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94화 (294/303)

294화 우리 재경이 지켜지고 있는 영상이다

볼 때마다 섬뜩하고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손홍준 회장은 패드로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벌어졌던 장면을 담은 CCTV 영상을 다시 재생시키고 있었다.

형을 구하겠다고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정훈이의 모습은 손홍준 회장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연 그때의 나는 형님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 당시 뭘 하고 있었던가.

형님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었다.

극심한 부담감으로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버티고 계신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때의 손홍준 회장은 형님, 손홍명 회장이 아닌 재경 그룹과 자신의 가족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만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홍준아.”

“네, 형님.”

형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기 바로 전날.

손홍준 회장은 형님의 호출을 받고 그룹 본사로 향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이곳 회장실에서 형님으로부터 답답한 소리를 듣고 그에 형님을 자기 손으로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네 처가 쪽으로 우리 사업들을 넘기는 건 아닌 거 같다. 정리는 불가피하지만, 그 상대가 부경은 아니었음 좋겠어.”

그때의 손홍준 회장은 형님의 그 물음이 답답하고 어리석게만 느껴졌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군들 아버님 대에서 힘들게 키워 내신 사업들을 그렇게 헐값에 넘기고 싶겠나.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복구를 우선으로 할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에 재경을 어떻게든 건져 내어서 형체 보존이라도 시키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 큰 덩어리를 한 번에 다 받아 줄 수 있는 상대는 지금 당장 부경이 유일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몸을 사리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나.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억울함, 분함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이라도 지켜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맞는 것인데, 그 순간까지도 형님은 미련하게 부경 쪽으로 넘길 수밖에 없게 된 사업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셨다.

“장기적으로 보세요.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것들만 보지 말고."

“장기적?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게 맞는 걸까?”

“하아, 형님.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부경 통해서 자금 확보부터 해 놓고, 그걸로 항공, 식품 쪽으로 쏟아부어서 수출에만 집중을 해야 할 때 아닙니까? 다행히 지금 원 달러 가치가 엉망이라 남은 항공, 식품, 모직으로 수출에 집중을 하면 금방 지금 처해 있는 위기 극복 가능하고, 지금 당장 포기해야 하는 사업들은 나중에 가서 얼마든지 새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해 봤잖아. 방법을 알잖아요.”

나중에, 형님이 돌아가시고 1년쯤 지났을 무렵, 손홍준 회장은 당시 자신의 형님이 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부경 쪽으로 넘겨야 했던 사업들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

처가 쪽으로 시달리게 될 동생의 입지를 걱정하셨던 거다.

자신보다 더 자신의 처가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형님.

그때의 손홍준 회장은 당시의 재경을 살려 줄 수 있는 파트너로 자신의 처가만 한 곳이 없다고 맹신하듯, 순진하게 믿고 있었는데, 형님은 그게 앞으로 동생의 큰 족쇄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거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이 없으셨던 것이고.

아마도 형님의 극단적인 선택은 항공과 식품, 모직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들을 부경 쪽으로 넘기며 자금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동생에게 만들어주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그런 명분이라도 바로 서야 재경 주주들의 불만과 원성을 총수 자리에 앉게 될 동생이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부경의 욕심을 조금이라도 뒤로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셨겠지.

재계 순위를 떠나 국내 재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재경 그룹.

그 재경 그룹의 총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 당연히 모든 언론은 재경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공개를 할 것이다.

아무리 부경에서 야욕의 이빨을 날카롭게 갈아 놓고 있더라도, 부경 역시 기업 이미지가 있고 사돈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깊게 박힌 상태에서 더는 재경을 상대로 뭔가를 긁어 가지 못하리라는 계산.

실제 형님께서 그런 계산까지 다 머리에 넣어 두고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아님 말 그대로 순간의 충동을 견뎌 내지 못하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재경은 손홍명 회장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많은 동정 여론을 얻어 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경험이 부족했던 손홍준 회장은 그 큰 위기 속에서 부경의 별다른 압박 없이 재경을 물속에서 건져 낼 수 있었다.

한참 동안 패드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보며, 예전 생각에 잠겨 있던 손 회장의 귀에 회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태였다.

스너프 손정태 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

“급하게 연락받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 봐.”

손홍준 회장은 자신의 아들에게 동생이 칼에 찔리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눈짓하며 같이 보자고 했다.

