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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92화 (292/303)

292화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왼쪽 옆구리 부근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통증은 나로 하여금 죽지 않았다고,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기에 반갑고 고맙기까지 한 통증이었다.

“으윽….”

여전히 시야는 마치 물속에서 물 밖 세상을 보고 있는 듯 뿌옇고 흐리기만 했지만, 청각만큼은 또렷했다.

“정훈아. 형이야, 형. 괜찮아? 형 알아보겠어?”

정태.

눈앞에 아른거리는 남자의 형상.

목소리까지 굳이 자신을 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정태가 분명했다.

“아아….”

괜찮다고, 정신이 들었다는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그 짧은 한마디가 왼쪽 옆구리를 괴롭히는 통증에 가로막혀 다시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형 알아보겠냐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의료진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시야는 확보가 되지 않았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불쾌하게 느껴졌던 환함에 조금씩 눈이 적응을 하고 있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타일들 사이에 선이 보이기 시작했고, 곧 물체가 정상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봤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왼쪽 옆구리에 생겨난 상처는 허락하지 않고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으윽, 아아….”

이 상태로는 혼자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건 말도 안되고, 옆으로 살짝 틀어 눕는 거까지 불가능해 보였다.

“어떠세요? 많이 불편하시죠?”

“아… 네, 힘드네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가족들의 반응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본다.

혹시나 고개 정도는 내 마음대로 돌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하지만….

“아아아….”

역부족이었다.

내가 무슨 시도를 하려 했는지 눈치를 챘다는 듯, 의료진 중 누군가가 딱딱한 어조로 주의를 줬다.

“당분간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수술 부위 벌어집니다.”

엄살이 아니라, 나의 왼쪽 옆구리는 정말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용기를 내어야 할 정도로 몸에 작은 흔들림,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금방 무통 주사 새 걸로 갈아 드릴게요.”

꼼짝도 못 하는 상황에서 눈알만 사방으로 굴려 본다.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심지어 하늘이까지 있었다.

그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장혜란.

장혜란이라는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아예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훈이의 기억뿐 아니라, 그 기억이 가지고 있는 감정까지 고스란히 내게 담겼다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슴이 무겁다는 느낌, 아린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삶이… 가엽게 느껴졌다.

이 감정은 오로지 그녀와 정훈이의 관계에 기인된 감정이었다.

부경, 장가의 차녀 장혜란이 아닌 정훈이, 정태의 어미.

가슴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 후로 가족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몇 가지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다.

의사는 내 몸 이곳저곳을 손으로 눌러 보며 감각이 있는지를 물었고, 양쪽 귀에 차례대로 쇳소리가 나는 기계를 갖다 대며 청각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신기했다.

처음엔 오른쪽 귀가 막혀 있다는 걸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테스트를 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귀가 막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고여 있던 귀에서 그 물이 빠져나오듯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들더니 곧 오른쪽 귀로도 소리가 들어온다는 게 느껴졌다.

“수술 부위가 안 좋아서 추이는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우선 수술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가족들에게 내 상황을 대신 전달한 의사가 간호사를 시켜 무통 주사를 새로 갈아 주고 자리를 떠났는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 병실 안의 정확한 상황까지는 확인을 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 말고는 현재 이 방에 다른 사람이 없을 거라는 느낌은 확실했다.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꼬박 하루 동안 정신 못 차리고 누워 있었어.”

정태였다.

정태의 목소리.

그런데 고작 하루라고?

난 정훈이의 기억 모두를 직접 보고,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있는데, 고작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라고?

“괜찮아?”

“네가 지금 그걸 묻냐, 나한테?”

“크게 안 다쳤냐고. 괜찮냐고.”

“…….”

“얼굴 좀 이쪽으로 와 봐. 보게.”

내게 자기 얼굴을 갖다 대는 정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왼쪽 옆구리에 깊은 통증이 올라올 정도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무통 주사가 꽤나 효과가 빠르게 올라오네.

새 걸로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 같은데, 금세 통증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정 과장은? 정 과장은 괜찮아? 안 다쳤어?”

“괜찮아. 안 다쳤어.”

“그럼 그 사람은? 처음 흉기에 찔린 사람.”

