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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90화 (290/303)

290화 제 말 들리시죠?

하늘이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떨어진 줄만 알았던 심장은 이내 터질 듯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분명 통화를 시작할 때 원수경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다.

통화 시작과 동시에 크게 놀란 원수경의 표정.

하늘이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속으로만 바라며, 원수경이 통화를 끝내기만을 기다렸다.

“도련님… 정신이 드는 모양이에요.”

그 말이 원수경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이의 몸은 머리보다 먼저 빠르게 반응을 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하늘이.

“천천히 오세요. 제가 먼저 가 볼게요.”

원수경은 하늘이를 잡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요, 같이. 나올 때처럼 저랑 같이 차 타고. 병원 앞에 기자들 쫙 깔렸잖아요.”

“아니요. 그냥 저 먼저 갈게요.”

뛰는 게 훨씬 빠르다.

앉은 창가 쪽 자리에서 병원 건물이 바로 보이는데, 하늘이는 굳이 원수경과 함께 상가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서 차를 타고, 다시 또 병원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야 하는 시간까지 참을 자신이 없었다.

뛰었다.

커피 전문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하늘이는 학창 시절 마지막으로 해 봤던 50미터 달리기 전력 질주를 하듯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막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바뀐 횡단보도.

횡단보도로 가는 길목에 지하철역이 보인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하늘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뛰어 내려가 숨도 쉬지 않고 대로를 건넜다.

병원 이용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군데군데 자기네들끼리 모여 있는 기자들.

그들이 병원 건물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오는 장하늘 미래금융 상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잡혀 줄 생각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기에.

“장하늘 아니야?”

“맞네. 미래금융 장하늘 상무네.”

“찍어, 찍어.”

붙잡아도 상관없다.

뿌리치면 되니까.

앞을 가로막아도 상관없다.

옆으로 밀쳐 내면 그만이니까.

그게 누구든 지금부터 정훈이 오빠에게 향하는 자신을 방해한다거나, 그 앞을 막아 세운다면 가차 없이 내동댕이를 쳐 버릴 것이다.

하늘이는 기자들이 자신이 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건 말건 오로지 정훈이 오빠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선 하늘이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모여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비상계단을 찾았다.

그리고 한 번에 두 계단, 세 계단씩 힘차게 뛰어올랐다.

숨이 가프거나, 힘이 든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울 뿐.

그렇게 중환자실이 있는 4층에 도착을 했을 때였다.

의료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좋은 징조이겠지?

중환자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마저 의료진들이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활짝 개방해 놓은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하늘이를 발견한 경호원 한 명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 주며 하늘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뇌의학과 진재범 교수한테 콜 넣어. 환자 깨어난 거 같다고, 지금 바로 와서 확인해 달라고.”

“네.”

정신이 들었다며!

정훈이 오빠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그런 정훈이 오빠의 머리맡에 서 있는 남자 의사.

그 의사는 가슴 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펜 모양의 라이트를 꺼내 정훈이 오빠의 양쪽 동공을 확인했고, 곧바로 꿈틀거리는 오빠의 손가락을 수차례 건드려 보았다.

“환자분. 제 말 들리시죠? 들리시면 아까처럼 손가락 한 번만 더 움직여 볼게요. 금방 했잖아요. 한 번만 더 까딱해 봅시다. 할 수 있어요.”

의사의 지시대로 정훈이의 오른쪽 검지가 꿈틀거리는 걸 본 하늘이는 그제야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두려움과 설움이 동시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잘하셨어요. 이번엔 반대쪽 손 한번 움직여 볼게요. 가능하겠어요? 자, 한번 움직여 봅시다.”

역시 이번에도 움직였다!

오른쪽 검지보다는 그 반응 속도가 느렸지만, 또렷하지는 못했지만 까딱하고 움직였다.

분명 움직였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 * *

과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곳에서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알지 못하는 정훈이의 지난 삶들을 직접 경험했다.

