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298화 (298/303)

298화 응할 겁니다

병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언제 퇴원 허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로 꼬박 2주일을 입원해 있었던 거다.

보통은 퇴원 희망을 하면 병원에서도 알아서 날짜를 잡아 줄 텐데, 이상하게 퇴원에 관해 물을 때마다 병원에선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다.

옆방을 썼던 박 실장은 이미 전에 먼저 퇴원을 했다.

정태 이놈도 진짜 양심이 없는 게 박 실장이 퇴원을 하기가 무섭게 병원을 찾아오는 발길이 뜸해지고 있다.

연말에 신년이 끼어 있다 보니 회사 일이 바쁘다는 건 이해를 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찾아와서 쫑알대던 놈이 발길이 뜸해지니까 이건 또 이것대로 서운했다.

상처 부위 수술 자국엔 어느덧 새살이 올라와 울퉁불퉁해졌고, 대변을 볼 때 힘을 줘도 더 이상 큰 통증은 일어나지 않는다.

샤워를 할 때도 더 이상 큰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

여전히 빠르게 걷거나, 조금이라도 자세를 옆으로 틀 땐 욱신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올라오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이만하면 큰 지장이 없겠다 싶을 정도의 느낌으로 퇴원 허락만 기다리고 있는 중.

새해 아침이라 그런지, 떡국이 나왔다.

이 소화 안 되는 떡국이 아침 식사로 나왔다는 건 슬슬 퇴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거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거겠지?

오늘쯤은 스케일링을 해 주러 오는 담당 의사에게 퇴원에 관해 물어봐야 할 거 같다.

“형수.”

“응? 왜요?”

“나 바람 좀 쐬고 싶은데, 같이 가 줄 수 있나?”

장혜란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원수경한테만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바람을 쐬고 싶다는 핑계를 만들어 냈던 거다.

하늘이가 찾아오면 모를까, 그 외엔 아예 병실을 떠나 주질 않는 장혜란.

이런 핑계라도 만들어 내어야 장혜란이 없는 자리에서 원수경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젠 스탠드 없이 짧은 호스로만 소형 링거를 맞고 있는 중이라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고 간편하게 병실을 나섰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두 명이 익숙하게 나와 원수경을 따라붙었다.

“나 지금 이거 퇴원해도 되는 건데, 일부러 못 하게 하는 거지?”

“누가? 병원에서?”

“연기하는 거 봐라.”

VIP 병동 쉼터 안으로 들어서며 원수경을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능청을 떠는 게, 누가 봐도 내가 하고 있는 의심이 맞는 거였다.

워낙에 VIP 병동 자체가 한정된 병실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쉼터 안으로는 나와 원수경 말고 아무도 없었다.

우릴 따라온 경호원들도 쉼터 공간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굳이 그 안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무슨 연기? 내가 왜 연기를 해요?”

“내가 왜 우리 예전에 명절 때마다 집에서 카드 칠 때 형수만 오링이 났는지 알려 줘? 포커페이스 그런 게 안 되는 사람이야, 형수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짜?”

“나 퇴원 좀 하자. 진짜 도저히 갑갑해서 안 되겠다.”

“이참에 좀 푹 쉬어요. 지난 몇 년 진짜 휴가도 없이 너무 일만 했잖아.”

“이거 봐라,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버님이 그렇게 만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요?”

쉼터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원수경에게 말했다.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 하나 쉬자고 이렇게 여러 사람 병원에 묶여 있게 만들어? 에이, 말이 안 되지. 가뜩이나 형수가 어디 홀몸이냐고. 병원 냄새가 뭐 좋은 냄새라고 임신까지 해서 매일같이 이 냄새를 맡아?”

하지만 원수경도 시아버지의 생각에 동참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도련님이 몰라서 하는 소리고. 임신했을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바로 태교, 그리고 안정이라는 거예요.”

“뭔 또 그런 요상한 논리가 다 있어?”

“실제 그래요. 산모가 너무 몸 사리고 태아에 안 좋다는 건 다 가리고 하잖아? 그 스트레스가 진짜 장난이 아니거든. 그것만큼 안 좋은 게 없어. 살랑살랑 마실 삼아, 운동 삼아 오는 건데 이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무엇보다, 도련님이 여기 이렇게 입원을 해 계시니까 어머님하고 아버님이 매일같이 잠시라도 만나시는 거잖아.”

“약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정작 진짜 약아야 할 땐 약지 못하는 게 우리 형수 찐 매력이긴 하지.”

“누가? 내가? 내가 언제 약은 척을 했다고 그래?”

“내가 있잖아. 날 좀 이용해 보라고.”

“뭐라는 거야, 진짜?”

“퇴원하고 내가 본가로 들어가면 되는 거잖아.”

