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당신 인생 이제 진짜 끝났어
하늘이만 남겨 놓고 모두가 병실을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문밖에는 경호 인력들이 대기를 하고 있겠지만, 어쨌든 하늘이와 둘만 병실에 있었다.
정말 손가락, 발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 상태였다.
움직일 수야 있는데, 까딱 움직였다간 수술 부위에서 지독한 통증이 일어났다.
무통 주사가 다 커버를 해내지 못하는 통증.
그저 온몸에 힘을 쫘악, 다 빼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이 수술 부위에 올라 있는 화를 다스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침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날 내려다보는 하늘이의 얼굴엔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물 줄까?”
“됐다고, 필요하면 내가 말한다고. 말 시키지 마. 말하는 것도 힘들어.”
“알았어, 알았어. 가만히 있어.”
얘 지금 이거 즐기고 있네?
이거 즐기는 건데?
“가만히 있잖아. 너도 좀 앉아라. 정신 사납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이의 얼굴에는 한층 더 짙은 장난기가 어리고 있었다.
분명 저건 누가 봐도 뭔가 장난을 계획하고 있는 얼굴이다.
어렸을 때의 하늘이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독 호기심이 많고, 그래서 사고도 많이 쳤던 게 하늘이다.
언제나 의기소침해 있고 기죽어 있었던 정훈이에게 항상 밝고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던 하늘이는 언제나 신기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부러운 대상이기도 했다.
내 기억 속 하늘이는 그런 존재였다.
사랑만 받으며 자란 존재.
그저 웃기만 해도 잘 웃는다고 칭찬을 받던 존재.
실수를 해도, 실패를 해도 응원과 격려를 받아 내던 존재.
가족들에게 받고 있는 사랑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있던 존재.
그래서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타인에게 무척 관대했던 존재가 바로 하늘이었다.
내게 새겨진 정훈이의 기억 속 하늘이는 그런 존재였다.
“또 코 간지러워? 긁어 줄까?”
“가만히 좀 앉아 있으라… 으윽… 고, 쫌.”
“진짜 아예 못 움직이겠어?”
“너 그냥 집에 가라. 안 되겠다. 너 간밤에 잠도 옳게 못 잤다며? 호텔방 잡았다며? 뭐 하러 그래? 이제 깨어났는데. 괜히 헛돈 쓰지 말고 체크아웃해. 그리고 집에 가, 집에. 푹 자고 내일 다시 와.”
“싫은데?”
“…….”
“아,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기분이었겠어. 이제 좀 이해가 되네.”
“또 뭐가?”
“오빠가 나 놀릴 때 말이야. 맨날 내가 뭐 좀 해 달라, 하지 마라 그럴 때 턱 쭉 빼고 싫은데, 싫은데… 하면서 사람 혈압 올렸었잖아.”
그야, 말 그대로 장난이었고!
그때 넌 지금의 나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이 아니었잖아!
“저 재미없는 걸 초딩도 아니고 왜 계속하나 싶었는데, 막상 내가 해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 끊기가 힘들어. 프링글스야, 프링글스. 한 번 여니까 멈출 수가 없네. 중독성이 있어, 이게.”
“너 이거 감당하겠냐? 나 퇴원하는 순간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이래? 아까 의사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나 내일부터는 일어설 수 있다.”
“그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내가 지금까지 한 거 다 잊어 줄 테니까, 그만해라.”
“싫은데, 싫은데….”
“누가 봐도 지금 나는 절대 안정 이런 게 좀 필요한 사람 아니냐?”
“가만히 있어, 가만히. 그냥 쌩까. 누가 일일이 반응하래? 그냥 없는 사람치고 무시해. 원래 그런 거 잘하잖아.”
“하아, 물 좀 줘.”
그제야 과한 반응으로 서둘러 물통을 찾은 하늘이는 물통에 달린 고무 빨대를 내 입 속으로 넣어 주었다.
사실 이걸 빨아 먹는 거 자체도 상처 부위에 꽤나 욱신거리는 통증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몇 모금 물을 빨아 먹고 나서 혀끝으로 빨대를 밀어냈다.
그러자 하늘이는 그 물통을 머리맡 협탁 위로 올려놓고, 그 상태로 날 내려다보았다.
마치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재미난 곤충을 발견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꾸욱.
하늘이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꾸욱, 하고 찔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꼭 신기한 물건을 건드려 보는 것처럼 꾸욱….
“질감 테스트하냐?”
그러자 이번엔 반대쪽 볼을 또 꾸욱, 하고 찌르는 거였다.
“적당히 해라, 진짜.”
내가 하는 경고성 말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뜯어보듯 날 내려다보던 하늘이는 이번엔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내 코를 꼬집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듯 만지는 거였다.
이때부터는 나도 거의 포기 상태였다.
그래,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라.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원래 자리에만 갖다 놔라… 하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들은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건지 그 생각만 하고 있던 그때.
“……!”
하늘이가 갑자기 상체를 내 위로 숙이더니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는 거였다!
“뭐 하냐, 진짜.”
