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우리가 더 미친개라는 걸 인지시켜
재경 그룹 중역 회의실.
손정태 스너프 사장을 제외한 전 계열 사장들이 모두 참석을 한 긴급회의였다.
전날 JK 드 누락 소공동점에서 사건이 벌어진 직후, 그룹 전사 차원으로 비상이 걸려 있던 터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임에도 중역 회의실 안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손홍준 회장의 푸석한 낯빛, 이글거리는 조동희 그룹 전무의 눈빛.
이 무거운 회의실 공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룹 본사 임원, 전 계열 사장들은 손홍준 회장의 지시로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CCTV 영상에 집중했다.
사고 현장이 그대로 담긴 영상이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보기 힘든 잔인한 장면들.
비위가 약한 어느 누군가는 이를 꽉 깨물며 울렁거리는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자리에 모인 임원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 진짜 정체는 보기 힘든 CCTV 영상이 아닌, 그 영상을 자신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손 회장의 얼굴 표정이었다.
감히 어느 누가 지금 이 자리에서 손홍준 회장이 보이고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아들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의식 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짧은 지난 몇 년 사이 국내 재계 순위 20위권에서만 맴돌던 재경이 단숨에 5위권으로 뛰어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주역이다.
그의 거짓말 같은 활약으로 후계자 경쟁이라는 건 없을 줄 알았던 재경에 후계 구도가 만들어졌고, 아직은 어느 누구 하나 섣부르게 입에 담지는 못하고 있지만 회장님의 마음이 그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큰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라도, 자식의 사고 앞에 상심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의 손홍준 회장에게선 그런 인간적인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
자리에 모인 임원들은 저마다 침을 삼키거나, 입술을 꼭 다무는 식으로 회장님이 보여 주고 있는 의지에 가담하게 시작했다.
스타렉스 범죄 차량이 손정태 사장의 차 뒷부분에 고의로 사고를 내고 잔인한 흉기 난동을 벌인 뒤 전기 충격기에 당하지 않은 일당 두 명이 도주하기까지의 시간은 채 2분이 넘지 않았다.
실제 흉기 난동이 벌어진 건 30초 내외.
하지만 그 짧은 영상을 두 눈으로 끝까지 다 확인해야만 했던 그룹 임원들은 벌써부터 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다들 이거 보고 나니까 무슨 생각이 드나?”
차가운 회의실 공기를 억지로 갈라내는 듯한 음성으로 손홍준 회장이 그룹 임원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몇몇은 이 와중에 저렇게까지 침착을 유지하는 회장님이 무섭기까지 했다.
“먹고살기 힘들다.”
손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룹 임원들을 주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회장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돈 벌어서 기업 운영하기 참 힘들어. 이젠 정말 목숨까지 내놓고 사업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와중에도 자식 놈들 봉변당한 영상을 준비해서 자네들하고 다 같이 모여 앉아 그거 보면서 대책을 만들어 내야 하니 말이야.”
“…….”
“편승일이.”
“네, 회장님.”
“식품에서 손 상무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손 상무 없이도 일정대로 진행 가능하지?”
지금 이 자리에서 편 사장이 내놓아야 하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막에 꽃을 틔울 수 있겠냐고 물어도 당연히 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아야 하고, 대답에 그칠 게 아니라 실제로도 꽃을 틔워 내야만 한다.
“네, 가능합니다.”
“차질 없게 만들어. 당분간 또 시끄러워질 거다. 우리 잘못이 있든 없든, 우리가 피해자든 아니든 그런 거 상관없이 이번 일로 우리 재경은 다시 또 시끄러운 소란의 중심에 서게 됐어. 노규형이.”
“네, 회장님!”
“언론 쪽 펜대에 목줄 단단히 걸어. 이미 나온 기사들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기 전에 괜한 추측성 기사들 쏟아 내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든, 광고 몇 개 잡아 주고 입을 막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검찰에서 먼저 무슨 말 나오기 전에는 펜대 못 갈기게 만들어.”
“네, 알겠습니다.”
“조 전무.”
“네, 회장님.”
“그것만 가지고 언론 놈들 입막음을 완벽하게 할 수 있겠어? 이 회의 끝나는 대로 이상한 추측성 기사 생산 안 되도록 우리 쪽에서 먼저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하지 않겠냐고.”
“서둘러야 하는 부분입니다.”