“괜찮아. 위험할 뻔했는데, 다행히 금방 깨어났고 수술도 잘됐어.”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다.”

“…….”

“진짜 다들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까.”

“하아… 일단 그럼 됐어.”

“…….”

* * *

오후 늦게쯤 중환자실에 있던 정훈이는 VIP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사이 미래금융에서 장태산, 장영석 회장 부자가 가족들과 다 같이 찾아와 정훈이의 상태를 확인했고, 퇴근 시간 무렵에는 조동희 전무와 식품의 편승일, 모범태가 찾아와 얼굴을 비추고 갔다.

남필우 사장과 고모 손여정은 손홍준 회장과 장혜란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VIP 병동으로 병실을 바꾸고 나서 장혜란이 정태 내외를 따로 불렀다.

“뭘 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 물도 지금 제대로 못 마시고 있는데, 빨대 달린 물통부터 해서.”

그에 정태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사람 시켜서 당장 필요할 거 적어서 사 오라고 할게요.”

하지만 원수경의 생각은 달랐다.

“물통이야 지금 당장 급한 거니까 병원 편의점에서 하나 사면 되는 거고, 나머지 필요한 건 제가 지금 도련님 집에 가서 챙겨 올게요.”

장혜란의 생각도 원수경과 같았다.

“그렇게 해라. 사돈이 지금 승현이 본다고 너무 고생하고 계신다. 수경이는 가서 승현이 보고, 정태 네가 속옷, 양말부터 해서, 내일부터는 일어나서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해도 될 거라고 하는데 잠바 같은 거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가는 동안 꼼꼼하게 챙겨서 폰 충전기하고 슬리퍼 같은 거, 있는 대로 좀 챙겨서 와.”

“네.”

“정훈이 깨어났고, 병원에서도 괜찮을 거라고 하니까 이제 마음 놓고 둘이 같이 갔다 와. 나간 김에 같이 저녁도 먹고 들어오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괜히 나까지 정신이 없어지려고 그래.”

남편과 함께 정훈이의 집에 도착한 원수경은 마치 처음 와 본 집인 것처럼 집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처음 와 본 집?

당연히 아니다.

이 집을 고른 게 원수경이었다.

남편과 연애 시절,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정훈이가 곧바로 독립을 희망했고, 그 독립을 지원했던 게 바로 남편, 정태였다.

그리고 동생의 독립을 지원하는 남편을 도왔던 게 바로 원수경이었고.

워낙 이런 쪽으로 관심도 많고 재능도 있었기에 현재 정훈이가 쓰고 있는 이 집은 물론, 인테리어까지 모두 관여를 했던 게 바로 원수경이었다.

그럼에도 원수경에게 이 집은 무척 낯설기만 했다.

인테리어는 그대로다.

심지어 가구의 배치까지 전혀 손을 댄 곳이 없었다.

그런데 낯설다.

낯설어진 집 안을 둘러보며 실내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간 원수경은, 개방형 서재 안에서 잠시 멈칫했다.

“거기서 뭐 해? 내가 슈트 케이스 가지고 올 테니까 짐 좀 챙겨.”

“여보.”

“왜?”

“이쪽으로 잠깐만 와 봐.”

여전히 흉기에 찢어졌던 한쪽 팔에선 욱신대는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정태는 반쯤 섞인 짜증을 얼굴에 걸어 놓고 엄한 곳에서 딴짓을 하고 있는 원수경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며 서재 공간으로 들어갔다.

“뭐야, 이거? 정훈이 이 자식 집에서 붓글씨 써?”

“진짜네. 진짜였네.”

큰 글씨로 쓰여 있는 이름들.

승현이가 쓰는 ‘승’ 자는 ‘이을 승’이다.

그 승과 같은 돌림자를 쓴 여러 이름이 한자로 써진 여러 장의 화선지.

필체는 가히 명필이었다.

“뭐가 진짜라는 거야?”

들고 있던 이름 적인 화선지를 남편 쪽으로 보여 주며 원수경이 말했다.

“이거.”

“이게 뭔데? 승주?”

“정훈이가 승현이 동생 이름을 지어 보고 있었대.”

“누가 그래?”

“하늘이가.”