녀석의 유학 생활을 직접 다 경험했고, 내 손으로 직접 지웠던 연락처 속 이름들의 얼굴까지 하나하나 다 만나 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시절, 아직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기대를 받아 오던 중학교 시절, 영재 소리를 듣던 초등학교 시절….

심지어 정훈이가 살아오며 겪었던 상황들 앞에서 녀석이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어째서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모든 감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손중길의 오래된 기억들보다 손정훈이의 감정과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와 나의 기억으로 새겨지고 있다 느껴질 정도였다.

정훈이가 얼마나 정태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의지하고 따랐는지.

그런 형과 자신의 사이에서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 준 원수경을 얼마나 좋아했고, 고마워했는지를.

자신의 얼굴만 보면 한숨을 쉬고 모든 게 다 못마땅하단 표정을 짓는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들어 있고, 그 주눅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실수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져 쌓였으며, 결국 그 실수들이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상황 앞에 얼마나 무거운 답답함을 느껴 왔는지까지.

비록 의지는 되지만 거의 대부분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형과 이상하게 만나기만 하면 불편했던 아버지.

그 두 존재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자존감을 지켜 준 건 장혜란이었다는 것까지.

“이걸 진짜 정훈이가 만들었어.”

“응!”

“‘응’ 아니고 ‘네’ 해야지.”

“싫은데? 난 그냥 엄마한테는 계속 ‘응’ 할 건데?”

“정훈이 초등학생이지?”

“응.”

“그럼 엄마한테도 ‘네’라고 해야 해.”

“왜?”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

“싫은데? 난 엄마랑 있을 땐 계속 아기 할 건데?”

“그러고 싶어?”

“응. 엄마도 계속 우리 엄마 할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엄마한테는 계속 아기 하고 싶은데?”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아기. 엄마랑 둘이 있을 땐 계속 아기 해. 엄마도 그러고 싶어. 근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땐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으니까 더는 아기 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땐 ‘응’이 아니라 ‘네’라고 대답을 해야 해. 그리고 줘, 해 줘 그러면 안 되고 해 주세요. 그렇게 존댓말 쓰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엄마랑 둘이 있을 땐 안 그래도 되지?”

“응. 엄마랑 둘만 같이 있을 땐 상관없어.”

“형은? 엄마랑 나, 그리고 형이랑 같이 있을 땐?”

“음… 형이랑 같이 있을 때도 상관없어.”

“그럼 아빠는? 아빠랑 같이 있을 땐?”

“아빠한테는 ‘네’라고 하지.”

“응. 그때 혼났어. 버릇없다고.”

“그거 봐. 그럼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있을 땐 어떻게 해야겠어?”

“‘네’라고 해야 돼.”

“에구에구, 우리 아들 똑똑한 거 봐. 누구 닮아서 이렇게 똑똑해? 우리 정훈이 누구 아들이야?”

“엄마 아들.”

“아빠는?”

“엄마, 나 유딩 아니거든? 나 이제 초등학생이야. 요즘은 그런 질문 유딩들도 안 받아.”

“푸히히. 뭐? 푸히히히.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맨날 그래, 맨날. 누굴 진짜 애로 아나….”

“정훈이 오늘 간식으로 우리 뭐 먹을까?”

“햄버거.”

“안 돼. 아빠가 햄버거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건 다 안 된대. 컴퓨터도 하루 한 시간 이상 하지 말라고 하고, 햄버거, 피자도 못 먹게 하고.”

“다 정훈이를 사랑하니까 그러시는 거야.”

“사랑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같이 좋아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어머, 얘 말하는 거 좀 봐. 너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웠어?”

“그런 걸 뭐 배워야 아나? 당연히 아는 거지. 원래 그런 거 아냐?”

“맞아.”

“엄마도 햄버거 싫어해?”

“아니? 엄마는 정훈이를 너무 사랑하니까, 정훈이가 좋아하는 건 엄마도 다 좋아해.”

“역시. 그런 의미로 간식은 햄버거로!”

