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그때 제가 왜 그랬나 싶습니다
“그건 회사가 아닌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사례고….”
지금의 손홍준 회장에게 정재현 과장은 뭘 해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모든 걸 지켜 준 은인이었다.
시선을 살짝 돌려 그 옆에 앉아 있는 편승일 사장을 쳐다보며 손홍준 회장이 말했다.
“회사는 또 회사 차원의 다른 뭔가를 해 줘야겠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회사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줬는데 수고했다 한마디로 넘어가면 편 사장 그릇에 오해가 생겨.”
회장님의 의중을 편 사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날 급하게 열렸던 새벽 회의에서 회장님이 전 사장단에게 보라고 틀어 주었던 CCTV 영상을 보는 내내 편 사장은 정재현 과장이 얼마나 큰 용기를 만들어 내어, 손정훈 상무를 지켜 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했었다.
농담을 하듯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회장님의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 자신이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차장 승진 준비시키겠습니다.”
정재현 과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껏 살면서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행운이 자신에게 벌어졌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역할의 주인공이 바로 정재현 과장이었다.
이렇게 그룹 회장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할 뿐이었는데, 자신에게 집을 해 주겠다고 하는 회장님이나 차장 승진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 사장님이나, 그런 꿈같은 내용 앞에 마땅하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손정태 스너프 사장까지… 도무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행운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체면상 거절이라는 걸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여나 예의상으로라도 아닙니다, 과합니다… 라는 말을 내뱉았다가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꽃길이 금새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처럼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해 주시겠다 약속하신 그 집, 진짜 우리 집에서 아내와 함께 딸아이를 키우는 행복한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선길 회장의 폭력을 고발, 고소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상습적인 폭행의 피해자였던 걸 세상에 공개했었다.
그걸 공개하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는데, 가장 컸던 장애물은 당연히 장선길 회장이 할지도 모르는 보복이었고, 그 못지않은 장애물은 바로 자신이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내와 딸아이가 알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아내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딸아이 앞에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무기력한 아빠, 무능한 아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그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망설여야만 했다.
만약 그 녹음 파일이 세상에 공개가 된다면, 자신이 구타를 당하며 흘린 신음이 세상에 박제가 된다면, 그래서 나중에 딸아이가 인터넷 같은 곳에서 그 녹음 파일을 접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만약 내 얼굴이 세상에 공개가 된다면, 그래서 그 공개된 얼굴을 내 딸아이가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간 아빠라는 존재가 어떻게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 어린아이가 다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그게 이유였었다.
그 녹음 파일을 세상에 공개하기 전 미래금융의 장영석 당시 부회장에게 거금을 요구하며 딜을 쳤던 이유.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 정도 돈은 있어야 아내와 함께 딸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쪽팔림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고 뜨거운 뭔가가 목울대를 자극하며 눈가에 물기가 뭉쳐지게 만든 이유.
회장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오고 가는 대화 내용을 불법 녹음했다는 이유로 재경식품에 옮겨 와서까지 억울하게 굳어진 이미지의 편견을 견디며 월급을 받아 내야만 했다.
정말 단 한 사람, 자신을 직접 스카우트해 준 손정훈 상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정재현 과장에게는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았다.
상냥하게 웃어 주는 동료들마저도 저 웃음 뒤에 자신을 향한 조롱을 달고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앞에서는 웃어 주고 뒤에서는 배신자 DNA를 가진 인간이라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자기들끼리 수군대지는 않을까….
짧은 몇 개월이었지만, 정재현 과장은 재경식품에 입사해 손정훈 상무의 차량을 운전하기 시작한 이후로 항상 그런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움츠린 직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참아 왔던 설움들.
만성처럼 견뎌 오고 있었던, 오해로 굳어져 버린 자신의 이미지.
그것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눈앞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억지로 설움을 참아 내고 있는 정재현 과장의 어깨 위로 편승일 사장의 손이 닿았다.
“크흠,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한 게 많아? 회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고맙단 인사까지 하고 계시는데.”
정재현 과장은 얼른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서 회장님이 직접 고맙단 인사를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셨단 이야기부터 시작해 집을 하나 선물로 해 주시겠다 약속을 하셨고, 또 차장 승진을 하게 됐다는 걸 아내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인정에 목이 말라 있는 상태였다.
아내에게, 자식에게만이라도 인정을 받는 남자이고 싶는데, 그게 되고 있었다.
억지로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내고 있는 정재현 과장에게 손홍준 회장이 말했다.