내 말에 잠시였지만 원수경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두 눈을 수차례 끔뻑거렸다.

“저 두 사람 계속 저렇게 별거 생활하게 내버려 둘 거냐고. 그건 별거 생활하는 본인들도 본인들이지만, 다른 가족들이 못 할 짓이잖아. 계속 아버지 눈치 보면서 엄마 들여다볼 거야? 가족들 모임 자리에 계속 누가 하나 빠지는 걸 승현이, 승현이 동생한테 당연하게 인식을 시킬 거냐고. 아니잖아.”

“…….”

“내가 퇴원하면서 당분간은 본가 생활을 하겠다고 할게. 실제로도 지금 당장은 혼자 지내는 건 좀 무리야. 누가 옆에서 병간호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같아, 내가 생각을 해봐도.”

“그게 어머님이어야 된다?”

“기회가 좋잖아. 형수 말대로 내가 입원하고부터 매일 짧게라도 두 사람 같이 얼굴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사실 이럴 땐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줘야 돼. 그렇게 자신 있게 별거 생활 시작해 놓고 다시 합치자니 자식들 보기에 얼마나 머쓱하겠어? 이럴 때 우리가 조금만 적극적으로 판을 깔아 주면, 못 이기는 척 다시 합치고 그러는 거지.”

“그건… 도련님 말이 맞는 거 같긴 한데….”

“맞는 거 같은 게 아니라 무조건 맞아. 나이 들고 힘 다 빠질 대로 빠져서 옆에 사람까지 없어 봐. 그것만큼 서러운 게 어디에 있어? 엄마 말하는 거야, 엄마. 아버지야 영감 홀애비 냄새 풍기는 거 말곤 그래도 언제까지고 본인이 그만두고 싶어질 때까지는 계속 사회생활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양반이니까. 하지만 엄마는 그런 게 아니잖아. 형수가 옆에서 분위기를 좀 잘 만들어 봐. 퇴원하고 당분간은 본가에서 생활하겠다는 말은 내가 먼저 꺼낼 테니까. 이유야 어쨌든 다시 본가 생활 시작했는데, 내가 다시 내 집에 간다고 엄마까지 돌아가겠냐고.”

“그렇지? 그러진 않으시겠지?”

“둘 다 뭐 따로 만나고 있는 애인이 있어, 아님 성격이 안 맞아 황혼을 준비 중인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돼. 30년 넘게, 40년 가까이 한 이불 덮고 같이 산 사람들인데, 이제 와서 서로한테 차릴 체면 같은 게 어딨어? 그나마 자식들 보기 민망하니까 둘 다 자존심 부리고 있는 거지, 우리가 중간에서 분위기만 만들어 주면 자연스럽게 다시 합치실 거야.”

두 사람의 별거 생활을 끝내게 만들기 위한 나와 원수경의 공조는 곧바로 이루어졌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쯤, 홍준이가 병원에 왔다.

장혜란이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 있게 교대를 해 주기 위해서.

그리고 정태도 비슷하게, 하지만 홍준이보다는 조금 늦게 병실에 도착했다.

정태는 원수경을 데리러 가기 위해서 온 거였다.

마침 또 새해 첫날, 1월 1일이라 명분이 좋았다.

장혜란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전에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퇴원을 언제 하게 될지는 몰라도, 퇴원하고 당분간은 본가에서 지냈음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죠?”

내 말에 홍준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볼 걸 물어봐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불편해도 네가 불편하지, 내가 불편할 게 뭐가 있어?”

“이런 일 한번 겪고 나니까, 혼자 지낼 엄두가 당장은 안 나네요.”

그리고 얼른 원수경에게 눈치를 줬다.

“아 참, 어머님.”

“왜?”

“아주버님네 있잖아요.”

“정엽이?”

“네. 안나하고 데이빗이 원래는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기간에 맞춰서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이번 일 터지고 아주버님 호텔도 영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번 주 목요일에 들어온다고 하네요?”

정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원수경을 쳐다봤다.

하지만 원수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보내는 눈빛 사인에만 집중을 했다.

“들어온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뜻이야? 아예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거야?”

“네.”

시어머니의 물음에 짧게 대답을 해 놓고 남편의 지원을 끌어내는 원수경이었다.

“그지? 파리 쪽 사업 다 정리하고 데이빗 데리고 아예 들어오는 거 맞지?”

“…어.”

남편의 지원 사격을 등에 업고 원수경은 이번엔 시아버지를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리 생활 다 정리하고 뿌리를 내리겠다고 아예 들어오는 건데, 본가에서 다 같이 식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도 홍준이는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지. 뒤로 미뤘다는 소린 나도 들었는데, 그게 이번 주 목요일이었어?”