“……?”

아마도 붓글씨를 앉아서 쓰지 않고 서서 쓰는 모양이었다.

화선지들이 펼쳐져 있는 책상은 높이가 일반적인 책상의 높이가 아니었다.

그 책상 위로 펼쳐져 있는 화선지들을 뜻에 따라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으로 나누어 놓고 원수경이 말했다.

“여기 이렇게 여자애면 이런 이름들, 남자애면 이런 이름들로 붙이겠다고 혼자 집에서 뜻을 붙여서 만들어 보고 직접 써 봤대.”

“…….”

“나 근데 좀 억울하다, 여보?”

“뭐가 억울해?”

“나 왜 이거 보고 정훈이한테 미안해해야 해?”

“그게 무슨 소리…!”

그 순간 정태는 크게 당황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왜 뜬금없이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원수경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였다.

“여보? 왜 그래?”

정태는 원수경이 흘리고 있는 눈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어제오늘 원수경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그 생각들로 스스로 얼마나 큰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지.

칼에 찔려 의식을 못 차리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 정훈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훈이가 의식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무섭고, 남편을 구하려다 대신 칼을 맞았기에 입장이 많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편은 크게 다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원수경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승현이,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 줘야 하는 존재이니까.

그 존재가 칼에 찔려 의식 불명인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에만 안도를 하며, 남편을 구하려다 저렇게 되어 버린 정훈이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고맙고, 또 다행이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속물.

인간성 상실.

누가 뭐라고 하든, 본인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원수경은 그저 남편이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며, 하늘에 감사할 뿐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게 아니잖아.”

울먹이며 억울함을 토해 내는 아내의 모습에 정태는 영문도 모른 채 한 발짝 다가가 원수경을 안아 주었다.

“왜 그래?”

“나도 정훈이… 정말 좋아했단 말이야. 당신만큼, 아니 당신보다 더 정훈이가 하루빨리 정신 차려서 당신 도와 함께 회사를 키우게 되도록… 나도 나 나름대로 신경 많이 썼었어.”

“…….”

“당신이랑 아버님을 무서워하는 정훈이. 혹시라도 당신하고 아버님이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정훈이한테 줘서 저러는 게 아닐까 싶어 당신 몰래 불러내서 같이 밥도 자주 먹었고, 당신이 하고 있는 생각들 힌트로 전달도 참 많이 했었단 말이야.”

정태는 말없이 그저 아내의 등을 가볍게 쓸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라고 왜 원수경이 한 노력들을 모를까.

아내는 동생과의 사이에 끼어 이간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보다 더 정훈이를 챙겼던 사람이다.

그런 아내였기에 어느 순간부터 정훈이를 경계하는 모습이 정태의 눈에 거슬렸던 거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정훈이가 변했다고 하니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정훈이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니까,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겹쳐져 아내, 원수경이 정훈이에게 두는 거리가 더한 압박으로 다가와 정태를 괴롭혔던 것뿐이다.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정훈이고 아버님이잖아. 나한테 재경가 맏며느리 역할을 부탁한 건 아버님이고 어머님이셨잖아.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노력을 했는데, 그 노력을 어느 순간부터 안 좋게 본 건 아버님이셨잖아.”

“…….”

“처음부터 선을 그어 주시든가. 처음부터 교통정리를 제대로 해 주시든가. 언제는 당신한테 회사를 다 물려주실 것처럼 하시면서 나한테 그에 맞는 역할을 주문하셔 놓고, 그 역할을 하겠다는 나한테 나대지 말라는 식으로 날 궁지로 내몬 건… 아버님이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왜 그래, 그만해.”

“당신한테라도 이런 말 못 하면 난 도대체 누구한테 이런 억울한 마음 하소연할 수 있는 건데!”

“…….”

“왜 이딴 글자 몇 개로 날 미안하게 만드냐고, 죄인을 만드냐고, 속 좁은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드느냐고오, 왜에에!”

남편의 품속에서 어제오늘 꾹 참아 왔던 두려움을 모두 떨쳐 내며 원수경은 악을 지르듯 흐느꼈다.

“나도 실은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정훈이 다시 못 깨어날까 봐. 그게 당신 때문이 될까 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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