“고백하는 거잖아.”
“…….”
“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한다고.”
“이 와중에?”
“지금부터는 생각날 때마다 하려고. 이번 일 통해서 사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실감했어. 그래서 지금 안 해 준 거 나중에 후회 안 하도록 생각날 때마다, 볼 때마다 해 주려고.”
그러더니 다시 한번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갖다 붙이는 하늘이었다.
“너 여기 이 방에 CCTV 다 있다.”
“어머? 진짜?”
“돌이냐? 닭이야? 기본 상식 아냐?”
“어디 있어? 어디?”
“저기도 있고, 저기도 있잖아.”
“그럼 이 각도에서 해 줘야 보는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겠다. 그지?”
“왜 이렇게 까졌지, 이거? 너 원래 안 이랬잖아. 어이, 장범생.”
내 입에서 장범생이라는 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하늘이는 내게 숙이려던 자세 그대로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워 내게 조금 전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왜 이렇게 까졌냐고.”
“아니, 그거 말고.”
“너 원래 안 이랬다고.”
“아니, 그다음에.”
“장범생.”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내가 붙여 준 별명이었잖아.”
“…….”
“어이, 장범생? 네가 암만 까져도 나만큼 하겠냐? 경솔한 짓 적당히 하고 좀 비키지? 나 진짜 아프거든? 아까부터 소변 마려웠는데, 너 때문에 억지로 지금 참고 있는 거거든? 그니까 좀 내 집중력 흐뜨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든 아님 잠깐 나가 있든 해.”
지가 그렇게 보면 뭘 안다고 의사가 하는 것처럼 내 눈을 억지로 뜨게 만들고서 동공을 확인하고 있었다.
“얘 진짜 왜 이러지?”
“내가 오빠한테 그런 말도 한 적이 있었나?”
“너도 기억 못 하는 걸 내가 기억하겠냐?”
“오빠 설마 기억…나는 거야?”
갑자기 무섭다는 듯 침상에서 두어 발 화들짝 놀라 떨어지며 하늘이가 물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요란다 이야기해라. 내가 진짜 너 가만히 안 둔다.”
정말 궁금했었다.
요란다의 존재, 그리고 정체.
자기들끼리 시나리오 짜고 주연에 조연까지 다 해 먹었던 존재, 요란다.
정작 정훈이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하늘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번 같이 자리를 했던 존재였을 뿐, 그걸 지난 몇 년 동안 사골 우리듯 틈만 나면 그게 내 약점인 듯 우려먹은 하늘이.
“너는 내가 진짜 요란다랑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냐?”
“어머!”
“어머는 무슨.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사람 하나 쓰레기 만들어 놓고 그걸 여태 우려먹고 있어?”
“진짜 기억이… 나?”
“그리고 너도 진짜 나쁜 놈인 게, 나한테 학교 사람들 소개받을 거 다 소개받고, 얻어먹을 거 다 얻어먹어 놓고, 꼴랑 한 학기 같이 룸메이트 한 요란다 때문에 나랑 절교를 선언해?”
“진짜 다 기억이… 나는 거야?”
“내가 체질적으로 백인을 안 좋아해. 이성으로 안 느껴져. 예쁘면 이게 또 말이 달라지는데, 요란다 걔는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입까지 두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하늘이의 두 눈엔 어느새 물기가 촉촉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요란다 이야기 꺼내라. 나라고 나만 알고 있는 네 학교생활 흑역사가 없을까. 만천하에 다 퍼뜨리는 수가 있다.”
“야, 손정훈! 내가 지금 묻잖아, 진짜 다 기억이 나는 거냐고.”
“너 나한테 600불 갚을 거 있지 않냐? 다 같이 뭉구스 갔을 때 너 지갑 잃어버려서 급한 대로 쓰라고 내가 내 카드 빌려줬었잖아. 그거 왜 안 갚냐?”
“씨이… 끝까지 한 번을 안 져 주지. 기억나는 거 맞냐고, 내가 묻잖아, 아까부터 계속. 씨이….”
급기야 하늘이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기억나. 다 나. 그니까 나 소변 좀 보게 사람 하나 불러 주고 너는 좀 나가 있어라.”
“싫은데? 안 나갈 건데? 오빠 옆에 꼭 붙어 있을 건데?”
“이 와중에?”
“싸, 그냥. 그냥 옷에 싸.”
“대단하다, 진짜.”
“진짜 기억 다 나는 거 맞지? 이제 진짜 정상인 거 맞지?”
“언제는 네 앞에서 비정상이었냐, 내가?”
“…….”
“울지 마.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우니까 못 봐 주겠다. 뭘 울고 그래? 아, 나 근데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진짜 옷에 싸겠어. 얼른 나가서 사람 좀 들어오라고 해.”
* * *
접견실.
장민규 앞으로 담당 검사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똑바로 앉으세요.”
“편하게 합시다.”
“똑바로 앉으시라니까요.”
“힘 빼지 마세요. 힘 안 줘도 제가 알아서 다 진술을 할 거니까.”