“부경화학에서도 공식 입장을 밝히겠지만, 장민석이 관련된 내용은 가급적 넣지 말고,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직 사실 확인이 된 내용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정리를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계열 사장들.”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친개한테 물린 건 운이 나빠서가 아니야.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물린 거지.”
“…….”
“미친개한테 물렸을 땐 약도 없어. 그래서 어쩔 거야? 그쪽으로는 가지도 말까? 눈도 돌리지 마? 몸만 사릴래? 미친개 한 마리 때문에 우리 재경의 움직임에 제약이 걸리는 건 내가 용납 못 한다. 다들 각자 몽둥이를 들고 다녀. 그리고 보이는 즉시, 우리 쪽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즉시 때려잡아. 앞으로 미친 X새끼들한테는 우리가 더 미친개라는 걸 인지시켜. 그래서 우리 쪽으로는 감히 고개도 못 돌리도록 만들어 버려. 뒷감당은 회사가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
“네.”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크게 상했어. 손 사장, 손 상무가 상한 건 나 혼자 속상하고 말면 될 일이지만, 손 사장 차를 운전해 왔던 우리 직원까지 크게 상했다. 이건 회사의 책임이고, 회사는 그 책임을 회사 기준이 아니라, 피해 직원의 기준에서 보상을 해 줘야 한다.”
“…….”
“어떤 경우든 피해 직원의 기준에서 합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명심하라고.”
대답이 없는 사장단을 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손 회장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네!”
“이번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쳐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람 목숨이 두 개, 세 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부장 이상 임원급엔 앞으로 차량 운전뿐 아니라 경호 업무까지 가능한 인력으로 직책 상관없이 다 한 명씩 붙여. 현재 임원급 차량 운행하는 기사들도 다들 경호 업무 가능한 인력으로 교체, 재배치시키고. 그리고 앞으로 본사, 현장 막론하고 보안 관련, 안전 관련 인력 충원시켜. 그에 드는 추가 비용은 그룹 본사에서 지원을 해 줄 테니까, 더는 우리 직원들 일하다가 상했다는 소리 내 귀에 안 들리게 해라.”
“네!”
“이번 일로 회사 분위기 어수선해질 게 분명한데, 이번 일에 관련해 직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관리들 잘해라. 원래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라는 건 밖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거다. 사실 확인이 되기 전까지, 다들 그 부분 유의해서 각별히 신경들 써.”
“네!”
* * *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여길 올 게 아니라, 요 옆에 재첩국집 있던데, 거기로 갈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난 아침 먹고 왔다니까? 그리고 하늘 씨 생각이 짧은 게 아니라, 정신이 없는 거죠. 이 와중에 뭘 그런 걸 따져요?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병원 근처에 있는 커피 전문점이었다.
하늘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은 꼭 챙겨 먹는 사람이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삼대가 함께 사는 집이다 보니, 입맛이 없다고 아침 식사를 마음대로 거른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럼에도 지난밤 빈속에 커피를 몇 잔이나 마신 탓에 마치 모래가 낀 것처럼 입 안은 텁텁했고, 정신이 몽롱해 식욕이 좀처럼 돌아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샌 거나 다름이 없었다.
병원 앞 호텔을 잡아 놓고 물을 채운 욕조 안에서 잠시, 정말 잠시 30분 정도 깜빡 눈을 감았다 뜬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거뜬하다.
미래기획 시절, 하루 이틀 정도 날을 새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정도 정신력쯤은 하늘이에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억지로라도 뭘 좀 먹으라는 원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겠다고 했는데, 막상 계산대 앞에서 자신의 몫으로는 생수만 한 통 주문을 하는 원수경을 보고서야, 지금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크루아상 한 입.
커피는 모르겠지만, 크루아상은 더는 입에 안 들어갈 거 같았다.
억지로 한 입을 베어 먹고 더는 크루아상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커피 잔만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하늘이에게 원수경이 물었다.
“괜찮아요?”
“제가 괜찮냐고 물어봐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원수경을 보고 임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나 할 수 있을까.
아직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은 상태.
그래서 더 조심해야 되는 시기라는 것쯤은 임신의 경험이 없는 하늘이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조심을 해야 하는 시기에 이런 큰일을 당했으니, 어제 하루 원수경이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렸을지 불 보듯 뻔했다.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는 말에, 원수경은 힘들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버님이 정말 섬세한 분이시더라고요.”
“정엽이 오빠요?”