“의미래. 얘 말하는 거 좀 봐. 푸히히히. 알았어, 햄버거! 대신 아빠한테는 오늘 햄버거 먹은 거 비밀이다?”

“당근이지!”

엄마라는 존재.

그 존재를 생각하는 정훈이의 감정이 그대로 내게 날아와 문신처럼 새겨지는 순간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괴로웠다.

내가 그 존재를 대했던 모든 모습, 상황이 그려지자 변해 버린 아들의 모습에 상처 받고 외로웠을 장혜란의 입장이 내게 죄책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문제는 장혜란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사업이, 재경이 전부일 수가 없는 것인데 오로지 삶의 모든 가치를 그것에만 맞춰 살아왔던 나였기에, 그런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삶이 너무 많이 부서지고 변해 버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이지만 않았다면.

손중길의 인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정태를 그런 위험 속으로 빠뜨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파국의 원인은… 손중길의 인생을 놓지 못했던 내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눈앞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으로 바뀌었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다음 이어질 상황을 상황을 두려움에 떨며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살고 싶다.

다시 살고 싶다.

손중길이가 아닌, 손중훈이가 아닌 그저 나란 존재로 살아 보고 싶다.

숨쉬기조차 힘든 무거운 책임감을 등에 업고 살았던 손중길이의 삶.

모든 게 제약이고, 한계이기만 했던,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생길 수 없었던 손정훈의 삶이 아닌 그저 나로 살아 보고 싶어졌다.

내가 누구인지도 이젠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의 진짜 진심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뭐지? 누가 내게 말을 거는 거지?

“환자분. 제 말 들리시면 손가락 한번 움직여 보세요.”

손가락?

어디에 어떻게 힘을 줘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지, 아니 내 손가락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알 것 같았다.

그 손가락의 위치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을.

기회였다.

다시 살아 볼 수 있는 기회.

“환자분. 손가락 움직이는 게 힘드실 거 같으면, 아까처럼 눈 한번 감았다 다시 떠 보시겠어요?”

눈?

분명 난 칠흑을 보고 있는데, 이 칠흑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이 칠흑를 과연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느끼고 있는, 지금 이 정신이 담겨져 있는 공간이 칠흑일 뿐이다.

모든 정신을 집중시켜 본다.

눈.

눈을 떠야 된다.

그리고!

번쩍!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수경도 끼지 않고 눈을 뜬 기분.

눈에 잡히는 형체는 여러 개가 되고, 그 형체가 가진 대략의 색감도 인지가 되지만 모든 게 흐릿하게만 보이고 있었다.

“잘하셨어요. 자, 이번에 다시 손가락 한번 움직여 볼게요. 여기 제 손 느껴지세요? 느껴지시면 눈 한번 다시 깜빡거려 볼게요.”

느껴진다.

사람의 촉감.

난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기분.

마음 같아서는 느껴진다고, 당신이 하는 말도 다 들린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걸로 당신의 말소리가 다 들린다는 걸 전달할 순 있었다.

“손가락 한번 움직여 볼게요.”

집중, 집중.

손가락의 위치는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잡아 준 느낌으로 인지를 했다.

“뇌의학과 진재범 교수한테 콜 넣어. 환자 깨어난 거 같다고, 지금 바로 와서 확인해 달라고.”

사물의 형체가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난 지금 어디에서 누구로 다시 눈을 뜬 것일까?

여기가 병원인 건 알겠는데… 내가 누구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환자분. 제 말 들리시죠? 들리시면 아까처럼 손가락 한 번만 더 움직여 볼게요. 금방 했잖아요. 한 번만 더 까딱해 봅시다. 할 수 있어요.”

된다.

뭔가에 방해를 받는 느낌이긴 해도, 처음보다는 수월하게 손가락의 위치가 느껴졌고, 그곳으로 힘을 보낼 수가 있었다.

“잘하셨어요. 이번엔 반대쪽 손 한번 움직여 볼게요. 가능하시겠어요? 자, 한번 움직여 봅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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