“누구는 힘을 주고 싶어 힘을 주고 있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진술을 하고 있는데, 힘이 안 들어가겠냐고.”
그에 장민규는 피식하고, 상대를 놀리듯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거슬렸던지, 검사는 코로 한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딱딱해진 어조로 물었다.
“즐거운 모양이에요?”
“즐거울 게 있겠어요? 다시 또 그 지긋지긋한 수감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게 여유를 부리면 뭐가 좀 있어 보이는 줄 알아요? 중2병도 그 정도면 말기예요.”
“검사님 나랑 데이트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왜요? 내가 한 진술대로 장민석이 그 X새끼 털어 봤는데 뭐가 마음대로 조사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
“그쪽에서 지금 장민규 씨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준비할 모양이에요.”
“크크큭, 명예는 X발. 장민석이 그 새끼한테 그런 게 있어요?”
“내가 그런 거까지 알아야 됩니까? 어쨌든 부경화학 쪽에서 변호단을 엄청난 규모로 꾸리고 있고, 장민규 씨 상대로 명예 훼손에 관한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까, 혹시 몰라서 전해 주는 거예요.”
“참 대한민국 검사들 실력 없어. 아니, 어떻게 명색이 검사라는 사람들이 그걸 지금 압박이랍시고 나한테 하는 거예요? 검사님 검사 딱지는 어디 종이 접어 딱지치기해서 딴 거예요?”
“우리가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는 자수를 했다고 해도 피의자 상대로 사람 대접을 안 해 줘요. 사람 같은 짓을 해야 사람 대접을 해 주지. 당신이 한 때 부경통신 부사장이었든, 뭐였든 이 방에 들어와 내 앞에 앉은 순간 그냥 동네 삼류 양아치, 짐승일 뿐이라고.”
“오호, 무섭네?”
“근데 내가 왜 지금 장민규 씨한테 꼬박꼬박 존대를 해 주면서 아직은 사람대접을 해 주고 있는지 알아요?”
“이래서 내가 대한민국 검사들이 실력이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무슨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요?”
검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장민규를 쳐다봤다.
“내가 지금 밥상을 차려 줬잖아. 떠먹는 것도 알아서 못 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상 위에 올라온 반찬들이 불친절해. 우리 취향이 아니라고.”
“장민석이가 내 계좌로 쏜 130억 출처 뒤져 봤어요?”
“아직 잡힌 혐의가 없는데, 무슨 수로 그걸 뒤지나?”
“이러니 실력이 없다는 거지. 내가 300억을 불렀거든. 근데 당장 만들어지는 게 130억이라고 딱 그것만 보냈어요. 아직 170억이 덜 들어왔단 말이지.”
“그게 지금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동기, 계기, 명분. 장민석이 살인을 교사할 그 어떤 것도 없어. 본인도 강하게 부인을 하고 있고. 오로지 장민규 씨 당신 주장만 있는 거야.”
“검사님 300억 실물로 본 적 있어요?”
“…….”
“그걸 숫자가 아닌 실물로 본 사람이 이 나라 대한민국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300억? 부경화학에서 300억 정도면 푼돈일 거 같죠? 검사님처럼 그 돈에 대해 실감을 못 하는 사람들은 재벌들이라면 그정도 돈은 푼돈일 거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안 그래. 그걸 그룹 차원이 아닌 일개 부사장 개인이 바로 현금화시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 지금의 부경화학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숫자지.”
“…….”
“그 300억을 만들겠다고 장민석이가 자신이 가진 뭘 팔았을까? 집? 주식? 금괴? 하하. 아니. 꼬박꼬박 다 세금을 내고 있는 그런 실물을 팔 수가 없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룹 도움 없이, 자기 재산 처분 안 하고 어떻게 장민석 부경화학 부사장이 내게 130억을 전달했고, 또 나머지 170억을 만들어 줄 수 있겠어요?”
“…….”
“내가 이젠 아예 숟가락으로 밥까지 퍼서 입에 넣어 주고 있네.”
“설마 지금 장민석 부사장의 비자금 부분을 파 보란 말을 하는 거예요? 그건 지금 이번 사건하고는 아예 별개의 내용이고.”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신들은 그 비자금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안 팔 거 아냐. 우리 부경통신 무너뜨릴 때 부경화학 쪽 비자금 내용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나? 아니잖아. 알면서도 그냥 다른 외압에 눈감고 넘어갔던 거잖아. 하루라도 수사 종결을 빨리하겠다고.”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간다고 느꼈던지, 담당 검사는 깊게 한숨을 몰아쉬며 장민규 앞으로 자신의 담뱃갑을 내밀었다.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문 장민규에게 불을 붙여 주며 검사가 물었다.
“그쪽 비자금 관련된 내용을 파기 전에는 지금까지 한 진술과 일관된 진술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게 사실이니까. 전 지금 검사님 앞에서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가 있는 거예요? 당신 인생 이제 진짜 끝났어. 그거 알아요?”
그에 장민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담배 이거 멘솔 말고 딴 건 없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