란은 손홍준 회장을 병실 앞까지 배웅을 해 줬는데, 중환자실 복도엔 그룹 본사 경호팀 직원들 말고는 그 앞을 지나다니는 병원 간호사들뿐이었다.

“하늘이는 갔어요?”

남편을 배웅한 뒤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기 전,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 직원에게 물었다.

“네, 2시쯤 잠시 어딜 가는 거처럼 보였는데 그 뒤로 안 돌아오시네요.”

* * *

원수경이 다시 병원을 찾은 건 오전 8시 경이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새벽부터 시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본가로 향했던 남편.

차마 그런 남편에게 며칠 정도는 상처 부위를 관리하면서 쉬는 게 맞지 않느냐는 소리도 못 했던 원수경이었다.

친정어머니에게 승현이 어린이집 등원을 맡겨 놓고 부랴부랴 시어머니, 장혜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앞엔 하늘이가 여전히 복도 의자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자신을 맞이하는 시어머니 곁으로 집에서 싸 온 죽통을 내려놓으며 원수경이 말했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죽 좀 쒀 왔어요.”

“풀지 말고 그냥 거기 놔둬. 나중에 생각 있음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지금 저 보는 데서 한 숟갈만 뜨세요.”

죽통을 싼 보자기를 풀며 원수경이 물었다.

“그런데 하늘 씨는 밤새 계속 저기 저렇게 있었던 거예요?”

“하늘이? 하늘이가 벌써 왔어?”

“벌써…요? 아, 그럼 집에 갔다가 온 거예요?”

그제야 원수경은 하늘이가 전날 입고 있던 옷이랑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을 정도로 한가했던 어제가 아니었다.

장혜란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중환자실을 밖으로 나왔고, 며느리의 말처럼 언제 자리를 비웠나 싶을 만큼 입고 있는 옷만 살짝 달라져 있을 뿐 전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복도 앞 의자에 앉아 있는 하늘이를 발견했다.

원수경도 함께 따라 나왔다.

“너 집에 갔던 거 아냐?”

“아뇨, 요 앞 호텔에 방 잡아 놓고 오는 길이에요. 집에서 며칠 정도 지낼 옷가지를 가져다줘서 대충 샤워하고 좀 쉬다가 왔어요.”

“뭘 그렇게까지 해? 회사 출근은? 출근은 해야지.”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회사는 저 없어도 잘 돌아가니까, 당분간은 병원에 있으면서 정훈이 오빠 잘 살피라고….”

“아침은? 아침은 먹고 이러고 있는 거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어떻게. 수경아.”

“네, 어머니.”

“얘 안 되겠다. 네가 좀 밖에 데리고 나가서 아침밥 먹이고 같이 들어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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