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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품격-297화 (297/303)

297화 반드시 성공시키세요

장민규 그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대답이 뻔한 그 물음 앞에서도 나는 한참 동안 생각이라는 걸 해야 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당연히 마음 같아서는 나의 재경, 정태를 노리고 그런 짐승들도 하지 않을 짓을 벌인 그놈을 가차 없이 응징을 하고 싶지.

정말 솔직하게 말할까?

죽여 버리고 싶다.

내 손으로 직접 아주 그냥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 놈은 그냥 죽이는 것도 아깝다.

절대 그냥 죽일 수가 없지.

천천히 아주 그냥 피가 말라서 죽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느끼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거 자체를 후회하게 만들면서 죽어 가게 만들고 싶지.

방법이야 다양하다.

우리가 어디 방법이 없어서 안 하는 거겠나, 아님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거겠나.

유일하게 바깥세상에 남아 있는 제 어미 곁으로 항시 사람을 따라다니게 붙여 놓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만든 다음 녀석에게 제 어미가 자신이 한 짓으로 인해 천천히 피가 말라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12년 형을 받고 앞으로 남아 있는 삶 대부분을, 어쩌면 전부를 감옥 안에서 지내야 할 제 애비 쪽으로 들어가는 모든 외부 지원을 다 끊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고.

그런 건 일도 아니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쌓고 징역살이를 한다고, 특별 대우까지 받아 가며 그곳 생활을 한단 말인가.

그곳에서 마저 회장질을 하고 있는 장선길 쪽으로 모든 외부 지원을 다 끊어지게 만든 다음, 그 이유가 바로 장민규 너 때문이라고 알려 주는 것도 녀석을 무너뜨리는 데 아주 좋은 특효약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항상 이 ‘하지만’이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고 사람 발목을 잡는다는 게 함정이다.

우린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이니까.

책임져야 할 게 많은 사람들이니까.

짐승만도 못한 그런 놈 하나 참교육을 시키겠다고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책임을 놓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저한테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자주 말씀하셨죠?”

내게 입혀진 정훈이의 기억과 그 기억이 만들어 낸 감정이 이럴 땐 아주 요긴하게 쓰이네.

“어떠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땐,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됐는지를 따져 보고 거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집중을 해야 한다고.”

“…….”

“비록 그 선택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집중을 하다 보면 그 집중이 또 다른 해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랬지.”

“지금이 바로 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지금이?”

“네. 우리 재경에 집중을 할 것이냐, 아님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에 집중을 할 것이냐. 그 둘을 동시에 하겠다는 건 그만큼 집중력을 둘로 나누겠다는 뜻밖에 더 되겠습니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상대는 모든 걸 잃었고 손발이 다 잘린 상태로 법적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 아닙니까. 근데 우리 재경이 하고 있는 사업들은 하나같이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이죠.”

“흐음….”

“장민규 그 범죄자 새끼야 우리가 아니라도 대신 물어뜯고 처벌을 내려 줄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재경은 우리가 아니면 누가 대신 지켜 주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죠. 아니, 있다고 해도 맡길 수가 없는 거죠.”

보조 침대를 의자 삼아 그 위로 걸터앉으며 홍준이가 물었다.

“우리 재경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용서를 해 주자?”

“용서요?”

여기에서 어떻게 용서라는 감정,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지?

난 고개를 단호하게 저어 놓고 말했다.

“용서라는 건 우리 직원들이 일하다가 큰 실수를 했을 때나 하는 거고,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용서가 아니죠.”

“그럼?”

“왜 다 알고 계시면서 물어보세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거, 할 수 있는 건 책임을 다하는 거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혹여나 우리 재경 쪽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우리 재경의 주가에 지장이 안 가도록, 그래서 우리 재경의 주주들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리 직원들의 근무 환경에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우린 그 책임을 다해야만 합니다.”

“…….”