“네, 저도 승현이 아빠한테 그 이야기 듣고 제 마음대로 준비를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속으로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도련님도 여기 이렇게 입원해 있지, 어머님도 계속 여기 붙어 계시지… 저랑 승현이 아빠만 따로 자리를 만드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아버님이 말씀을 해 주시면, 제가 준비를 해 볼게요.”

“따로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집에서 평소 우리 먹던 상에 숟가락 몇 개 더 놓으면 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그전에는 내가 퇴원을 해야겠네. 가족들 다 같이 모이는 식사 자리에 나만 빠지는 건 안 될 소리잖아. 에이, 이왕 이렇게 입원한 김에 푹 좀 쉴까 했는데, 어쩔 수 없는 거지. 참 정엽이 형 하는 거 보면 진짜… 동생이 이렇게 큰일을 당해서 입원을 해 있는데, 이 와중에 일을 또 그렇게 벌이나? 어차피 해 지나서 오는 거 좀 여유 있게, 여기 정리 다 되는 대로 불러도 되는 걸, 굳이 그렇게 서두르네.”

내가 하루라도 빨리 부르라고 했던 거다.

가족들끼리 그렇게 길게 떨어져 있는 거 아니라고, 어차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는 넘겼지만, 이미 넘어올 준비 다 끝내 놓은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게만 만들지 말라고.

그런 내용을 다 알고 있던 원수경은 결국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다.

벌렁거리고 있는 원수경의 콧구멍에 나까지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리고 정태도 곧 나와 원수경이 짜고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서로 어색해하는 제 부모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던 정태가 나와 원수경으로 하여금 바톤을 이어받고 요령껏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지난 2주 동안 우린 가족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하늘이가 중간에서 고생이 참 많았어요.”

정태의 말에 나와 원수경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힘을 실었다.

“처음 며칠은 아예 집에도 안 들어가고 요 앞에 호텔을 잡아 놓고 생활하기도 했고, 정훈이 깨어난 뒤로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병 수발 자처하고. 제 생각엔 기회가 참 좋은 거 같은데, 정엽이 형네 불러서 가족들 다 같이 식사할 때 하늘이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색해하는 장혜란의 표정을 살피며 정태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늘이가 또 안나하고 개인적으로 많이 친하다네. 아무래도 안나 입장에선 한번 다 같이 식사를 하긴 했어도 여전히 자리가 불편할 거 아니에요. 쉽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 하늘이가 안나하고 데이빗을 자연스럽게 챙겨 주면 자리가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울 거 같은데,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안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늘이도 곧 우리 집 사람이 될 건데 당연히 불러야지.”

* * *

그렇게 나는 이틀 뒤, 화요일 아침에 퇴원을 했다.

홍준이와 정태는 출근을 한 상태였고, 원수경은 승현이 어린이집 등원 때문에 오지 못했다.

장혜란과 함께 퇴원을 했는데, 사실 나는 병원으로부터 퇴원 일자를 받고 나서 곧바로 다른 스케줄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워낙에 내가 따로 챙겨야 하는 짐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본가까지 장혜란과 함께 갔고, 그곳에서 미리 와 대기 중인 정재현 차장과 오랜만에 직접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 바로 나가는 거야?”

짐만 대충 풀어 놓고 곧바로 외출을 준비하는 내게 걱정 섞인 말투로 장혜란이 물었다.

“2주 넘게 병원 냄새만 맡았는데, 콧구멍에 바람은 좀 넣어야 할 거 아냐. 저녁 되기 전에 들어올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요.”

“너 당분간은 기름진 음식 먹으면 안된다.”

“알아.”

“술은 당연한 거고, 담배도 안 돼.”

“안다고. 내 걱정 그만하고, 엄마도 얼른 엄마 짐 챙겨서 다시 와요.”

“…….”

“뭘 그렇게 봐? 그럼 뭐 영영 안 들어올 생각이셨나? 자식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냥 좀 못 이긴 척 다시 들어와요.”

“그래서 몇 시에 올 건데?”

“5시 안에는 들어와.”

정장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편한 복장.

보는 상대로 하여금 격은 지키되 편안해 보이는 복장을 선택해서 차려입고 현관을 나섰다.

지하 차고 안에서는 정재현 차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얼른 차 뒷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올라 안전띠를 매며 정 차장이 물었다.

“지금 바로 그리로 가실 겁니까?”

“면회 예약해 놨죠?”

“네. 그쪽 구치소 소장하고 어제 통화 끝냈습니다. 11시에서 1시 사이는 아무 때나 와도 면회를 잡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면회 신청에 응할지 응하지 않을지는 그쪽 소장도 장담을 못 한다고, 강제를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합니다.”

장민규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 녀석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가 끓는 기분이다.

“응할 겁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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