그에 정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버지의 표정을 읽었다.

“봐.”

“아버지.”

왜 이걸 자신에게 보여 주느냐고, 아직도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데, 그래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영상을 보라고 하실 수 있는지 정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봐.”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뭐가?”

“저 때문에 정훈이가 칼에 맞았다, 그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요.”

“뭐?”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제가 이걸 왜 봅니까, 아버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보다.

손홍준 회장은 뜻밖에도 과한 반응을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을 했다가,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너에게 재경은 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너에게 이 재경 그룹은 어떤 의미인 거냐.”

“…···.”

“나한테 재경은 너희들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요?”

“한때엔 말이다. 한때, 내가 너희들 나이 때엔 네 할아버지가 곧 나한테는 재경이었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형님이 내게는 곧 재경이었지.”

“…···.”

“그리고 너희들 큰아버지 그렇게 되신 이후부터는 너희들이 내게는 재경이었다.”

정태는 언제 아버지를 향해 불만을 털어놓았냐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가 하고 계신 말뜻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나도 이번 일 겪고 나서 알게 됐는데, 단 한 번도 나 자신이 재경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난 오로지 재경을 위해서 산 사람일 뿐이었지.”

“…아버지.”

정태 앞으로 패드 화면을 돌려놓고 손홍준 회장이 다시 말했다.

“봐라. 우리 재경이 지켜지고 있는 영상이다.”

“……!”

“불편해도 네가 이걸 봐야 돼. 누가 지금 우리 재경을 지켜 내고 있는지. 살리고 있는지.”

그 순간 정태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지켜 내기 위해 정훈이가 몸을 던지고, 쓰러진 정훈이를 살리기 위해 정 과장이 흉기를 든 괴한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전기 충격기를 이용해 괴한 한 명을 쓰러뜨린 정 과장을 향해 몰려드는 나머지 괴한 셋.

하지만 정 과장은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들고 있는 전기 충격기를 목적 없이 휘두르며 그들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쏟아져 나온 호텔 보안 직원들.

그들과 함께 미친 듯이 뛰어오는 정엽이 형.

차량과 함께 습격을 온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괴한 둘.

그 영상 속 정태는 도망가는 괴한들을 잡아 보겠다고 뛰려 했지만, 뒤에서 자신을 완력으로 끌어안아 버린 정엽이 형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었다.

정엽이 형이 자신을 진정시키는 동안 정 과장은 정훈이 곁에서 흉기에 찔린 부위를 지혈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다른 호텔 보안 직원들은 자신의 운전기사 겸 수행 비서 역할을 해 주고 있는 박 실장의 상태를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재빨리 정훈이의 상태를 확인한 정엽이 형.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져 놓고 정훈이를 바닥에 반듯하게 눕힌 뒤, 한 손으로는 지혈을 유지한 채 심폐 소생술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든 장면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보고 있던 정태에게 손 회장이 말했다.

“내겐 너희들 할아버지였고, 너희들 큰아버지였으며 이제는 너희들인 재경을 어째서 너희들 할아버지는 우리 직원들이 곧 재경이라고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다.”

“…….”

“결국 재경을 지키고, 유지하고, 살리는 건 우리 오너가 사람들도, 특별한 사업도 아닌 바로 우리 직원들인 거야. 너희들 할아버지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될 정도로 대단한 경영인이셨던 건… 사실 사업 실력이 대단하셔서가 아니다.”

언제나 자신의 할아버지를 높게 평가하는 모습만 보여 왔던 아버지였기에, 정태는 지금의 아버지 모습이 조금은 인간적이고 솔직해 보였다.

“너희들 할아버지보다 더 실력 있는 기업가들은 당대에도 많았다. 더 대단한 사업을 만들어 낸 실력가들은 얼마든지 더 있었어. 그런데도 너희들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회자가 되고 있는 건, 우리 재경을 사업으로 키워 내신 게 아니라, 바로 사람, 우리 직원들로 키워 내셨기 때문이다. 직원이 곧 회사라는 걸 말로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이셨고, 실제로도 우리 직원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으셨던 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거다.”

“…….”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정태 너는 재경의 의미를 너희들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던 마음처럼 만들어 놓고 회사를 운영해라.”

“…네.”