“그런 책임을 다하라고 있는 게 회장이란 자리이고, 또 오너가라는 이름 아닙니까.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게 자유는 아닙니다. 오너가의 특권은 더더욱 아니고요. 자유라는 건 어디까지나 노력과 경쟁, 책임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지금 우리 재경가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경제적 자유는 어쩔 수 없이 클 수밖에 없기에 거기에 따르는 책임감 역시 커야죠.”

웃음을 보여 주며 홍준이에게 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최소한 우리 재경이 노력하긴 싫고, 경쟁은 자신 없고, 책임지는 건 무섭고, 그러면서도 질 좋은 자유는 원하는… 그런 비겁한 재벌이라는 소리는 안 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지금껏 혼자서 잘 지켜 오셨잖아요. 지난 세월 그렇게 세상이 하는 오해에 맞서, 홀로 싸우는 외로움에 맞서 힘들게 우리 재경 잘 지켜 내셨잖아요. 여기까지 잘 끌고 오셔 놓고, 이제 와서, 이만한 일로, 그것도 고작 장민규 그 자식 하나 때문에 지난 재경의 노력에 흠집을 내실 겁니까?”

“후우….”

홍준이가 토해 내는 한숨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 역시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있지만, 만약 내가 아닌 정태가 큰일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이성적일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다.

눈이 뒤집혀 모든 걸 다 놓는 한이 있어도 철저히 응징을 하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당했으니까, 정태 쪽 박 실장도 괜찮다고 하니까….

“조 전무가 부경화학, 부경물산 쪽으로 잡고 있던 지분을 털어 낸 건 시기적으로 아주 적절했던 거 같아요. 지금 그쪽 비자금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데, 미리 털어 버림으로 확실한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가지는 말라고 하세요.”

“너 이렇게 된 부분에 대해선 가만히 있어라?”

“누굴 상대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책임을 물을 겁니까? 부경화학? 아님 자수해서 들어간 장민규? 그것도 아님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마이크 들고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떠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걸 원하고 있지 않겠어요?”

“누가?”

“장민규. 다 같이 죽자고 이런 판을 짰는데, 우리가 왜 그 판 위에서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 줘요? 그럴 필요 없잖아요. 우린 우리 재경의 이름이 좋은 쪽으로만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만들기에도 급급해야 합니다. 고비드. 곧 그랜드 론칭입니다. 식품 직원들이 얼마나 애써 준비하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 온 프로젝트인지 아시잖아요. 그 시간과 노력을 장민규 그 자식 하나 때문에 이번 이슈에 가려지게 만들면 안 되죠.”

“…….”

“아무리 요즘 세상에 정보 노출에 한계라는 건 없다지만, 대중이 인지하고 기억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라는 분명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한 장민규로 인해 우리 재경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게 아닌, 고비드 브랜드, 그리고 손정태 사장이 재경통신을 겸임 경영하며 유의미한 성과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는 긍정적인 정보들만 계속 쏟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장민규는 퇴원하는 대로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를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리고 정 과장 건은… 정말 멋있으셨습니다.”

놀랐다.

처음 정재현 과장에게 연락을 받고, 홍준이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을 하나 해 줬다는 것과 회사 차원에서 차장 승진을 약속했다는 소릴 듣고 참 잘했다, 적절한 보상을 해 줬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고 영상을 내가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모른다.”

“그걸 왜 자꾸 돌려 보세요?”

“나도 모르겠다. 그냥 계속 보게 돼. 정말 대단했다. 자식들 봉변당하는 걸 보고 이런 말 한다는 것도 참 말이 안 되는 건데, 그거 계속 돌려 보면서 너나 네 형, 그리고 정엽이까지… 그 상황을 대처하는 걸 보고 다들 대단하다 싶었어.”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안 벌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감히 누구라도 우리 재경을 위협할 엄두를 못 내도록 만드셔야죠. 그건 앞으로도 계속 회장님께서 해 나가야 할 역할입니다.”

* * *

내가 자리에 없는 동안 JKF는 모범태를 사장으로 두고 재경식품에서 분사가 되었다.