“손 상무 퇴원하고 나면, 내가 따로 자리를 만들 테니까 우리 집에서 다 같이 저녁이나 한번 먹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하단 인사는 내가 해야지. 진짜 고마워. 정말 너무 고마워.”
사장실을 나온 정재현 과장은 곧장 본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뭐 하긴, 지수 픽업 나와 있지. 오늘 지수 발레 수업 있는 날이잖아. 데려다줘야지.
“그거 몇 시에 끝나지?”
―6시 반.
“그럼 내가 시간 맞춰서 학원 앞으로 갈 테니까 오랜만에 다 같이 외식이나 하자.”
―외식 같은 소리하고 있네. 7시부터 영어 회화 시작이야.
“오늘만 좀 어떻게 빼면 안 돼?”
―그게 한 시간에 돈이 얼마짜린데, 그걸 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이 시간에 안 하던 전화까지 걸어서는.
“나 승진해.”
―뭐, 뭘 해?
“나 차장 승진해. 다음 달에.”
―뭐라는 거야? 당신이 어떻게 승진을 해? 그 회사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곧 우리 집도 생길 거 같아.”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주위 소음만 들릴 뿐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정재현 과장 역시 아내가 뭐라 반응을 하기 전까지는 먼저 말을 안 할 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회장님께서 잠시 보자고 해서 만나고 나오는 길이야.”
―그러니까 우리한테 무슨 수로 우리 집이 생기냐고.
“에쉬빌 있잖아. 지수 학교 건너편에 있는 거.”
―뭐야? 도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거기 38평짜리, 회장님께서 회장님 사비로 한 채 해 주시겠다고 하시네.”
―장난…이지?
“우리 오늘 외식하자. 소고기 먹자. 한우로. 비싼 데서 먹자.”
―여보. 진짜야?
“당신 남편이 이런 사람이야.”
―이거 장난이면 나 화낸다?
아내의 목소리에도 큰 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 시간에 당신한테 전화해서 이런 장난 친 적 한 번이라도 있어? 내가 마치고 다시 전화할 테니까, 오늘은 지수 발레 레슨까지만 시키고 영어 학원은 빼.”
―집으로 와, 집으로.
“왜? 간만에 외식하자니까.”
―내가 해 줄게. 당신 먹고 싶다는 거 내가 다 해 줄게. 소고기 말고 딴 거 더 뭐 먹고 싶어?
“그럴 시간이나 돼?”
―지수 발레 학원 넣어 놓고 중간에 1시간 반 정도 시간 남잖아. 그 시간에 장 보면 되지. 집에서 먹자. 간만에 당신 좋아하는 와인도 한 병 뜯고.
“뭘 또 힘들게 집에서 그걸 준비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해 주고 싶으니까!
“…….”
―수고 많았어, 여보. 최고! 내 남편 진짜 최고! 완전 멋지다!
전화를 끊은 정재현 과장.
그는 자신의 볼을 차갑게 얼리고 있는 겨울바람이 신기할 만큼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아내에게 최고라는, 멋지다는 소릴 듣는데, 괜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 *
그 시간 주인 없는 운영본부장실 안에서는 손정태 스너프 사장과 편승일 재경식품 사장의 화해가 이뤄지고 있었다.
손홍준 회장이 그룹 본사로 돌아간 후에도 정태는 식품 본사에 남아 편승일 사장에게 커피나 한잔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이 방에서 사장님하고 단둘이 같이 있으니까, 예전 기억도 나면서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정태가 식품 생활을 할 때 쓰던 방을 정훈이가 다시 쓰고 있는 거였다.
손정태 사장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그가 식품에서 해 보고 싶어 했던 많은 프로젝트를 직접 사업화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편 사장이었기에, 정태의 말처럼 이 공간 안에서 단둘만 함께 있다 보니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 편 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렇네요. 사장님이 식품으로 넘어오셨을 때, 저도 이제 갓 사장 취임하고 의욕만 앞섰던 시절이었는데, 이 안에서 참 많은 걸 같이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걸 같이했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건 거의 없죠?”
정훈이가 와서 단 1년 만에 너무 많은 걸 바꿔 놓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 앞에 편승일 사장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그 흰머리들을 제가 다 만들어 드렸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말도 안 되는 걸 기획이랍시고 사장님한테 진행해 보자 요구하고 강제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하늘을 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시행착오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저희 식품은 뭐가 쉬운 길이고, 효과적인 길인지도 모른 채 계속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에이, 그건 아니죠. 따지고 보면 없는 길을 제가 어거지로 만들어 가자고 했던 거였죠.”
