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돌아가시죠, 그만
인면수심.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짐승도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는 상대.
조동희 전무는 일방적으로 그룹 본사를 방문한 부경화학의 장선동 회장을 보며, 인면수심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분명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려, 촌각을 다투는 사업이 아니라면 미리 잡아 놓은 외부 미팅까지 당분간은 보류를 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으셨다.
하물며 이유야 어쨌든, 진실이 어쨌든 지금의 재경은 부경화학과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상황.
전화로 방문의 의사를 전달받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그런데도 찾아왔다.
“오랜만이요, 조 전무.”
입장이 난처하고, 처한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정중하게 방문을 거절까지 했는데, 이렇게 찾아온 건 다급함이라고 이해를 해 줘야 하는 것일까, 아님 그간의 습관이라고 오해를 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다급함이겠지.
처세에 능한 장선동이가 지금의 재경을 상대로 그간의 습관을 유지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럼에도 조 전무는 상대가 보이고 있는 인면수심 앞에 화가 올라오고 있었다.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상당히 오랜만에 뵙는 거 같습니다.”
“분위기 대충 아는데,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차근차근 순리대로 일을 풀어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직접 찾아왔어요.”
“그러셨습니까? 안으로 들어가시죠.”
“손 서방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혹시 오시면서 통화 안 해 보셨습니까?”
“전화를 안 받네.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일부러 안 받는 것도 같고. 손 서방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게 지금 올라오는 성질대로 할 내용은 아니잖아. 안 그래요?”
“글쎄요.”
“조 전무까지 왜 그래요.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릴 민규가 하고 있는 거잖아. 손 서방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왜 미친놈이 멋대로 지껄이는 소리에 조 전무까지 반응을 해 주고 그래? 조 전무답지 않게.”
“…….”
“손 서방 진짜 자리에 없어요? 있잖아. 잠깐 좀 보자고 해요.”
“회장님.”
장선동 회장을 쳐다보는 조 전무의 눈빛이 바뀌었다.
“네.”
“예의를 좀 지켜 주십시오.”
“뭐가? 무슨 예의?”
“제가 자리에 계신 저희 회장님을 자리에 안 계시다고 회장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조 전무.”
“저희 회장님께서 회장님을 피할 이유가 있습니까?”
“왜, 왜 그래? 왜 이렇게 정색을 해?”
“지금부터 조심은 저희가 아니라 회장님과 부경화학이 하셔야죠.”
“이 사람 이거 말하는 게 왜 이래?”
“앉으세요.”
“이봐, 조 전무.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모를까.
이 정도도 마지막 예의를 끄집어 올려 간신히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거라는걸.
조동희 전무는 다른 말 없이 자신의 사무실 상석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멀뚱히 서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선동 회장을 힐끗 올려다본 뒤 다리를 꼬았다.
결국 장선동 회장은 조 전무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상황이 상황이고, 다들 예민해져 있다는 건 알겠어요.”
재경 그룹 본사.
이곳에 방문을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방문을 할 때마다 회장실의 상석 소파를 안내받아 왔던 장선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무실에서, 그것도 일반 소파 자리마저 감지덕지였다.
아니,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내가 다 확인을 했거든. 아니야. 확인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이딴 걸 왜 확인을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민규 그 새끼가 딴에는 억울했던 모양이야. 왜 부경통신 이슈 때 민규 그 새끼 음주 운전 뺑소니 건으로 재경에서 판을 더 키웠잖아. 그 자료 그거도 우리 민석이가 정훈이 편으로 넘겨준 거였고. 알고 있죠, 거기까지는? 그걸 재경에서 모를 수가 없잖아요.”
“계속하시죠.”
“거기에 앙심을 품었던 모양이지. 민석이는 또 어쨌거나 집안 장손이고 하니까 마땅한 일을 해 놓고도 사촌 동생이 신경이 쓰여서 몇 번 면회를 갔었던 거 같고.”
장선동 회장은 멍청한 짓을 저지른 아들의 행동에 답답함을 쏟아 내듯, 다리를 꼬아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민규 그 새끼 그게 꼭 지 애비 닮아서 나쁜 새끼야, 그게. 민석이한테 돈을 조금 해 달라고 했대. 얼굴 다 팔린 한국에서 자기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내가 진짜 할 말은 아니지만, 지 애비까지 12년 형 받고 들어가 있는데, 민규 그 새끼는 최대한 빨리 나올 수 있게끔 뒤에서 손을 많이 썼거든. 외국 나가서 살겠다고, 외국 나가서 자리를 잡아야 할 거 같으니 돈을 좀 해 달라고 한 모양이야. 민석이 이놈이 그걸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 준 모양이지. 지금 그게 조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거 같은데, 별일 아니야. 금방 아무것도 아닌 걸로 밝혀질 거라고. 우리 쪽에서 지금 신경 쓰고 있어.”
“손 상무가 조금 전에 깨어났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뜨며 장선동 회장이 화들짝 놀랐다.
“그, 그래? 그거 잘됐네. 어후, 잘됐다, 잘됐어.”
“회장님은 연락받고 다른 일정 다 취소시키신 뒤 바로 병원으로 가셨고요.”
“그래야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회장님뿐 아니라, 현재 저희 재경의 모든 신경은 손정훈 상무의 상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
“장민석 부사장, 부경화학. 거기까지 신경을 써 드릴 여력이 없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금 전 손 상무가 깨어났다고 하고, 우려했던 것보다는 추이가 괜찮다고 하고, 또 회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으니 지금부터는 저라도 그 부분에 신경을 써 봐야겠습니다.”