“네. 당시 현장에 같이 계시지는 않으셨겠지만, 어쨌거나 현장을 직접 보고 도련님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셨다 들었어요. 누구보다도 정신이 없으셨을 텐데, 그 와중에도 직접 저한테 전화를 거셔서, 제가 크게 안 놀라도록 상황을 설명해 주시더라고요.”
“그런 거 참 잘하는 사람이에요. 큰일을 별거 아닌 거처럼, 사람 안심시키는 걸 참 잘해요, 그 오빠가.”
“같이 술 한잔하고 집에 가는 길에 승현이 아빠 팔이 조금 찢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병원인데, 꿰매는 중이라 아주버님이 대신 전화하는 거라고. 병원에 와서도 조금 찢어진 거 꿰매는 건데 무슨 수술을 이렇게 오래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아버님이 병원에 먼저 와 계신다는 것도 나중에 어머님 전화 받고 알았어요. 그때까지도 도련님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안 해 주시다가 그제야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예요. 아마 집에 승현이랑만 같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전화로 받았다면, 어후, 진짜 아찔했을 거 같아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힘든 미소를 짓고 있는 하늘이의 모습에 원수경은 자신의 떨어지는 공감 능력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이게 정혼자가 의식 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인가 싶었던 거다.
자기 형을 지키겠다고, 내 남편 안 다치게 만들겠다고 하다가 저렇게 누워 있는 사람인데….
세상에 이런 양심에 털 달린 인간이 정말 나란 사람의 본질이란 말인가.
원수경은 징그러울 정도로 이기적인 자신의 본심에 소름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늘이 앞에서 내 가정은 지켜져 다행이란 본심을 그렇게 속도 없이 내보일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야, 돌지 않고서야….
하지만 하늘이는 미안해하는 원수경을 향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정엽이 오빠가 겉으로는 허허실실해도, 진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네, 그러신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말만 자주 보자고 해 놓고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죠?”
“그러니까요.”
“진짜 말만 자주 보자고 했네, 말만.”
“…….”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 모르시죠?”
하늘이는 다시 한번 원수경의 배를 눈짓하며 힘든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원수경은 그때 알았다.
이게 나와 장하늘의 차이라는 걸.
나이로도 커버가 되지 않는 기질.
타고난 기질 자체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사람이었다.
“아직은요.”
“딸이면 승혜, 승애, 승미. 아들이면 승호, 승후, 승민, 승주. 그렇게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나봐요.”
“…누가요?”
“정훈이 오빠가요.”
순간 원수경은 자신의 가슴 한쪽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놓여지는 기분이었다.
“그걸 벌써부터 한자로 뜻까지 붙여 가며 자기 멋대로 지어 놓고 있는 거예요.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벌써부터 그중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도련님이요?”
“진짜 안 어울리게 자기가 취미로 집에서 붓글씨를 쓴다는 거예요. 근데 직접 봤더니 정말 수준급으로 잘 써요. 한자로 승현이 동생 이름을 몇 개나 써 놨더라고요. 오빠 말로는 승현이 이름도 회장님이 작명소에서 받아 온 몇 개 중에 정훈이 오빠가 골랐다고 하던데요?”
“그런 집안 전통 같은 게 있나 보더라고요.”
“네. 참 안 그럴 거처럼 생겨 가지고 은근히 사람 챙기는 걸 잘해요. 저한테도 항상 영감처럼 잔소리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거 같아 보여도 막상 하는 거 보면 제가 해 달라는 건 안 해 줄 거처럼 하면서도 어떻게든 다 해 주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 나도 같이 좀 챙겨 줘야겠다, 나는 은근히 말고 대놓고 챙겨 줘야겠다… 그러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깨어나겠죠?”
자신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큰사람이라고 생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정훈이에게 무척 진심이었다는 걸 느끼게 된 원수경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썸도 못 타게, 남 혼삿길 다 막아 놓고 양심 없이 막 안 깨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설마. 와… 세상에 이런 뒤통수가 진짜 어디에 있어요?”
하늘이의 두 눈에 물기가 고이려 할 때였다.
원수경의 폰으로 시어머니, 장혜란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하늘이와 함께 병원을 나온 지 30분 정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
들어오는 길에 뭘 사 가지고 오라는 전화인가 싶어,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네, 어머니.”
―지금 하늘이하고 같이 있지?
“네, 같이 있죠. 왜 그러세요? 목소리가….”
―데리고 얼른 들어와. 정훈이 얘 지금 정신 차리는 거 같다.
“네? 정말이요?”
―아, 그래. 하늘이 데리고 얼른 들어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