“지금 바로 식품으로 가자.”

* * *

재경식품 본사 사장실.

상석 소파 자리로는 손홍준 회장이, 양옆 소파 자리엔 손정태 스너프 사장과 편승일 재경식품 사장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대화 중 들려온 노크 소리.

곧바로 문이 열리고 긴장한 모습의 정재현 과장이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편승일 사장은 크게 놀랐다.

감히 어느 누가 재경이라는 조직 안에서 사장들과 이야기 중인 회장님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까.

정재현 과장의 등장과 동시에 소파 상석에 앉아 계시던 회장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셨고, 손정태 사장 역시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몸을 옮기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편 사장이었지만, 회장님이나 손 사장처럼 정재현 과장을 맞이하겠다고 출입문 쪽으로 자리를 옮길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정재현 과장은 깊게 고개를 숙인 뒤 그룹 회장님 앞에서 주눅이 든 모습으로 상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정 과장 앞으로 다가가 선 손홍준 회장은 얼른 두 손으로 정 과장의 손을 잡고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큰일 했다. 내가 너무 고마워서, 자네 얼굴 보겠다고 그룹 본사로 찾아오란 말도 못 하고 이렇게 직접 찾아왔어.”

“…아, 아닙니다. 저는….”

회장님 뒤편으로 서 있는 손정태 사장이 자신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정 과장 눈에 들어왔다.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재경 그룹의 회장님과 스너프 손정태 사장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니….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직접 소파 자리를 안내한 손 회장은 조금 전까지 편승일 사장이 앉아 있던 자리를 정재현 과장에게 권해 놓고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편 사장은 그 옆자리 차지가 되었고, 그럼에도 회장님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전혀 불편한 느낌은 안 들었다.

“우선은 자식 둔 부모 입장에서 자네한테 너무 고마워.”

“진짜 아닙니다, 회장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현장 영상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볼 때마다 자네를 꼭 따로 불러서 고맙단 인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

“그리고 이건 자식 둔 부모 입장이 아닌 회장 입장에서도 지금 현재 그룹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우리 손정태 사장, 그리고 손정훈 상무를 지켜 준 부분에 반드시 그에 맞는 사례를 해야 해. 자네는 괜찮아? 따로 다치거나 한 곳은 없어? 영상으로 봤을 땐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하는 모습은 안 보이던데, 그래도 혹시 몸싸움 중에 상한 곳은 없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손정태 스너프 사장.

그리고 바로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승일 사장.

정재현 과장은 두 사장의 눈치를 재빠르게 살핀 뒤, 회장님을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는 따로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걷는 게 좀 이상한 거 같던데?”

“운동 부족입니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급하게 막 써서 그런지, 그 일 있고 나서 근육통이 조금 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거 말고는 괜찮고?”

“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상무님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태는 정훈이의 상태부터 묻고 있는 정 과장의 모습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 고마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정태가 대신 대답했다.

“상처 부위가 깊어서 괜찮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정말 그만하길 천만다행이고, 그 부위 말고 다른 곳은 다 괜찮다고 하니까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정말 다행입니다.”

“손 상무도 깨어나자마자 정 과장은 괜찮은지, 크게 안 다쳤는지, 그거부터 물었어요.”

“깨어나셨단 소리 듣고 몇 번이나 전화를 드렸는데, 배터리가 나갔는지 아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인 건지 계속 전화기가 꺼져 있단 소리만 나와서….”

“조금 이따가 이 자리 끝나면 전화 한번 해 봐요. 지금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배터리가 없었을 거예요.”

“아, 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 과장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손 회장이 물었다.

“정재현 과장.”

“네.”

“내가 자네 이름은 반드시 기억할 거야. 듣자 하니까 딸이 하나 있다고?”

“…네.”

“공부는 잘하나?”

“저도 그렇고, 애 엄마도 그렇고 공부를 악착같이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학교 생활은 문제없이 잘하고 있는 건가?”

“네. 친구들도 많고, 학교에 가는 걸 좋아라 합니다.”

“다행이네.”

“……?”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디 자가인가, 아님 세 들어 살고 있는 건가?”

“…네?”

“자네 집이냐고.”

“아, 아닙니다. 전세로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 지금 자네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자네 이름으로 집을 하나 해 놓으라고 했다.”

“네,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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