“원래 길이라는 게, 반드시 없는 길로 누군가가 첫발을 디뎌 줘야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 첫발을 당시 사장님께서 본인 발에 진흙, 풀 먼지, 오물 같은 걸 다 묻혀가며 걸으셨던 거고요.”
“그때 제가 왜 그랬나 싶습니다.”
“비록 유의미한 결과물이 지금처럼 많이 만들어지지는 못했지만, 사장님께서 식품에 계셨을 당시 사장님께서 만들어 내는 기획들로 조직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많은 시도가 생겨나면서 직원들이 남 눈치 보지 않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문화만큼은 확실하게 자리 잡힐 수 있었죠.”
“아뇨, 올 초에 손 상무가 식품에 처음 왔을 때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
“분명 사장님은 절 위해서 그런 입장을 자처하셨던 걸 텐데, 그런 사장님을 그날 일식집에서 제가 너무 몰아세웠습니다.”
그날 그 일식집에서 편승일 사장은 자신에게 옆방에 대기를 하도록 만든 다음, 미닫이문으로 닫혀 있는 옆방에서 손정태 사장과 손정훈 상무가 나누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만 했다.
26년째 하고 있는 조직 생활.
그 조직 생활도 재경식품의 원맨으로 해 왔던 편승일 사장이었다.
성공을 위해,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많은 굴욕과 치욕을 경험해 봤지만, 그때처럼 근본 없는 상황의 굴욕과 치욕은 사실 처음이었다.
당시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애써 아래로 눌러놓고 편 사장이 말했다.
“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장 자리에서 5년간 재경식품을 이끌며, 편 사장 자신은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부하 직원들에게 그런 불합리한 상황을 경험하게 만든 적이 없었을까.
조직 생활.
그 조직 생활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가까울수록 정점이 던지는 변화구에 효과적으로 대처를 해내야 한다는 위험 부담을 만들어 낸다.
손정훈 상무가 식품의 본부장으로 인사 발령을 받은 것부터가 편승일 사장에겐 낙차가 큰 변화구였던 것이다.
그 변화구는 재경식품의 원맨으로 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편 사장조차도 처음 경험해 보는 구질의 변화구였다.
자신에겐 재경의 후계를 선택하고 지지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어느 한쪽의 노선을 잡아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
“항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손정태 사장이 말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가끔씩 그때 제가 사장님을 몰아세우며 감정적으로 뱉었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하는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사장님께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들, 말들을 했습니다.”
그에 편승일 사장은 크게 숨을 몰아쉰 후, 편하게 웃었다.
“그래서 팔은 좀 괜찮으십니까?”
재경가의 장남.
그가 하는 사과를 받는 요령에 관한 메뉴얼 정도는 편 사장 머릿속에 완벽하게 저장, 숙지되어 있었다.
“손 상무가 식품으로 온 후로, 제가 공을 치러 갈 시간이 없습니다. 사장님이 식품에 계셨을 땐 같이 공도 참 자주 치러 가고 그랬었는데 말입니다.”
“그랬죠. 제가 쉬는 날 눈치 없이 사장님한테 같이 공 치러 가자고 참 많이 연락을 드렸죠.”
“팔 좀 괜찮아지고 하면, 같이 공이나 한번 치러 가시죠. 겨울이라 그런지, 사장님하고 같이 하남 씨씨 그늘집에서 어묵에 정종 마시면서 공 치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아마 날 좀 풀리고 봄은 되어야 공도 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팔꿈치 안쪽으로 신경이 끊겨서 이거 붙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합니다.”
“모쪼록 몸조리 잘하시고요.”
“그렇게 해야죠. 우리 손 상무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들….”
“네.”
“사장님께서 잘 좀 맡아서 완성해 주세요. 손 상무 성격에 프로젝트 지지부진한 거 보고 못 참아서 당장 출근하겠다고 링거 뜯고 뛰쳐나올까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현재 저희 직원들 다 하나같이 눈에 칼을 담고 있습니다. 쁘띠 기뿔리부터 시작해서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까지… 하나같이 다 대박을 냈는데, 손 상무 자리에 없다고 마지막 남은 프로젝트 고비드에서 똥 볼이 나와 버리면 그것만큼 쪽팔리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들 사활을 걸고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