“그렇지. 이럴 땐 조 전무가 앞으로 나와 줘야지.”
“그렇지 않아도 현재 부경통신, 물산 쪽으로 잡혀 있는 우리 쪽 지분이 있으니 부경을 상대로 감정을 앞세우지 말라는 회장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더불어 부경 관련된 내용은 전권 제게 위임을 하시고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아, 그랬어? 그럼 진작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지, 그랬어.”
“감정이 앞으로 서지 못하도록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우리가 같이한 세월이 얼만데.”
그 말에 조동희 전무는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장선동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을 낮게 읊조렸다.
“그렇죠. 우리가 같이한 세월이 얼만데….”
“검찰에서도 지금 우리 민석이한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참고인 자격으로 가서 조사만 받고 온 게 전부라니까? 원래라면 두 번, 세 번 안 가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자르면 되는 건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또 더럽게 오래 걸린단 말이지. 우리야 상관이 없지. 그런데 이런 사건을 길게 가져갈 수 있겠냐고. 결국은 재경 이름이 안 좋은 쪽으로 계속 언급이 되는 건데. 내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계속 힘쓸 테니까 손 서방한테는….”
“아닙니다.”
결국 조동희 전무가 장선동 회장의 말을 잘랐다.
“저희 쪽 일을 왜 회장님께서 힘을 쓰십니까? 저희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힘을 쓸 사람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안 될 말이지요.”
“…….”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회장님은 장민석 부사장 관련된 내용에만 부경화학에 큰 피해가 안 나도록 신경을 쓰시면 될 일입니다.”
“조 전무. 말을 왜 또 그렇게 해? 사람 섭섭하게.”
“제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지금. 큰불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빠르게 움직이면 제 손으로 직접 끌 수 있는 불입니다. 그 불이 지금 제 눈앞에서 더 큰불로 번지려고 하고 있는데, 이 불이 왜 났는지, 누가 지른 건지가 중요합니까?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불을 완전히 제압하기 전까지는.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제 집에 불을 지른 건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그 불을 끌 수 있느냐는 거죠.”
“…….”
“물 한두 바가지면 얼마든지 끌 수 있는 불인데, 거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119를 부릅니까? 119가 도착하기 전까지 기다려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경화학, 물산으로 잡혀 있는 저희 쪽 지분, 오늘 안으로 현금화 처리하겠다고 회장님께 보고를 올릴 생각입니다.”
“조 전무!”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을 했을 때, 부경화학과 물산, 저희 재경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지분입니다. 그게 지금의 재경 쪽으로 돈이 됩니까, 다른 사업으로의 연동이 됩니까?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업이라는 게 어떻게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당장 잡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눈앞에는 보여야죠. 그걸 잡기 위해 하는 게 사업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장선동 회장의 눈빛도 빠르게 변해 갔다.
“재경이 우리한테 이러면 안 돼. 조 전무.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양심이요?”
“부경백화점. 그거 어떻게 잡아갔어? 내가 부경백화점 지분 안 넘겨줬음 잡을 수 있었나?”
“…….”
“재경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열이가 다른 형제들 다 끌어모을 때도 나만 중간에서 중재를 하고, 재경 편에 섰었다고. 몰라? 그걸 모를 수가 있는 건가?”
“압니다. 저희 재경 관련해서 미래금융 이슈 터졌을 때도 회장님, 그리고 부경화학은 저희 편에 서 주셨죠.”
“그걸 다 아는 사람이 우리 쪽으로 잡아 주고 있는 지분을 오늘 당장 현금화시키겠단 말을 해? 사업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조 전무.”
“아뇨, 됩니다, 회장님.”
“…뭐?”
“회장님께서 저희 쪽으로 아무것도 안 받고 부경백화점 지분을 넘기셨던 겁니까? 사모님께서 들고 계시던 화재 지분 12퍼센트와 교환하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
“그건 저희 쪽으로 일방적인 도움을 주신 게 아니라 거래를 하셨던 거죠. 비즈니스적으로. 그리고 장선길 회장이 장선열 회장과 함께 저희 쪽으로 공격을 넣었을 때 부경통신은 중재를 하고 저희 편에 섰던 게 아니라, 저희 등 뒤로 몸을 숨겼던 거 아닙니까?”
“뭐, 뭐?”
“현명한 선택을 하셨던 거죠. 그 결과 미래금융 이슈 터졌을 때 큰 타격 없이, 그저 저희 쪽으로 화학, 물산 지분을 일정 부분 넘겨주는 걸로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거고요. 해석을 마음대로 하는 거야 회장님 자유지만, 그 해석을 가지고 상대를 기만하는 건 문제가 있는 거죠.”
“…….”
“정태, 정훈이. 저한테는 제 친조카 같은 존재들입니다. 올해로 재경에 36년. 재경에 들어와서 결혼을 하고, 재경에서 번 돈으로 집을 샀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시집, 장가를 보냈지요. 재경 덕에 이 나이 먹어서까지 이만큼 힘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아무리 회장님 지시가 있으셨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번 사태 앞에 오로지 이성적일 수만 있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저한테 그런 지시를 내리신 진짜 속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저는 이번 일, 절대 그냥 못 넘어갑니다. 이번 일에 장민석 부 사장이 연루가 됐다, 안 됐다 하는 건 저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다만 저는 저희 회장님께서 뭘 원하고 계실지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체면 구겨 가며 직접 입 밖으로 내시기 전에 제가 대신해 드릴 뿐입니다. 돌아가시죠, 그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