그리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드디어 고비드 아이스크림의 그랜드 론칭이 이루어졌다.

고비드 그랜드 론칭 전까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모범태 사장은 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찾아오기도 했고, 출근 전에 찾아올 때도 있었으며, 어떨 땐 늦게 퇴근을 하고 기진맥진해 있는 모습으로 찾아올 때도 있었다.

“지금 우선적으로 집중을 해야 하는 부분은 부경화학 장선동 회장한테 회사 공금 비자금 관련 구속 영장이 발부된 이 큰 이슈를 뚫고 어떻게 고비드 론칭의 화제성을 키우느냐 하는 겁니다.”

“네, 그렇죠.”

“우리가 괜히 지금 고비드 론칭을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춘 게 아니잖아요. 아이스크림 비즈니스 자체가 크리스마스 대목으로 1년 장사를 한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연휴 낀 연말이 특수예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준비는 완벽하게 됐다고 보는데, 방금 말씀하신 장선동 회장 이슈가 워낙 크게 잡혀 있고, 거기에 장민규, 장민석 관련 이슈가 묘하게 맞물려 재경의 이름이 계속 거론이 되고 있다 보니 고비드 론칭의 화제성을 우리 기대만큼 키워 낼 수 있을지가… 조금 걱정스럽긴 합니다.”

“지금 제가 사장님께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무조건 해내셔야 한다는 거뿐입니다.”

“…네.”

“1년을 기획하고 준비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결과물입니다. 쁘띠 기뿔리, 스위트럼, 거기에 샘스 핫도그까지. 물론 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별개의 사업이죠. 하지만 처음부터 우린 거기에 고비드 아이스크림까지 엮어서 브랜드 패키지화를 노렸던 거 아닙니까.”

“네. 항상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반드시 성공시키셔야 합니다. 식품의 외식 사업부 직원들의 1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업 아닙니까. 식품에서 독립한 JKF의 첫 프로젝트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농담 삼아 던진 협박.

“사장님.”

“네.”

“이거 론칭 대박 못 만들어 내시면, 저 식품에 1년 더 있을 겁니다. 아니지, 식품이 아니라 JKF에서 1년 더 프랜차이즈 사업에 집중하고 통신으로 넘어갈 겁니다.”

“그럼 저야 감사하….”

“에헤이! 지금 이 분위기에서 사장님이 그런 반응을 하시면 안 되지!”

“크흠….”

두 눈에 힘을 주며 모 사장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그 사고를 당하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 그로 인해 잠시 흔들렸던 우리 재경의 주가.”

“…….”

“거기에 지금 크게 터진 장선동 회장의 비자금 의혹, 그 의혹이 터지기 바로 직전에 부경화학과 부경물산에 잡고 있던 지분을 모두 털고 나온 우리 재경.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 지저분해진 이슈들로부터 우리 재경이 효과적으로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고비드 아이스크림 론칭의 대박, 그리고 그 대박이 만들어 낼 화제성밖에 없습니다.”

“…네.”

“사장님.”

“네.”

“쁘띠 기뿔리. 그거 누가 성공시켰습니까?”

“그야 본부장님이….”

“아니죠. 사장님이 하신 겁니다. 분사되기 전 식품 시절 때부터 외식사업부 총괄은 사장님이셨으니까.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 그걸 성공시킨 것도 결국은 사장님입니다.”

“…….”

“실력과 운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실력은 해낸 걸 다시 또 해낼 수 있으니까 실력인 거고, 내 손으로 해냈지만 그걸 다시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못 한다는 건 운이었단 소립니다. 쁘띠 기뿔리, 스위트럼, 샘스 핫도그. 그거 다 운이었습니까?”

“…….”

“아니죠? 아닙니다. 그거 다 사장님 실력이었습니다.”

“후우… 네.”

“고비드 아이스크림, 준비 열심히 잘하셨잖아요. 반드시 성공시키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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